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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맞수 한 프랑스 화가가 지난달 말 니스 카니발에서 사용될 대중운동연합 후보 사르코지(왼쪽)와 사회당 후보 루아얄의 얼굴 모형을 만들고 있다.
ⓒ AP=연합뉴스
자크는 너절한 회계사.
니콜라는 경찰로 돌아가라.
리오넬, 네 휴대폰 번호는 잊었어.
세골렌, 사회주의자들은 어딨니?


프랑스의 가수 칼리파가 불러 히트한 '세골렌과 니콜라'라는 노래의 후렴구다. 물론 세골렌은 프랑스의 사회당(PS) 대선후보 세골렌 루아얄을, 니콜라는 집권 대중운동연합(UMP)의 니콜라 사르코지를 말한다. 이 노래는 두 달 반 여 앞으로 다가온 프랑스의 대선 분위기를 교묘하게 비틀어 화제가 됐다.

사르코 vs 세고? 대중가요로 톺아보는 2007 프랑스 대선

이를테면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을 '너절한 회계사'로 표현한 것. 이것은 사르코지를 견제하기 위해 막판 대선 출마 여부를 놓고 주판알을 튕기는 시라크를 조롱한 것이다. '사르코지는 경찰로 돌아가라'고? 치안유지를 빌미로 강압적인 경찰 정책을 펼쳐온 사르코지는 대통령이 아니라 경찰이 천직이라는 비아냥.

사회당의 두 인물 루아얄과 리오넬 조스팽 전 총리를 묘사한 부분에는 좀더 복잡한 의미가 들어있다. 칼리파가 노래를 통해 '휴대폰 번호를 잊었다'는 조스팽은 지난 2002년 일명 '정치대지진'과 함께 '사라진' 인물. 2002년 4월 21일, 지난 대선에 도전한 바 있는 조스팽은 보름 간격으로 2차에 걸쳐 실시되는 대선 1차전에서 엉뚱하게도 극우당 국민전선(FN)의 장-마리 르펜에 밀려 '탈락' 했고 즉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지난해 여름 조스팽은 다시 사회당 대선 후보 출마를 노렸으나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미 잊혀진 정치인이었던 것.

"4/21의 재연은 막아야 한다!"
지난해 11월 사회당 대선 후보 경선을 지배한 것은 2002년 4/21의 트라우마였다. 때문에 집권당 후보에 맞설만한 '강한' 후보, 강할 뿐만 아니라 대중적 인기를 모을 수 있는 후보가 필요했다. 세골렌 루아얄이었다. '세고 마니아(세골렌 광팬)' 열풍을 일으키며 지난해 11월 16일 60,61%라는 놀라운 지지율로 사회당을 '접수'한 여인. 지난해 초까지만 하더라도 '미확인비행물체(UFO)'로 불려온 루아얄이 사회당 대선 후보로 당당히 서기까지 14개월이면 족했다.

경선 기간 동안 대안세계주의(옛 반세계주의)와 북유럽 모델을 본 딴 참여민주주의를 주창한 루아얄은 그러나 주 35시간 노동에 애매한 입장을 취하는 등 '사회주의 정책 부재'라는 비난에 허둥거려야 했다. 이런 루아얄의 실체를 잘 보여주는 동영상 하나가 인터넷을 통해 급속도로 번져나간 일이 있다. 동영상 전문 커뮤니티 <유튜브>에서 발견된 문제의 동영상은 '좌파/우파'라는 제목으로 프랑스의 대표적 참여 지식인이며 대안세계주의자인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1930~2002)의 생전 모습을 담고있다. 파리의 한 카페에서 부르디외는 시큰둥하게 말했던 것이다.

▲ '유튜브'에서 발견된 한 동영상에서 "세골렌은 좌파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부르디외.
"세골렌 루아얄은 좌파가 아니다. 루아얄이 좌파를 선택한 이유는 당시 우파에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루아얄이 우파였다면 장관까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좌/우파의 경계가 공식적으로 불분명하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언행을 보면 그녀는 우파다."
칼리파가 물은 이유다.
"세골렌, 사회주의자들은 어디 있니?"

마지막으로 노래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노래가 말하지 않는 것. 사르코지와 루아얄을 비롯해 시라크, 조스팽 등 집권당과 사회당 인사를 제외한 타 후보의 부재. 언론과 여론의 관심이 사르코지와 루아얄에만 집중돼 다른 후보들은 일제히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 프랑스 대선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프랑스판 낙선운동? "투표는 화염병보다 강하다!"

2002 대선의 '정치 대지진'이 28.4%라는 높은 기권율에 기인했다는데 이견은 없을 것이다. 프랑스 대선 역사상 최고 기록이었다. 올해는 다르다. 대선 날짜를 손 꼽아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 지난 한 해를 '세고 열풍'으로 달군 루아얄 현상이라고? 천만에. 사르코지 때문이다. 사르코지 '당선'이 아닌 '낙선'을 위해.

'허접쓰레기'라는 단어를 여전히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바로 방리유(파리를 비롯한 대도시 외곽지역) 젊은이들. 지난 2005년 말 발생한 방리유 소요에서 사르코지는 이 지역 젊은이들을 '허접쓰레기' 혹은 '카처(고압세척기)'로 청소해야할 '오물'로 취급했던 것이다. '허접쓰레기'와 '카처'는 방리유 소요 1주년을 넘긴 지금까지도 이 지역 젊은이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돼 사르코지 낙선운동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허접쓰레기들은 우리가 청소하지요"
2005 방리유 소요와 사르코지

▲ 재작년 방리유 소요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군중들. 왼쪽은 '프랑스는 모든 인종을 사랑한다', 오른쪽은 '사탄 사르코지, 우리들을 프랑스에 살게 내버려둬!'
ⓒ 조영표
지난 2005년 10월 27일 저녁, 파리 방리유 중 하나인 클리시-수-부아에서 송전소 변압기에 감전돼 지에드(17)와 부나(15) 두 소년이 사망했다. 경찰의 불심검문을 피하려다 사고를 당한 것이다.

두 소년의 죽음은 프랑스를 화염 속에 몰아넣은 방리유 소요로 번졌다. 차별에 신물이 난 방리유 젊은이들이 화염병을 드는 동안 부상자 수와 방화된 차량 수가 매일 저녁뉴스를 장식하던 그때, 언론과 여론의 집단포화는 내무장관 사르코지에 집중됐다.

두 소년이 감전사하기 이틀 전인 25일 파리의 또 다른 방리유인 아르장퇴유를 방문한 사르코지가 26일부터 일제히 전파를 탔기때문이다. 건물 윗쪽을 올려다보며 사르코지는 말했다.
"뭐라고요, 마담이 허접쓰레기들이 지겹다고요? 우리가 청소하지요."

순식간에 허접쓰레기로 전락한 방리유 젊은이들이 분노한 것은 당연한 일. 소요는 더욱 과격해졌으나 사르코지는 소요 현장을 카처로 청소할 것을 주문하기까지 했다. 쉽게 지워지지 않는 오물을 제거할 때 쓰는 청소차를 말하는 카처 발언은 방리유 젊은이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사르코지에게 방리유는 허접쓰레기와 오물의 집합소?

방리유 소요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던 그해 11월 6일 프랑스의 공영 TV 채널 <프랑스 5 텔레비전>은 '영상에 정지'라는 제목의 미디어비평 프로그램을 통해 '그날'의 아르장퇴유로 돌아갔다. 사르코지의 아르장퇴유 방문은 예상 외로 평화로웠다.

그러다 한 주민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허접쓰레기들을 언제 청소할 겁니까?"

앞서 언급한 사르코지의 대답은 주민의 질문에 따른 즉흥적 반응이었던 것이다. 당시 패널로 참가한 언론인들은 이것이 언론의 선정성인 동시에 사르코지의 반대 편에 선 기자들의 악의적 편집이라 진단했다.


방리유 젊은이들이 중심이 된 사르코지 낙선운동은 행동으로 나타났다. 선거인 명부 등록이 마감되기 사흘 전인 지난해 12월 27일 프랑스의 뉴스통신사 <아에프페> (AFP)의 요청에 따라 각 시청이 공개한 통계에 따르면 선거인 명부 신규등록자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2002 대선 직전인 2001년 12월과 비교해 마르세유에서 12%, 낭시 60%, 아미앵 76%, 트라프 90%씩 신규등록자가 늘었다. 2005년 방리유 소요의 근원지인 클리시-수-부아에서는 소요 발생 직후 신규등록자만 1000명으로 집계되기도 했다. 정확한 수치는 오는 28일이 돼야 알 수 있으나 이것은 분명 전례없는 현상이다.

지난해 최초고용계약법(CPE)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신분증과 투표용지를 흔들며 거리를 행진한 일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다.
"대선이 머지 않았다. 심판은 유권자가 한다."
방리유 소요, 반 CPE 시위, 2002 대선 2차전에 올랐던 르펜의 추억 들은 프랑스인 중에도 방리유의 프랑스인들을 투표소로 이끄는 요인이다. '운동'이 있었다. 사르코지 낙선 운동. 선거법에 위배되지 않는 낙선 운동, 바로 투표. 사르코지를 '위해'가 아니라 사르코지에 '반대해' 투표할 것.

인종차별주의 타파를 위해 싸우는 시민단체 'SOS인종차별주의' 등 수많은 청년 단체들은 가가호호 가정을 방문했고 전국일주를 펼치기도 했다.

"투표는 화염병보다 강하다!"
이들 단체가 나눠주는 티셔츠에는 이런 글귀와 함께 투표용지가 그려져 있었다.

절반의 공포와 절반의 열광, 사르코지 스타일

▲ 지난달 14일 프랑스 여당인 대중운동연합(UMP)의 대통령 후보에 선출된 사르코지.
ⓒ AP=연합뉴스
도대체 누굴까. 평소 정치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방리유의 젊은이들을 투표소로 불러모으고 있는 인물, 사르코지는.
"사르코지에 찬성하십니까 혹은 반대하십니까 ?"
오늘날 프랑스에서 상대의 정치 성향을 가늠하는 가장 효과적인 질문이다. 사르코지는 대선은 물론이요 시시각각 불거지는 각종 사안을 보는 기준이 됐다.
"사르코지는 어떻게 반응했니?"

사르코지를 찬양하거나 혐오하거나. 프랑스는 사르코지를 기준으로 나뉜 것이다. 지난 1일 대선 출마를 선언한 농민운동가 조제 보베를 비롯해 좌 혹은 극좌 계열 후보들은 '사르코지 저지 전선'에서 만나고 있다. 같은 집권당 내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를 아우르는 시라크파들에게도 사르코지는 두려운 인물이다. '2005년 방리유'를 살았던 젊은이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사르코지를 지지한다는 말은 종종 '파시스트'와 동의어라는 오해를 낳기도 했다. 절반의 프랑스다. 나머지 절반은? 환호한다. 사르코지에 열광한다. 사르코지만이 희망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사르코지를 집권당 대중운동연합의 공식 대선 후보로 지명한 지난 당대회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지난달 14일 경선에 단독 출마한 사르코지는 33만여 등록 당원의 69.06%가 참가한 가운데 98.1% 지지라는 압도적인 득표로 대선 후보에 선출됐다. 말 그대로 '엄청난' 수치다. 몇몇 독재 국가를 제외하면 전세계를 통틀어 찾아보기 힘든 사건이 2007년 프랑스에서 벌어진 것이다.

당내 반 사르코지파인 빌팽 총리와 장-루이 드브레 의원은 당대회 직전 사르코지에 표를 던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가 즉시 '얼간이', '배신자'로 매도됐다. 사르코지를 지지하지 않는 것은 곧 '범죄'였던 것. 이날 당대회를 채운 당원들은 스타에 환호하는 팬이요 당대회는 팬클럽이었다. 당대회가 절대군주 나폴레옹의 대관식에 비유된 까닭이기도 하다.

나폴레옹? 기실 사르코지는 나폴레옹에 비견된 바 있다. 1m65cm의 '작은 키'때문에. 168cm였던 나폴레옹 보다 작은 키.
"이런 난쟁이가 대통령이 된 예는 일찍이 프랑스 역사에 없었다."
사르코지가 공공연히 대선의 꿈을 드러냈을 때 다수의 프랑스인은 이렇게 코웃음을 쳤던 것이다.

'이런 난쟁이'가 절반의 프랑스 앞에 '운명의 남자'로 우뚝 서있다. 분출하는 에너지와 정복욕으로 똘똘 뭉친 '정치 동물' 혹은 '정치 기계'. 사르코지는 프랑스 정치인의 필수 코스라할만한 국립행정학교(ENA) 출신이 아니다. 파리 10대학 법대 출신이다. 그리고 헝가리 이민 2세다. 비주류다.

사르코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BRI@1980년 당시 대선 후보 시라크 '청년지지위원회'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1983년 인구 5만의 작은 도시 뇌유-쉬르-센의 시장에 당선돼 최연소 시장의 기록을 세운 열혈 청년 사르코지. 이때 나이 고작 28세였다. 1989년 하원의원 당선, 1993년 에두아르 발라뒤르 총리 내각에서 예산장관 역임 등 젊은 나이에 승승장구하던 사르코지가 추락하는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1995년 대선이다. 시라크가 아닌 발라뒤르 후보를 지지한 것. 시라크의 당선으로 대선이 끝나면서 사르코지는 당내 세력을 잃고 시라크와 등 지게 된다.

2002년 대선에서 사르코지는 다시 시라크 후보 편에 섰으나 장-피에르 라파랭 총리에 밀려 내무장관에 머물러야 했다. 대선 기간 동안 부각된 치안 문제를 정책 1순위에 올려 강력한 치안정책을 펼친 '시라크의 미운 털' 사르코지는 그러나 2004년 경제장관에 '좌천'됐다.

그리고 같은 해 집권 대중운동연합 총재 선거를 4개월 여 앞둔 7월 14일 텔레비전 인터뷰에 나선 시라크는 사르코지에게 장관이나 총재 둘 중 하나만 선택할 것을 주문한다.
"나는 결정하고 그는 실행한다."
시라크파와 사르코지파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이때까지도 당내 수뇌부들의 암호는 '사르코지만 빼고 모두'였다.

와신상담, 11월 28~29일 85.1%의 득표로 총재에 당선된 사르코지는 이때부터 대권 욕망을 공공연히 밝혀 시라크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파랭 총리의 사퇴를 불러온 2005년 5월 29일 유럽헌법 국민투표 부결로 열성 시라크파인 빌팽이 총리 자리에 오르자 사르코지는 내무장관에 복귀한다. 당시 여론은 '사르코지 총리'가 우세했다.

사르코지가 대선 출마를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은 지난해 11월 29일로 최근의 일이다. 그러나 누가 몰랐단 말인가. 사르코지의 대권 욕망을. 내무장관으로서 사르코지의 행보는 끊임없는 대선 전초전이었던 것을. 그리고 '독선적'이라할만한 사르코지의 이민정책과 치안정책은 어쩌면 극우당 유권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르코지는 선언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을 이미 손아귀에 넣었다."
'그들'이 극우당 유권자라는 것은 두 말 하면 잔소리다.

그리고 지난해 11월 대선 출마 선언을 통해 루아얄의 '참여 민주주의'에 '조용한 단절'로 맞선 사르코지의 과녁은 사회당 유권자로 옮겨온 듯 하다. '조용한 단절'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의 슬로건 '조용한 힘'과 닮아있다. 사회주의자 규합 작전이라 할까.

지난 달 25일 대선 후보 공식 지명 후 파리 북부 피카르디에서 첫 대중과의 만남을 가진 사르코지는 현장 노동자들을 상대로 이렇게 연설했다.

"나는 조레스와 블륌의 프랑스를 사랑한다. 조레스와 블륌의 프랑스는 노동자들의 프랑스였다. 사회당이 오래 전에 잊어버린 바로 그 노동자의 프랑스!"

장 조레스(1859~1914)와 레옹 블륌(1872~1950)은 프랑스를 너머 전세계 역사에 이름을 새긴 대표적 사회주의자다.

태그:#사르코지, #UMP, #대선, #루아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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