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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한 개골산의 모습.
ⓒ 이희동

금강산에 오르기 시작하다

드디어 도착한 금강산 등산의 시작점 온정리. 가이드들은 예상했지만 믿기 싫었던 현실을 통보했다. 25년 만의 폭설로 금강산 등산이 대부분 통제되었다는 것이다. 눈이 워낙 많이 온 탓에 평소 버스로 20분 걸리는 주차장까지만 해도 2시간이 걸린다나. 결국 금강산의 1/3도 못 본다는 결론이었다.

가이드들은 대신 온천이 12달러에서 5달러로, 이날 개장한 눈썰매는 공짜라며 위로 아닌 위로를 시도했지만 어디 금강산에 온천과 눈썰매 때문에 왔겠는가.

@BRI@사람들은 어쨌든 그냥 갈 수는 없다며 등산을 고집했고, 가이드들은 북측과 협의한 이후 주차장까지 우리를 안내했다. 비록 옥류동과 상팔담은 보지 못하더라도 주차장 근처 신계사까지는 걸어서 왕복하기로 했다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었다.

남들 버스 타고 지나칠 길을 뚜벅뚜벅 걷는 것도 새로운 맛이려니. 원래 절이나 산이란 것이 그렇지 않은가. 버스를 타지 않고 걷다 보면 못 보는 것도 다시 볼 수 있는 법. 게다가 이 지역은 기존의 여러 군사시설물 때문에 사진 찍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었다 하니 어쩌면 눈 때문에 오히려 자유롭게 사진 찍을 수 있는 우리가 행운을 잡은 건지도 모른다.

아이젠을 차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곧 북한 최고의 휴양지라는 김정숙 휴양소가 나타났다. 건물에 김일성의 아내 김정숙 이름을 붙인 걸 보아하니 결코 예사롭지 않은 건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건물은 칠이 벗겨진 건지, 아님 아예 칠을 하지 않은 건지 콘크리트 고유의 거무튀튀한 색깔이었다. 인민들에게 근검절약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일까? 아님 칠마저 하기 어려울 정도로 생활이 궁핍한 걸까?

▲ 김정숙 휴양소.
ⓒ 이희동

북측 안내원과의 대화

얼마나 올랐을까. 어느새 낯설게 보이는 두 명의 사내가 내 옆으로 따라붙어 있었다. 처음엔 그러려니 했지만 말하는 품새가, 그들의 옷차림이 결코 범상치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북측 안내원이었지만 아마도 감시원인 듯했다.

그리고 그들 중 한 명과 이어지는 대화. 그는 150명쯤 되는 관광객 중 유일한 20대 남성인 나를 말상대로 고른 듯했고 북한학 대학원생이었던 난 그와의 대화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금강산 풍경이야 내려오면서 봐도 되는 것이고, 어디 이런 대화를 할 기회가 흔하겠는가. 평소 연구소 등에서 탈북자들과 면접 기회가 많은 나였지만 북한 체제 안에서 그 체제의 논리를 펴는 이와의 대화는 처음이었다.

그는 교육을 받았는지, 아님 워낙 많은 관광객들과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인지 남한 사정에 대해서 '빠삭'했다. 당시 세간의 주요 관심대상이었던 관습헌법부터 시작해 새만금 문제, 효순·미선 사건 등 모르는 것이 없었다. 다행히 나 역시 북한학과로서 북한 사정에 아주 어두운 편도 아니었다. 덕분에 처음 만난 사이었음에도 우리는 쉽게 말을 이어나갈 수 있었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 신계사지에서 바라본 금강산.
ⓒ 이희동
그러나 끊어지지 않는 대화에도 나는 그와의 대화가 불편했다. 농담 반 진담 반, 북으로 넘어오라던 안내원의 정치적인 태도도 태도였지만 무엇보다 내 스스로 행하고 있는 자기검열 때문이었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이걸 말하면 그가 대답하기 궁색하겠지'라고 으레 짐작하며 말을 가려 하는 자기검열의 피곤함.

반면 북측 안내원은 자신이 배운 바, 느낀 바를 모두 말하는 듯 보였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상대적 가치보다는 절대적 가치에 익숙한 그들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는 그들 앞에서 말 한마디에도 신중하려니 짜증이 날 수밖에. 그들은 나와 달리 남한 체제에 속해 있는 나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

이 불편함은 결코 단순히 외국인을 만났을 때 느끼는 이질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냉전시대 각기 체제의 우월함을 교육받았던 이들이 마주쳤을 때 느끼는 감정이었으며, 나는 이를 바탕으로 나의 언사가 그들의 심사를 건드리는 게 아닌지 말을 아끼고 있었다.

하나의 체제라면 분명 공과를 모두 안고 있을 터인데, 나는 내게 각인되어 있을 냉전의 편견이 두려워 그들에게 내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우리 사회의 진보단체들이 정치적 계산과 상관없이 북한의 인권문제를 지적하지 못하는 것도 아마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어쨌든 신계사 도착. 그러나 그렇게 대화를 끝내려니 억울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나만 그를 배려하기 위해 혼자 쩔쩔맨 것 같다는 그 억울함. 그래서 야심 차게 한마디 내던진다.

"아까부터 선생님은 계속 민족을 위해 금강산을 개발했던 정주영을 칭찬하시는데, 어쨌든 노동자를 위한다는 프롤레타리아 국가에서 1970~80년대 남한 노동자들을 착취해서 자본을 모았던 정주영을 칭찬한다는 것은 어폐가 있지 않습니까?"

순간 흐르는 적막감. 나의 질문은 분명 어려웠을 게다. 그러나 곧 그는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착해지는가 봅메다."

청산유수와 같은 그의 답변. 그것이 그의 진심에서 우러나왔든, 교육의 결과이건 간에 그의 임기응변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북한이 개방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자기합리화는 갖춰야 할 덕목 중의 하나려니.

▲ 금강산 신계사지에 덩그러니 자리잡은 대웅전.
ⓒ 이희동
▲ 하산길의 신계천.
ⓒ 전소영
북한 안내원과 헤어진 후 신계사를 둘러본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한국전쟁 통에 소실되어버린 신계사지지만 그곳에는 남한의 조계종이 복원사업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대웅전 하나가 생뚱맞게 서 있었다. 물론 사지에 다시 사찰을 세운다는 것이 어찌 나쁜 일이겠느냐만은, 선교의 이름으로 북한 진출을 꿈꾸는 남한 내 종교단체들이 가지고 있는 소제국주의적 의식은 성찰되어야 하지 않을까.

금강산을 내려오면서

더 이상 등산을 포기하고 다시금 그 길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내려오는 길은 북측 안내원이 동행하지 않았기에 마음껏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비록 금강산의 절경은 다 볼 수 없었지만 금강산 설경을 볼 기회가 어찌 쉽게 다시 오겠는가.

▲ 쭉쭉 뻗은 금강송들.
ⓒ 전소영
책으로만 봤던 그 쭉쭉 뻗은 금강송들. 버스를 타고 봤다면 창밖의 금강송 역시 한낱 나무에 불과했을 진데 실제로 그것들을 보고 있자니 왜 금강산이 천하명산 금강산이라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더불어 파랗게 개어가는 하늘. 햇살에 반짝이는 흰 눈이 금강산의 원시미를 더해주고 있었다. 어쩌면 저 하얀 눈이 금강산에 새겨진 인간의 오만함을 가려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얼마나 걸었을까. 다시 온정리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북한군 시설들이 곳곳에 보였다. 금강산은 하얀 머리를 드러내놓고 파란 하늘을 이고 있건만 그를 등 뒤로 내려오려니 발걸음이 가벼울 수만은 없었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바위에 일필휘지로 갈긴 듯한 북한의 그 유명한 글발들. 만약 통일이 된다면 저 글발들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 것일까. 한반도 내 바위들에 남겨진 수많은 선인들의 한문 낙서와 그리 다를 바 없겠지만 어쨌든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그 내용을 떠나 주위 풍경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인간 욕망의 각인이라는 점에서 북한의 글발은 우리네 몇몇 사찰들이 건립해 놓은 허연 화강암 부처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 북한 곳곳에 새겨져 있는 글발들.
ⓒ 이희동
온정각에 내려와 점심을 먹었다. 만원이라는 돈에 비해 별로 맛은 없었지만 내가 낸 돈이 많은 북한 아이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생각에 밥풀 하나 남기지 않고 끝낸 한 끼의 식사였다.

삼일포 관광

다음 코스는 삼일포. 가이드들은 눈도 녹지 않았다며, 어차피 삼일포는 내일 갈 수 있다며 우리의 발걸음을 온천, 기념품점으로 유도했지만 이날 삼일포를 가지 않으면 내일 만물상을 포기해야 했기에 우리는 굳이 삼일포를 고집했다. 그래도 금강산에 왔는데 삼일포-해금강 코스보다는 금강산 만물상을 봐야지 않겠는가. 결국 가이드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은 8명이 삼일포 관람객의 전부였다.

온정리에서 삼일포 가는 길은 무엇보다 그 주위 풍경이 볼 만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정신없던 아침과 달리 이제 창밖을 살필 만큼 여유가 생긴 것이리라. 길가에는 북한 인민들의 일상이 조금은 가려진 채로 그나마 보이고 있었다. 그들의 우체국이며, 마을 어귀에 붙여져 있는 김일성의 초상화, 그리고 곳곳의 붉은 글씨들과 학교, 여기저기서 눈을 치우는 사람들.

사람 사는 곳이 얼마나 다르겠는가. 붉은 글씨와 화려한 그림이 함유하고 있는 정치성에 과도한 의미부여를 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예전 반공 포스터들이 그랬듯이, 지금까지 지하철에 붙어있는 국정원의 국가안보 관련 문구들도 그렇듯이 그것들은 일상일 뿐이었다. 너무 익숙해져 버려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일상에 희석되어버린 이데올로기의 편린들.

그러나 가이드는 신기하다는 듯 연신 감탄사를 터뜨리며 여기는 북한 우체국, 학교 등이라고 창밖을 소개하고 있었다. 물론 나와는 다른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었겠지만 '자본'으로 그 지역 조망권을 사버린, 천박한 체제 우월성에 기댄 시각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자격지심일까. 어쨌든 이날 새벽 DMZ를 지나오면서도 느낀 바였지만, 타인의 삶을 구경거리로 전락시키는 이 관광이 과연 '민족'이란 이름으로 용서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 설원이 되어버린 삼일포.
ⓒ 이희동
곧이어 삼일포 도착. 책에서 봤던 그 파란 호수 대신 하얀 설원이 펼쳐져 있었다. 우선 가이드의 안내로 들어간 단풍관에서 메뚜기, 감자전을 안주로 막걸리를 한 잔 걸쳤다. 그곳에는 온정각 상품대에서 능수능란하게 손님들을 맞이하는 조선족들과는 달리 순박해 보이는 북한 여성들이 직접 물건을 판매하고 있었다. 왜 그리 반갑던지.

단풍관에서 나와 삼일포를 모두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봉래대로 자리를 옮겼다. 언제부터인가 북한 안내원이며 감시원이 우리 뒤를 따르고 있었지만 아침에 금강산을 오르며 워낙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았다.

봉래대에서 바라본 삼일포. 봉래 양사언이 왜 그곳에다 자리를 잡고 살았는지 알 수 있을 만큼의 아름다운 풍광이었다. 하얀 석호와 저 멀리 보이는 하얀 머리의 우람한 금강산, 그리고 반대 옆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과 맞닿은 푸른 바다. 마지막으로 흠잡을 데 없는 풍광 속에 방점 찍듯 존재하는 조그만 정자들. 오호라. 전설처럼 화랑들이 삼일을 놀고 갈만한 그런 곳이었다.

그런 봉래대 풍광에 연신 디카를 들이대고 있자니 옆에서 북측 가이드가 안내를 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노래 한 소절까지. 물론 그렇게 교육을 받았을 테지만 진정 풍류를 아는 이라면 이곳에서 시 한 수는 힘들더라도 노래 한 자락은 불러야 할 것이다.

봉래대를 내려와 장군대를 오른다. 우선 그 이름부터, 콘크리트 건물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어지는 장군대와 관련된 김정숙의 전설. 그러나 그들의 붉은 전설보다는 근대의 오만함이 더욱 가슴 아팠다. 곳곳에 박혀있는 계몽의 구절들과 지시적, 기념비적 조형물들. 어쩌면 이 모든 편견은 북한 사회를 사회주의가 아닌 근대의 코드로 읽어 내리려는 내가 갖는 한계일지도 모른다.

▲ 푸른 하늘과 하얀 호수.
ⓒ 이희동
▲ 삼일포 전경.
ⓒ 이희동
장군대를 내려오는데 우연찮게 북측 안내원과 군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수색중대로 최전방에서 근무했다고 하니 당장 내 사격 솜씨를 묻는다. 선군시대를 살아가는 그들의 세상 바라보는 기준인가. 아마도 분단으로 규정되어진, 군대와 밀접할 수밖에 없는 한반도 남아들의 세상 바라보는 기준이려니.

삼일포를 모두 구경하고 온정리로 돌아온다. 가이드는 우리를 교예단 공연으로 이끌고 있었지만 나의 발걸음은 그 유명한 금강산 온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2005년 1월 다녀온 금강산 여행기입니다. 이 기사는 유포터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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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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