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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주의자>라는 노래가 있다. 프랑스의 68혁명 시기에 가수 자크 뒤트롱이 부른 이 노래는 당시의 사회분위기를 조롱해 화제가 됐다. 노래 속의 '나'는 공산주의에 찬성하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에도 찬성한다.

"나는 외치네. 혁명 만세, 권력 만세, 레지스탕스(저항, 항독) 만세, 꼴라보(대독협력, 프랑스판 친일파) 만세. 이의를 제기하거나 주장하지도 항의하지도 않아. 내 행동은 단 하나, 저고리를 뒤집어 입는 것. 늘 유리한 쪽으로…."

그리고 정치 상황이 바뀔 때마다 뒤집어입다보니 너덜너덜해진 저고리를 보며 '나'는 다짐하는 것이다.

"다음 혁명 때는 바지를 뒤집어 입어야지."

레지옹 도뇌르와 함께 묻힌 꼴라보 '모리스 파퐁'

▲ 모리스 파퐁의 2002년 모습.
ⓒ AP=연합뉴스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시기에는 나치에 협력하고 해방 후에는 레지스탕스로 둔갑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기회주의자'가 죽었다. 지난달 17일 96세를 일기로 눈을 감은 모리스 파퐁. 파퐁은 이어진 21일 가족 친지 50여 명이 잠들어있는 가족묘지에 묻혔다. 1962년 샤를 드 골 대통령이 수여한 레지옹 도뇌르 훈장과 함께.

1998년 반인도범죄 명목으로 10년형을 선고받았을 때 파퐁의 훈장 착용 자격도 동시에 박탈됐다. 지난 2004년 시사주간지 <르 푸앵>에 훈장을 착용한 파퐁의 사진이 실려 2500유로의 벌금형이 내려진 일도 있다. 파퐁은 훈장을 안고 세상에 안녕을 고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죽음을 널리 알린 것이다. 자칫 초라할 뻔 했던 죽음을.

집권당 대중운동연합(UMP)은 파퐁과 훈장이 동시 매장된 사실을 일러 '충격적'이라 했고 제1야당 사회당(PS)은 성명을 통해 '나치 강제수용소 희생자 가족에 상처를 주는 사건'이라 했다. 프랑스의 정계는 좌우를 막론하고 이것이 '도발'이라 평가했으나 관 뚜껑을 다시 열 수는 없는 일.

파퐁이 묻히던 날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그의 생애를 조명하며 이런 제목을 달았다.

"존경스럽도록 치졸한 자의 기나긴 생애"

망자를 모욕한 표현이라 비난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파퐁의 삶은 더덜이 없이 치졸했으므로.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길래 파퐁은 죽어서도 논란이 되고 있는 걸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의 기회주의적 행보 때문이다. 변절에 변절을 거듭하면서 '가늘고 길게' 살다간 파퐁의 인생유전.

파퐁은 독일의 프랑스 점령 시절로부터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코르시카, 알제리 콘스탄틴, 파리 경찰국장을 두루 거쳤으며 프랑스 남부항공 대표를 지낸 뒤 하원의원, 예산장관까지 탄탄대로를 걸어온 인물이다. 비시 괴뢰정부 아래 행해진 그의 꼴라보 경력이 발각되기 전까지.

1981년의 일이다. 당시 예산장관이었던 파퐁이 프랑스의 풍자 주간지 <르 카나르 앙셰네>를 표적으로 세무조사를 실시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를 계기로 5월 6일자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신문 <리포스트>는 보르도의 유대인 강제이송에서 파퐁의 역할을 파헤친 기사를 소개한다. 영화의 아버지 뤼미에르 형제의 표현을 빌면 '물 뿌리리던 정원사가 물벼락 맞은' 형국.

▲ 지난 21일 파리 동부의 한 묘지에서 파퐁의 친구와 친척들이 파퐁의 관을 옮기고 있다.
ⓒ AP=연합뉴스
"존경스럽도록 '치졸한 자'의 기나긴 생애"

<리포스트>가 폭로한 1943년 2월과 1944년 4월자 자료에는 당시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한 도시 보르도에서 치안을 담당한 파퐁의 서명이 들어있었다. 어린이 223명을 포함, 총 1690여 명의 유대인을 나치 강제수용소로 이송시킨데 파퐁이 연루됐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프랑스 3~5공화국을 거치며 국가 고위 관료로 승승장구해온 파퐁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무슨 날벼락인가. 같은해 12월 15일 레지스탕스 출신들로 구성된 명예 배심원들은 "파퐁 또한 레지스탕스 출신"이라 선언해버리고 만다. 비시 괴뢰정부에 복무해온 파퐁은 당시의 수많은 꼴라보들처럼 해방과 동시에 레지스탕스로 둔갑했던 것이다. 재빨리 '저고리'를 뒤집어 입은 것.

파퐁의 꼴라보 전력과 레지스탕스 진위 여부를 밝히는 논쟁은 17년을 끌었다. 그리고 역사는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1997년 10월 마침내 법정에 선 파퐁에게 이듬해인 1998년 징역 10년형이 선고된 것. 죄목은 '반인도범죄'. 징역 10년 형은 당시 87세의 파퐁에게는 종신형과도 같은 의미였다.

1999년 스위스로 도피했다 체포되는 등 '치졸한' 행태를 더한 파퐁은 그해 10월부터 복역을 시작했으나 2002년 9월 신병을 이유로 석방됐다. 단 3년 짧은 기간 죗값을 치르는데 그친 것. 파퐁의 교훈은 그러나 프랑스 사상 처음으로 국가 고위관료를 심판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사건 발생 50년이 지난 후에도 끈질기게 이뤄진 법의 심판으로 기록됐다. 이른바 공소시효가 없는 반인도범죄의 위력을 실감케 한 것이다. 그리고 파퐁 재판은 프랑스의 국가 정기를 세우는 정의로운 심판을 말하는 보통명사가 됐다.

파퐁은 지난해 45주년을 기념한 일명 '피의 화요일'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알제리 독립전쟁(1954~1962)이 막바지로 치닫던 1961년 10월 17일 프랑스인 전체가 아닌 프랑스의 무슬림 알제리인에 한해 발령된 야간통행 금지령에 항의하는 평화 시위대를 폭력으로 진압한 '피의 화요일'. 맨손으로 시위에 나선 수 천의 시위대는 무자비한 경찰의 곤봉에 고꾸라졌다. 경찰국으로 연결된 생-미셸 다리 위에서 경찰은 시위대를 센 강으로 몰아넣기까지 했다. 파리 한가운데서 벌어진 인간사냥이었다.

지난 2002년 시사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에 따르면 이날 알제리인 60여명이 센 강에 빠져 익사했고 이어진 일요일까지 200여 명이 살해됐다 한다. 이 사건을 지휘한 인물이 당시 파리 경찰국장(1958~1966)이었던 파퐁이다.

꼴라보 청산과 '정의의 사람들'이 바로 세운 프랑스의 역사

▲ 1958년 파리 경찰국장 시절의 모리스 파퐁.
파퐁의 죽음을 전후해 우연과 필연이 나란히 전개된 것도 눈여겨 봐야할 일이다. '파퐁 재판' 담당 판사 장-루이 카스타녜드가 파퐁이 눈을 감은 다음날인 지난달 18일 62세를 일기로 눈을 감은 우연. '정의의 사람들'이 지난 1월 18일 팡테옹에 입성한 필연. 1996년 앙드레 말로, 2002년 알렉상드르 뒤마의 유골이 이장돼 총 73인의 거인이 잠들어 있는 팡테옹 지하납골당의 문이 다시 우렁차게 열린 것이다.

예루살렘의 홀로코스트 기념관 '야드 바솀'이 부여하는 영예로운 이름 '정의의 사람들'은 나치로부터 유대인을 구해낸 '평범한 영웅'들을 가리킨다. 게슈타포(나치 독일의 비밀경찰)의 손에 나치 강제수용소로 보내질 위기에 빠진 유대인을 숨겨주거나 피신시켜 이들의 생명을 구한 사람들. 영화 <쉰들러 리스트>(1993, 스티븐 스필버그)의 오스카 쉰들러는 프랑스에서도 총 2740명이 존재했던 것이다. 전세계를 통틀어 가장 많은 인원이다.

그러나 300여 유골을 수용할 수 있는 팡테옹 지하납골당의 규모를 감안할 때 프랑스의 정의의 사람들 2740명 모두를 이장할 수는 없는 일. 때문에 그들의 이름으로 단 한 사람의 유골만 이장됐다. '프랑스 정의의 사람들에 바치는 민족의 경의'라는 묘비명과 함께.

이것은 1942년 7월 16일 파리에 있던 동계경륜장에서 총 1만2884명의 유대인이 체포돼 나치 강제수용소로 이송된 유대인 소탕작전에서 연유한다. 1995년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1942년을 참회하며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유대인 학살에 대한 프랑스의 과오를 인정했다. 그리고 파퐁 재판과 함께 '정의의 사람들'은 부단히 진행된 역사 바로잡기의 완성을 알리는 신호였다.

"정의의 사람들, 당신들 덕분에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프랑스와 프랑스의 역사를 바로 볼 수 있었습니다."

시라크 대통령은 이날을 '비시정권에 얼룩진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날'이라 선언했다. "머리를 높이 들고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힘은 역사 바로잡기에서 시작된다"며. 그리고 시라크는 힘주어 말했다. 아니 말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제 위대한 프랑스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제 프랑스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해방 이후 '피의 목욕'이라는 말이 한때 유행했을 정도로 꼴라보 숙청이 격렬했던 프랑스에서도 민족 반역자로 일그러진 역사를 바로 세우는데 60여 년의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인도범죄의 칼날로 철두철미하게 심판한 사례로 남은 꼴라보 파퐁은 끝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도 뉘우치지도 않은 채 레지옹 도뇌르 훈장과 함께 땅에 묻혔다.

그러나 망각 속에 묻어버리지는 말아야할 것이다. 역사 속의 가해자들이 너덜너덜해진 저고리를 흔들며 바지까지 뒤집어 입을 시간도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도 늙어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파퐁'을 심판하지 않았다.

태그:#모리스 파퐁, #프랑스, #기회주의자, #UMP, #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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