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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만호(아랫줄 맨오른쪽) 할아버지는 지난 50년 12월 소년병으로 강제징집됐다. 8사단 공병대에 배치됐던 그는 전방에서 전투도 치렀고 후방에서 공비도 토벌했다.
ⓒ 김만호씨 제공

"몇년 전부터 매달 7만원씩 나와. 그거밖에 없어."

평양이 고향인 한 학생은 한국전쟁 중에 강제징집돼 사선을 넘나들었다. 하지만 자신을 전쟁터로 내몰았던 '조국'은 그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않았다.

소년병으로 한국전쟁에 참가했던 그에게 남은 것은 '참전유공자증'과 달마다 나오는 7만원의 위로금(참전명예수당)이 전부다. 이것도 지난 2003년 노무현 정부로부터 뒤늦게 받은 혜택이었다. 그 전까지 그는 전쟁터에서 죽지 않고 살아나온 것만도 다행이라고 자신을 위로해왔다.

16살, 월남 직후 소년병으로 강제징집

김만호(73) 할아버지. 그가 태어나서 자란 곳은 평양시 교구동 58번지. 그의 집은 평양역 근처에 있었다. 그 곳에서 초등학교(성남)와 중학교(평양8중)를 다녔다. 교구동에는 김책공대의 모체인 평양공업대가 있었다.

그가 고등학교(평양1고) 1학년이었을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했지만 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미군 등 연합군이 북진하면서 폭격이 심해지자 그는 50년 12월 월남했다.

"미군의 폭격이 심해지자 아버지가 '3일만 있다가 오라'고 했어. 그 말만 믿고 이불보따리 하나 싸서 들고 대동강을 건넜지. 그런데 그것이 아버지와 마지막이었어. 난 미군차를 얻어타고 문산까지 왔고, 거기서부터 걸어서 서울까지 왔지."

전쟁은 '다양한 운명'을 만들어낸다. 혈혈단신 월남한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고등학교 선배들을 따라 다니다 서울 용산역 근처에서 강제징집됐다. 국군은 겉으론 '모집'을 내세웠지만 사실상 '강제징집'이었다. 그의 나이 16살에 불과했다.

한국전쟁 초기 국군의 병력 손실은 심각했다. 50년 8월 미국 국방부의 발표에 따르면, 국군의 사상자수는 3만7000명에 이르렀다. 이는 한국전쟁 전 전투병력(6만7400여명)의 55%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결국 국군은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18세 이하도 징집했다.

"뭘 모르는 나이였기 때문에 무서웠지. 선배들이 '넌 나이가 어리니까 부산에서 풀어줄 것'이라고 말했어. 하지만 부산에 오자마자 그대로 교육대로 끌고 가버리더라. 물론 그 때 군에 안가면 딱히 할 게 없었어. 전시에는 그저 살면 사는 거고 죽으면 죽는 거라 생각했지."

그는 부산으로 내려가 17교육대에서 2주간 속성훈련을 받았다. 그곳에서 군번까지 부여받은 뒤 공병교육대를 거쳐 8사단 공병대에 배치됐다. 그리고 강원도 횡성지역에 투입됐다. 그 때가 51년 1월. 전쟁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그나마 그는 공병으로 배치된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북한군과 직접 맞서야 하는 보병보다 공병이 더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는 "보병으로 안 간 것은 정말 다행"이라며 "내가 죽지 않으려고 줄을 잘 선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전시에 보병과 공병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보병이 고지를 점령하면 우리 공병은 지뢰를 매설했어. 어떻게 보면 우리가 더 전방이었던 거야. 우리도 총을 쏘며 인민군과 전투를 치르기도 했지. 그러다 대전차 지뢰를 건드려 죽는 경우도 있었어."

"귀순한 20살 인민군 부소대장 잊을 수 없어"

▲ 통상 소년병이라고 하면 자발적으로 군에 입대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김만호(오른쪽) 할아버지는 강제징집된 소년병이다. 그의 앳된 열굴이 인상적이다.
ⓒ 김만호씨 제공
그의 고백처럼 전쟁은 어느 누구에게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지뢰를 매설하거나 다리를 놓고 파괴하는 공병이라도 전시에는 직접 전투까지 치러야 했다. 게다가 북진하던 연합군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빠르게 밀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전세가 불리해지는 상황에서 그가 소속된 부대는 중공군에 포위됐다. 다행히 일본군 상사출신으로 당시 지형을 잘 알고 있던 대대장을 따라 다닌 덕분에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부대는 대구로 내려가 재편성되었다.

부대가 재편성된 뒤,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공비토벌'이었다. 전주에서 정읍까지 걸어가면서 1주일간 공비를 소탕하기도 했다. 특히 내장산 공비토벌에서 가장 큰 성과를 올렸다고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동료들이 목숨을 잃었다.

"남원-운봉 구간에서 우리 부대가 당했어. 그들은 우리보다 화력이 세드라고. 금산에서도 당해서 많이 죽었어. 사람들이 지쳐서 시체 한구를 그냥 묻었다가 다음날 찾으러 갔다가 대여섯명이 죽었어. 공비들이 쏜 납탄에 맞으면 살아 남을 수가 없어."

그는 이후 '전방배치→포위당한 뒤 부대 재편성→공비토벌→전방배치'를 되풀이하다 결국 53년 7월 전방에서 휴전을 맞이했다. 8사단 공병대 소속이었던 그는 인민군들과 함께 휴전선 구축작업에 참여했다. 그는 "당시 38선에 철책선을 치는 작업을 했다"며 "작업을 할 때는 계급장을 떼고 했다"고 회고했다.

휴전선 구축작업 중에 그는 후방으로 내려왔고, 당시 경남 김해에서 창설된 1206건설공병단에 배치됐다. 거기에서는 미군으로부터 건네받은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정리했다. 그리고 55년 1월 10일 제대했다. 소년병으로 강제징집된 지 4년 만이었다.

소년병으로 한국전쟁을 치른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인민군 화기중대 부소대장으로 귀순했던 박응선씨였다. 20살이던 그는 소대원을 데리고 귀순했다. 하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휴전되던 날 목숨을 잃었다.

"소대장을 처치하고 귀순했다는 것 같아. 우리 중대에서 잡았는데 포로수용소로 안 넘기고, 일등중사 계급장을 달아줬어. 그런데 휴전되는 날, 차를 타고 가다가 포탄에 맞아 죽어버렸어. 잘 되라고 잡아놨는데 죽어버린 거야. 그래서 그를 포로수용소에 안 보내고 계급장을 달아준 중대장이 병원에서 권총을 내놓고 살려 놓으라고 난리를 쳤지."

"4년간 잡혀가는 바람에 공부도 못해"

▲ 김만호 할아버지는 지난 55년 1월에 제대했다(왼쪽이 제대증). 그는 제대 52년 만인 2003년 참전유공자증(오른쪽)을 받았고, 매달 참전명예수당(7만원)을 받고 있다.
ⓒ 오마이뉴스
제대 후 그는 고향(평양)에 돌아갈 생각만 했다. '곧 통일이 되겠지' 하는 실낱 같은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휴전선은 돌아갈 수 없는 국경선이 돼 버렸다. "3일만 있다 오라"고 당부하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지곤 했다.

그는 다시 가혹한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물론 해방 전 전남 목포로 시집왔던 둘째누님이 있어 지독한 외로움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가진 것이라곤 제대증밖에 없었다.

"제대 후 서울로 돌아왔는데 일거리가 없었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동대문 시장에서 노가다를 했어. 당시 청계천을 복개했는데 거기서도 일을 했지. 또 숯장사도 따라다니고, 기름장사도 했어. 당시 미군 부대에서는 나오는 '꿀꿀이죽'을 팔기도 했지. 그 때는 참 힘들었어."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공병대 작전과 근무시 설계도를 자주 접한 덕분에 목수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노가다 하는 사람들은 배우지 못해 설계도를 못 읽었어. 하지만 나는 공병에서 근무할 때 (설계도를 갖다주면) 축소모형을 잘 만들었어. 또 형님이 공업학교를 다녀서 어깨 너머로 좀 배웠다고. 그래서 웬만하면 설계도는 다 볼 줄 알았어. 그런 덕분에 나는 대접을 아주 잘 받았어."

그는 40년 넘게 목수일로 생계를 꾸려왔다. 카타르·예멘·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등 해외건설현장에도 다녔다. 하지만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고 있노라면, 그의 회한은 깊어진다. 소년병으로 강제징집 당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인생이 더 넉넉했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초등학교 동창들은 다 잘 살아. (내가 소년병으로 끌려가 있는 동안) 대학도 다니고…. 나보다 고생을 덜 했지. 허무하더라. 도대체 나는 뭘 했나? 억울해. 4년 동안 잡혀가는 바람에 공부를 할 수 없었어. 4년간 형무소에서 살다 나온 느낌이 들어. 죽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래도 나는 살았으니 다행이지."

"소년병도 학도병 수준으로 명예회복돼야"

▲ 김만호씨
ⓒ 오마이뉴스 구영식
그가 이런 상념에 휩싸인 데에는 정부의 무관심도 한 몫 했다. 정부는 지난 2002년 10월에서야 70세 이상 참전용사들에게 참전증과 함께 매달 5만원의 위로금(현재는 7만원)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그는 2003년부터 이런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다.

특히 그는 일반 소년병과는 크게 다르다. 보통 소년병이라고 하면 '애국심'에 불타 자발적으로 군에 입대한 나이어린 병사를 일컫는다. 하지만 그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강제징집된 소년병이었다. 그런 점에서 정부의 책임이 더 무거울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소년병으로 참전한 얘기를 들어왔던 장남 김성환씨는 "학도병은 명예뿐만 아니라 국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는다"며 "소년병도 학도병과 비슷한 수준으로 존중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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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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