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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가 돌아왔다. 4세기를 거슬러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 앙상한 말 로시난테에서 스쿠터로 갈아탄 파리의 돈키호테는 갑옷을 벗고 휴대폰을 들었다. 그러나 '세상의 부정과 비리를 도려내고 학대받는 사람들을 돕겠다'는 야심만은 여전했다. 그리고 승리했다.

자선이 아니다, 이제는 투쟁이다!

▲ '돈키호테의 아이들'의 대변인 오귀스탱 르그랑. 지난 1954년 아베 피에르가 극빈자 구호를 위해 '선의의 반란'을 벌일 당시의 모습과 외모가 흡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Dragan Lekic
파리의 돈키호테를 만났다. 영화 <아멜리에>(2001, 장-피에르 주네)에서 아멜리에가 물수제비를 뜨던 장면으로 유명한 파리의 관광지 생 마르탱 운하가 배경이었다. 유람선이 한가로이 떠다니던 평소 생 마르탱 운하의 풍경은 오간 데 없었다. 빨간색의 '수상한' 텐트 250여 개만 운하를 따라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을 뿐.

키가 훤칠한 파리의 돈키호테를 사람들은 오귀스탱이라 불렀다. 오귀스탱 르그랑. 영화배우다. 아니 공연예술 비정규직 노동자라 말하는 쪽이 가깝겠다. 지난 6일 새로운 영화 촬영을 위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다녀왔다는 오귀스탱은 그러나 여전히 카메라 앞에 서있었다. 이번에는 연기가 아니었다.

라디오, 텔레비전의 마이크와 카메라가 차례로 지나가고 내 차례가 됐다. 피곤한 표정이 역력한 오귀스탱이 내 등을 떠밀며 말한다. "커피나 한 잔 하러 가자!"

오귀스탱은 현재 '노숙자'다. 지난해 10월부터 노숙자로 살고있다. 노숙자가 내게 커피를 사겠단다. '불합리한' 상황이다.

"오귀스탱, 오귀스탱!"

빨간 텐트를 따라 카페로 가는 길목 여기저기서 오귀스탱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빨간 텐트 주민들이다.

"어제 싸움이 벌어졌는데 한 놈이 술을 먹고 난동을 부렸어."
"뉴스 들었어? 빌팽 총리가 말야…."

빨간 텐트의 주민들은 사소한 이야기 하나하나를 들려주며 오귀스탱의 반응을 살핀다. 그러면 오귀스탱은 그들의 머리를 끌어안고 주먹을 들어보인다. 카페에 도착하는데 30분 이상은 걸린 것 같다.

@BRI@이제는 오귀스탱과 머리를 맞대고 '대화'할 수 있으려나 싶었으나 오산이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좀전의 풍경은 똑 같이 재연됐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이들 또한 빨간 텐트의 주민들이었던 것이다.

"이 카페가 사령부야."

내 뒤를 따라 들어온 '시파 프레스'의 사진기자 드라간 르킥의 설명이다. 아지트였던 것이다. 빨간 텐트의 주민들이 모이는. 드라간은 파리에 빨간 텐트가 등장한 때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다.

역사. 빨간 텐트의 주민들은 소풍을 나온 것이 아니라 투쟁하고 있었다. 이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도 파리의 거리에서 새우잠을 자던 노숙자들이다. 침낭이나 옷가지를 덮고 혹한 속에 잠을 청하던 부랑자들이다. 그러나 거리에서 잠을 자기 전까지는 결혼을 했었고 아이도 있었고 열쇠로 문을 잠글 수 있는 아파트도 가졌던 시민들이다.

"한쪽에선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 노란 지붕의 카페가 '돈키호테의 아이들'이 모이는 아지트. 여기서 오귀스탱과 인터뷰를 했는데 돈이 있으면 계산을 하고 없으면 안 내도 되는 '요상한' 곳이다.
ⓒ Dragan Lekic
이혼이나 불의의 사고 혹은 갑작스런 해고로 이들은 거리를 떠돌게 됐다. '어느날 갑자기' 거리로 나앉은 이들은 되는대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거리'에는 문을 잠글 열쇠가 없었다. 범죄와 마약,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거리에 제각각 흩어져 잠을 청하던 이들이 모여 텐트촌을 이룬 곳이 생 마르탱 운하였다. 운하를 해방구로 이들은 싸우고 있었다. 주거권이라는, '인간의 기본 권리'를 위해.

그리고 한낱 노숙자였던 빨간 텐트의 주민들은 거리로 내몰린 이후 처음으로 '평등'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깃발을 든 것은 파리의 돈키호테 오귀스탱 르그랑이었다. 아내와 함께 이제 두 살 반 된 딸아이를 키우는 오귀스탱은 궁금했던 것이다. '한 쪽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딸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영화 <매그놀리아>(1999, 폴 토마스 앤더슨)에서 창밖으로 쏟아지는 개구리비를 무심하게 바라보며 혼잣말을 뇌까리던 천재소년 스탠리처럼 '살다보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해줘야 할까.

친구 둘과 오귀스탱은 자발적 노숙을 결심한다. 지난해 10월 23일의 일이다. 호주머니에는 달랑 20유로가 들어있었다. 거리에서 만나는 노숙자들과 밥을 먹고 잠을 잤다. 이것은 6주 동안 계속됐다. 노숙자들을 만나고 대화를 할수록 분노가 치밀었다.

"거리에서 살긴 했으나 6주간의 노숙이 끝나면 돌아갈 집이 내게는 있었다. 돌아갈 집이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는 하늘과 땅의 차이다. 하룻저녁을 파리의 13구, 20구 혹은 방리유(파리를 비롯한 대도시 외곽)에서 보내고 나면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다. 집이 없는데 누가 일자리를 주나. 우리와 똑 같은 사람들인데… 이들을 거리에 방치하는 정부는 얼마나 비열한가. 인간 이하의 조건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은 이들의 잘못이 아니라 거리의 잘못이다. 그리고 정부는 이들이 '하룻밤을 지낼 수 있는 거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그 의무를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정부는 '시민'을 방치함으로써 명백한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고 오귀스탱은 말했다. 매년 겨울이 찾아오면 극빈자들을 위해 먹을 것을 준비하고 기금을 모으는 시민단체들에게 '그만'이라고 소리지르고 싶었다. 극빈자들이 겨울에만 굶어죽나? 정치 책임자들에게 책임을 지우자고도 말하고 싶었다. 방법은? 혁명!

노숙자들의 집은 거리다. 조직되지 않고 흩어져있는 노숙자들이 한 곳에 모여 집단행동을 하자. 그러나 '선량한' 시민들을 '방해' 하는 건 아닐까?

"방해가 되면 차라리 다행이다. 방해해야 한다. 방해를 받으면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저들이 왜 우리를 방해할까 하고."

거리에 널린 '가난' 앞에서 애써 자신의 눈을 가리던 사람들을 붙들고 눈가리개를 벗으라고, 그리고 보고싶지 않은 것들을 똑바로 보라고 오귀스탱은 말하고 싶었다.

▲ '돈키호테의 아이들'이 지난해 12월 2일 콩코드 광장에 처음 등장해 경찰에 쫓겨나고 있다.
ⓒ Dragan Lekic
부자의 거리에 펼쳐보여준 '가난'

지난해 12월 2일, 돈키호테는 '돈키호테들'이 됐다. 오귀스탱을 중심으로 모인 노숙자들이 파리의 중심 콩코드 광장에 텐트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가난을 더 잘 보여주기 위해. '돈키호테의 아이들'이라는 단체도 이때 태어났다.

그러나 콩코드가 어떤 곳인가. 세계적 관광지 파리의 필수관광코스다. 미국 대사관을 비롯해 수많은 외국 공관들이 밀집된 곳이다. 전세계에서 가장 땅 값이 비싸다는 방돔 광장과 지척이다. 부자들의 거리에 '가난'을 펼쳐 보인 것이다. 20여 대의 경찰차가 달려온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돈키호테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콩코드가 안 되면 바스티유로 가자. 그러나 바스티유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곤봉을 든 경찰이 몰려들었고 돈키호테들은 쫓겨났다.

이날 오귀스탱은 돈키호테들에게 약속한다. 보름 후에 다시 시작하자고. 파리 경찰국장에게 전화를 건 오귀스탱은 '우리가 캠핑을 할만한 장소를 물색해달라'고 말했다. 단 하루동안 200개의 텐트로 시위할 장소가 필요하다며. 거리에 텐트를 설치하는 것은 금지돼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귀스탱은 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텐트를 머리에 이고 있겠다."

안 된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두고봅시다. 경찰국장님. 우리는 어딘가에 텐트를 칠 것이고 당신은 우리를 결코 막을 수 없을 겁니다."

경찰국장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돈키호테의 아이들'은 100여 개의 빨간 텐트를 들고 생 마르탱 운하에 집결했다. 20여 대의 경찰 차량이 도착했고 경비정까지 들이닥쳤으나 이번에는 경찰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겨울 운하를 흐르는 물은 얼음처럼 차갑다. 경찰과 대치하다 보면 누군가 하나는 물에 빠진다.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건' 투쟁이었다. 이들에게 죽음은 가난보다 덜 두려웠다.

"우리를 환대하는 경찰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살 것입니다. 경찰 여러분, 공격하려면 하십시오. 해봐야 노숙자 열 명 정도 죽겠지요. 어차피 사람 취급 못 받는 노숙자 기껏 열 명!"

메가폰을 든 오귀스탱은 경찰을 향한 야유로 텐트촌 입성을 선언했다. 12월 16일 밤 11시경 텐트 100여개는 가지런히 설치됐다.

2배로 불어난 '돈키호테'들

▲ 왼쪽은 생 마르탱 운하 옆에 펼쳐진 빨간 텐트 행렬. 오른쪽 사진의 백발 노인은 영화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으로 알려진 프랑스의 배우 장 로슈포르이며, 그는 생 마르탱 운하의 노숙자들과 함께 투쟁했다.
ⓒ Dragan Lekic
평화가 찾아왔을까. 돈키호테들이 바란 것은 그러나 평화가 아니었다. 돈키호테들의 '사건'을 알리는 소식들이 블로그를 통해 인터넷상에 번져나갔다. 인터넷이 들썩이자 언론도 가세했다. 돈키호테의 투쟁에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불꽃에 부을 기름은 엉뚱한 곳에서 쏟아졌다.

"고결해 보이는 이들의 행동은 문제를 해결하는 척 위장한 술책이요 눈속임에 불과하다."

'캠핑'이 시작되고 사흘 후인 12월 19일 카트린 보트랭 사회통합부 담당관의 이같은 발언은 돈키호테들이 단식투쟁에 돌입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돈키호테들에게는 차라리 구세주와도 같은 사건이었다. 보트랭의 발언이 TV를 통해 연이어 방송되자 여론이 들끓기 시작한 것이다.

시민들은 아파트 문을 열고 생 마르탱 운하로 모였고 노숙자들 옆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처음 100여개의 텐트는 250여개로 불어났다.

오귀스탱에게 묻는다. 승리할 거라 생각하나? 주저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긴다. 오늘 우리의 투쟁이 실패한다해도 다시 시작할 것이다. 이길 때까지 계속할 것이다. 사람들이 더 죽고 결국 인권이 존중될 때까지.

프랑스의 수치라고...! 한국은?

▲ 생마르탱 운하에 자리잡은 노숙자들이 지난 연말 송년 파티를 벌이고 있다.
ⓒ Dragan Lekic
시민들은 먹을 것을 들고 운하를 찾았으며 오는 4월 대선을 노리는 정치인들의 발걸음도 분주해졌다. 동시에 오귀스탱은 다른 구호단체들과 연대해 현실적이고 즉각적인 주거 대책을 촉구하는 '생마르탱 운하 헌장'을 만들어 각 정당 대표들을 만났다.

극좌 정당 혁명공산주의자동맹(LCR)의 올리비에 브장스노, 프랑스공산당(PCF) 당수 마리-조르주 뷔페로부터 사회당(PC) 제1서기 프랑수아 올랑드와 사회당 대선 후보 세골렌 루아얄을 거쳐 중도 정당인 프랑스민주동맹(UDF) 총재 프랑수아 바이루 심지어 집권 대중운동연합(UMP) 내 강경파 니콜라 사르코지 내무장관까지 일제히 생마르탱 헌장에 서명하는 쾌거를 올린다.

대선을 코앞에 두고 좌·우파를 아우르는 모든 정당이 헌장에 서명한 것은 그러나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극우당 국민전선(FN)의 장-마리 르펜만은 서명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다. 르펜의 국민전선은 민주주의 정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귀스탱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는 사이 생마르탱 운하의 투쟁은 보르도, 리옹, 마르세이유 등 프랑스의 대도시 전역으로 전염되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31일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마침내 주거권을 법으로 보장하는 내용의 법률을 제정할 것을 선언했다. 대통령의 선언은 지난 3일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의 입을 통해 재차 확인됐으며 이것은 다음 달 22일 의회를 통과할 전망이다.

장-루이 보를루 사회통합 장관이 지금까지 유명무실했던 주거 대책에 '근본적인' 계획 수정을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린 것은 지난 8일이었다. 마감뉴스에서는 생마르탱 운하의 돈키호테들이 텐트를 걷고있는 모습이 오랫동안 보여졌다. 결국 이긴 것이다. 오귀스탱이 말한 '혁명'은 승리한 것이다.

지난 1954년 노숙자를 비롯한 극빈자들이 비위생적이고 취약한 주거환경에서 생활하는 것을 목격한 프랑스인의 우상 아베 피에르(피에르 신부)가 이에 저항해 '선의의 반란'을 일으킨 지 반세기가 흐른 뒤의 일이다. 아베 피에르는 쉬지 않고 '반란'을 주창해왔으나 그의 외침은 종종 무관심의 벽에서 되돌아왔다. 아베 피에르의 노쇠함에 수혈할 젊은 피는 결국 돈키호테의 객기에서 나온 것일까.

오귀스탱을 만난 날, 먹을 것을 들고 돈키호테들을 찾아온 50대의 한 여인은 내게 말했다.

"이건 프랑스의 수치야. 부끄러운 곳을 긁어 전세계에 알려야 해!"

왜였을까.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프랑스의 수치'라는 말을 들은, 몇 초가 채 지나지 않았을 짧은 시간 동안 '수치'라는 단어가 몇차례 머릿속을 울렸다. 서울역의 한 풍경이 오버랩됐던 까닭이다.

태그:#노숙자, #파리, #생마르탱, #돈키호테의 아이들, #콩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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