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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두서 고택안채. ㄷ자형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 정윤섭
'자화상'이라는 불멸의 작품을 남긴 공재 윤두서는 어떤 인간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을까? 자화상을 통해 우리는 그에 대한 무한한 상상력을 펼쳐볼 수 있다.

해남윤씨가의 족보를 보면 공재는 10형제의 자식을 둔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녹우당 해남윤씨 종손 중에 아마 가장 많은 자식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어 그의 짧은 생애에 비해 정렬적이고도 정력적인 삶을 살다간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공재의 아들 중 장남인 덕희(德熙)또한 그림을 그렸던 예술가 기질을 이어받은 화가이기도 하여 가풍을 느끼게 한다.

백포에 자리 잡은 공재의 전택

▲ 안채 옆면과 사당 전경
ⓒ 정윤섭
공재 윤두서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것 중 '공재공 행장'을 보면 그가 별업으로 삼고 살았다는 해남 백포마을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백연동과 백포 두군데에 장(庄)이 있었다. 모두 전택(田宅)과 장호(庄戶)가 있었다. 백포는 큰 바다에 닿아 있어 풍기(風氣)가 매우 좋지 않았으므로, 두곳의 장을 왕래하기는 했으나 거의 백연동에서 지내셨다.

이를 통해 공재 윤두서가 현산면 백포에 집을 두고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백포마을은 공재 윤두서의 후손들이 자자 일촌을 이루고 살아온 마을이다. 이 마을은 해남윤씨 집안의 영화를 보여주듯 수백년 된 고가들이 즐비하게 남아 있어 옛 전통 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백포마을은 현재 50여호의 가구에 해남윤씨와 밀양박씨, 김해김씨가 비슷하게 살고 있지만 해방되던 무렵까지만 해도 대부분 해남윤씨들이 살았다고 한다. 백포 마을의 들머리에 서면 이들 고택들로 인해 양반촌이 세거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공재 윤두서는 이곳 백포에 별업을 두었지만 기후와 풍기가 맞지 않아 백포 마을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공재의 넷째 아들인 윤덕훈(尹德熏 1694~1757)이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그 후손들이 퍼져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백포 마을의 터를 제일 먼저 본 것은 고산 윤선도라고 한다. 이 마을의 윤영유(79)씨에 따르면 고산이 보길도에서 이곳 백포 포구를 통해 해남으로 들어올 때 백포마을의 지형을 보고 이곳은 내가 살 곳은 못되지만 뒤에 후손들이 살기에는 괜챦은 곳으로 보아두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곳 백포는 종가인 녹우당과 여러 면에서 비슷한 지형적 특색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마을 뒤의 주산인 망부산을 뒤로 서향을 하고 있는 것과 현재는 'ㄷ'자형을 하고 있지만 본래 'ㅁ'자형을 하고 있었다는 집의 전체적인 모습도 그렇다.

이 집의 안채 상량도리 밑 장여에 중수 상량문이 있는데 이 상량문에 의하면 경술년(1670년)에 처음 지어졌고, 142년 후인 신미년(1811) 8월에 크게 고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안채의 내림새 기와에 '同治十年辛未九月重修'라는 명문이 있어 집을 고친지 60년 후인 신미년(1871년) 9월에 지붕을 다시 고친 것을 알 수 있다. 상량문에 기술된 1670년은 고산이 죽기 1년 전으로 고산이 말년에 이 집을 지었다는 후손들의 증언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현산면 백포는 공재 삶의 한 부분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공재공 행장의 기록을 살펴보면 어느 해 심한 가뭄으로 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게 되었는데 이때 공재는 종가 소유의 백포 뒷산(망부산)에 있는 나무를 베어 소금을 구워 생계를 유지하도록 배려했다는 것이다.

▲ 고택 내림기와의 명문
ⓒ 정윤섭
그해 해일(海溢)이 일어 바닷가 각 고을은 모두 곡식이 떠내려가고 텅 빈 들판은 황토물로 물들었다. 백포는 바다에 닿아 있었기 때문에 재해(災害)가 특히 심하였다. 인심이 흉흉하게 되어 조석 간에 어떻게 될지 불안한 지경이었다. 관청에서 구제책을 쓰기는 하였으나 실제로는 별다른 혜택이 없었다. 백포의 장에 이르는 사방산은 사람들의 출입이 없고 나무를 기른 지 오래되어 나무가 무성했다. 공재는 마을 사람들을 시켜 합동으로 나무를 벌채하고 소금을 구워 살길을 열어 주었다.

공재의 인간적인 면모는 다른 일화에서도 느낄 수 있다. 공재는 고산이 서울에서 출생하여 자란 것처럼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서울내기라고 할 수 있다. 공재가 고향인 녹우당에 내려가 살게 된 것은 한참 성장한 후임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대부분의 황금기를 서울에서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공재는 서울에 있다가 1697년(공재 30세) 아버지 윤이석(尹爾錫)을 보러 고향으로 내려간다. 이때 어머니 숙인(淑人) 심(沈)씨가 향장(鄕庄)의 묵은 빚을 받아오라 했다. 공재가 채권(債券)에 수록된 것을 보니 그 액수가 수천냥이 되었다. 그런데 빚을 진 사람들이 모두 가난하여 갚을 수 없자 공재는 채권문서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는 것이다. 공재는 주민들의 구휼에도 관심을 가졌던 인정 있는 인물이었음을 알게 하는 부분이다.

공재의 후손들

▲ 백포마을 전경
ⓒ 정윤섭
IMG5@@백포마을의 공재 윤두서 고택은 현재 윤영유(79)씨가 윤두서 고택 바로 옆에서 관리하며 살고 있다. 윤영유씨는 공재의 4째 아들인 윤덕훈의 9대손이다. 윤영유씨의 집은 공재의 고택에 비견할 바는 못 되지만 옛 고택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다. 윤영유씨는 해방후 서울, 부산 등지에서 오랫동안 객지생활을 하다가 지난 87년경에 돌아와 현재까지 살고 있다.

현재 백포마을에 살고 있는 공재의 후손들은 한때 부를 이루며 명성을 떨치면서 튼튼한 재력으로 살았던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윤영유씨의 증조할아버지인 윤돈하(尹敦夏,1863~?)때에는 증조할아버지가 관직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큰 재력으로 집안이 가장 흥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증조부와 조부인 윤재익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돌아가시자 어린 나이에 윤광현(윤영유의 부친)이 1만석이 넘는 재산과 함께 종손 집안을 이어가게 되었다. 이때 윤광현은 일제하에서 많은 재산을 투자해 선박회사를 차려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하고 말았다.

또한 풍류객이어서 유흥생활을 즐기는 바람에 그 많은 재산을 탕진하게 되어 몰락하게 되었다 한다. 윤영유(윤광현의 3째아들)씨는 이 때문에 초등학교 다닐때 월사금을 내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고택은 백범 김구와도 인연이 있는 곳이다. '백범일지'를 보면 김구는 삼남을 떠돌며 유랑하다 이곳 백포 고가의 사랑채에서 머물게 되는데, 이때 이 집안의 종이 주인으로부터 다른 집에서 더 많은 품삯을 받는 것 때문에 매질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덕을 베풀지 못하는 주인을 나무라며 그 부가 결코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말하는데 아무튼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집안은 이후 가세가 기울어 가게 됨을 알 수 있다. 그 덕(베품)이라는 명제를 항상 되풀이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공재는 30여세부터 머리에 백발이 나타났다고 하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신 상중과 갑자기 형마져 잃어 슬픔을 겪었으며, 또한 수질과 풍토가 몸에 맞지 않아 수년 동안 편안 날이 없었고 마음의 생기(生氣)가 손상됨이 많았다.

공재는 1715년 겨울에 우연히 감기를 앓다가 그해 11월 26일 백연동에서 죽었는데 48세였다. 비교적 짧은 일생의 마감이었다. 그의 무덤이 자신이 한때 살았던 백포 고택 뒤에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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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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