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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기자들이 지난 5일 파업에 들어갔다. 지난해 7월 금창태 사장은 삼성그룹 관련 기사를 삭제하고, 이에 항의하는 이윤삼 <시사저널> 편집국장의 사표를 수리했고, 그 뒤 6개월 동안 사측과 기자들은 공방을 벌여왔다. 최근에는 기자들이 배제된 채 만들어진 '짝퉁' <시사저널>이 만들어지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시사저널 사태에 대한 각계 인사들의 릴레이 기고를 싣는다. 이 글을 쓴 최내현씨는 <딴지일보> 전 편집장이며, <드라마틱>의 발행인이다. <편집자주>
▲ '삼성기사 삭제 파문' 이후 회사측 주도로 만들어진 <시사저널> 899호(2007.1.16일자)가 9일 오전 서울 중구 충정로 시사저널 편집국에 놓여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시사저널>. 참으로 밋밋하기 그지없는 제호가 아닐 수 없다. 마치 신문 제호가 '각계 뉴스'인 것과 비슷하다. '<시사저널>은 시사를 다루는 잡지인가보다'라고만 보고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마 제호 탓이 컸을 것이다.

그러던 나는 언젠가 '독립언론'이라는 이 잡지의 마케팅 키워드에 이끌려 <시사저널>을 사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 정도 잡지라면 정기구독을 해 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해서 자발적으로 정기구독을 신청하고 매주 꼬박꼬박 챙겨보게 되었다. 말하자면 <시사저널>의 애독자 중 한 사람이 된 것이다.

<시사저널> 정기구독자가 수만명에 이른다니, 나는 그 가운데 한 명일 뿐이다. <시사저널>에서 일해본 적도, 이해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울분이나 비분강개에 찰 필요 없이, 이번 899호 '짝퉁 시사저널'에 대한 소감을 써 볼까 한다.

<독립신문>에 나왔던 패러디가 여기 왜 있지?

@BRI@ 짝퉁 시사저널이 나온다는 소식은, <시사저널> 사태 이후 독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시사모(<시사저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사이트에서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 동안 마음에 안 들었던 기자들을 배제하고, 정말 경영진이 하고 싶던 대로 원없이 해 보는 잡지가 나온다는 말이었다. 이번 짝퉁호에 대한 궁금증이 상당했다.

잡지가 도착했다. 이번엔 어쩐 일인지 평소보다 빠른 화요일에 배달되었다. 늘 그렇듯 주욱 넘겨 보았다.

표지엔 "2012년 '부활' 노리는 노무현의 속셈"이라는 글자가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다. 속셈? 상당히 강렬한 제목 선택이다. 목차 페이지에는 "노무현의 노림수"라고 적혀 있는데, 모르긴 하지만 최종 편집과정에서 한 단계 센 말로 바꾸지 않았을까 싶다.

연재 코너인 '인터넷 속으로'에는 '이민영-이찬 진실공방'이 흥미 위주로 자세히 다루어지고 있다. 기사에 가정 폭력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다. '경제 왜냐면' 면의 제목은 ''동상이몽' 정부 여당이 아파트 값 어찌 잡으랴'이다. 아파트값 결코 안 잡힐 듯한 기분이 든다. '요즘 세상'을 보니 군 복무 단축으로 세상이 혼란스러워하고 국민들은 믿지도 않는다고 한다. 복무기간 단축은 해서는 안 될 듯 하다.

그러고 보니 기자들과 제작진의 이름이 담긴 판권 페이지가 없다. 대체 누가 만든 책인지 정체불명이다.

이어서 이 책의 압권인 '노무현, '2012년 혁명'을 꿈꾼다'는 커버스토리가 등장한다. '칼같이 편 갈라 불같이 싸운다'는 박스 기사 제목도 선정적이다.

그리고 책을 몇장 더 넘겨보다가 필자는 눈을 의심할 뻔했다. 인터넷 <독립신문>에서 만들어서 사회적 물의를 빚었던, 노무현을 연쇄살인범으로 합성한 패러디 포스터, 노무현을 김정일에 빗대고 '강성대국' 깃발을 휘날리며 인민군 복장의 유시민 명계남 등이 총을 들고 뒤따르는 포스터가 실려 있다. 물론 기사와의 연관성은 거의 없다.

조금 더 넘겨보면 유근일 인터뷰가 실려 있다. 평생 언론계에 종사한 원로의 한 분이시니 새겨들을 말이 있을 것이다. "민주 정치는 교양과 예지에 의해 밑받침되는 것" "개혁이냐 보수냐, 좌나 우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품위냐 저질이냐'가 중요하다"고 나와 있다.

일리있는 말이다. 우리는 품위를 지켜야 한다. 그래서 유근일 선생의 그 말을 명심하면서, 품위있는 독자의 한 사람의 마음가짐으로 커버스토리를 잘 읽어보기 시작했다.

'품위가 남다른' 커버스토리

▲ 회사측 주도로 만들어진 <시사저널> 899호가 발행된 가운데 서울 중구 충정로 시사저널 편집국에서 기자들이 근무를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커버스토리는 잡지의 얼굴이다. 커버스토리만으로 잡지 판매의 성공 여부가 좌우되니 말이다. 선거 전날까지 노무현과 한 배를 타고 있었던 김행씨가 '써 갈긴(이라는 표현은 전혀 과하지 않다)' 커버스토리를 보자.

"사형수, 특히 교수형인 경우 시체 부검을 해 보면 사정의 흔적이 발견되는 예가 많다고 한다…노무현 대통령은 사망선고에 가까운 대접을 받고 있다. 지지율로 보면 '식물 대통령'이다…(그는) 동물적 감각으로…자신의 정치적 정자, 즉 노무현 세력과 철학을 남기고 싶은 것이다."

클린턴의 비행(?)으로 대통령의 지퍼 얘기가 오르내린 적은 있지만, 대통령의 정자까지 들먹인 것은 아마도 사상 초유의 일일 것이다.

게다가 무려 여덟 페이지에 걸쳐 혼자 쓴 커버스토리엔 팩트가 없다. 맥락을 무시한 채 말의 일부분만 따와도 침소봉대나 왜곡이니 반론이 나오는 마당에, 이 커버스토리 전체엔 아무 인용도 팩트도 없다.

'노 대통령 입장에서 보자면 이것은 이렇게 보일 것이고 저것은 저렇게 보일 터이니 결국 이러이러한 선택을 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라는 느낌과 직관으로 일관한다. 일일히 전부 인용할 수는 없고 일부만 보면 아래와 같다. 품위있는 독자로서는 차마 보기 민망한 장면이 많다.

"노 대통령 처지에서 보자면 2007년 대선은 '이길 수 없는 게임'이라는 전제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2007년 대선의 성격을 규정하자면 한마디로 '무능하고 부패한 좌파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증오와 퇴출 명령'이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물결치는 '신보수주의 또는 신자유주의'로의 적극적 합류다."

"(김근태 정동영 천정배 등도 여당 몰락의 공동책임자이므로) 이를 빤하게 꿰뚫어보고 있는 노 대통령으로서는 가관일 것이다…노 대통령 처지에서 보자면 "둘이 손잡는다고 신당이 되겠느냐?"는 비웃음을 낳고도 남는다."

"마음은 굴뚝같겠지만 현재의 민심으로 보자면 '코드 인물'을 내세울 경우 곧 '죽음'이다. 그래서 가장 탐나는 후보가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인 것이다…노는 이미 '작업'에 들어갔다."

"(노 대통령이) 보는 고건은 '보수 꼴통'이고 호남의 지역 정서에 수혜를 입은 톡혜자다."

"만약 한나라당으로 정권이 넘어간다면 2008년 4월, 차기 대통령 취임 두달 만에 총선을 치르게 된다. 보나마나 호남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현 여권의 완패가 예상된다. 그 때 탄생하는 야당은 호남당으로 전락할 것이다…그래서 그와 친노파는 죽어라 하고 당을 사수하려는 것이다."

"가만히 곱씹어 보면 그의 말마따나…북한은 동포이고 굶주린 채 고립되어 있으며 미국은 전세계를 무대로 날뛰는 존재이다…노대통령의 친북·반미 노선이 첨예화되고 이를 기준으로 유권자가 갈릴 경우 어느 쪽이 더 많을지는 두고볼 일이다."

기사 아닌 정치 격문... 노무현 이후로 이런 적은 처음

이것은 기사라기보다는 정치 격문에 가깝다. 물론 노 대통령의 리더십 방식이나 정치행위에 대한 비판이 많이 존재하고 나 또한 그다지 호의적으로는 보지 않는다. 언론의 문제 같은 것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지지율이 10%도 안 되는 수치는 괜히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커버스토리 내용 중에는 주장으로만 보자면 동의할 수 있는 부분도 꽤 있었다. 하지만 신문이나 잡지를 오래 보아온 독자의 입장에서 이 책이 읽을 만한 것인지 아닌지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이것은 노무현에 대한 경멸을 늘어놓은 넋두리에 가깝다.

'2007년 대선의 시대정신이 신자유주의로의 합류이고 좌파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증오와 퇴출 명령'이라면, 그래서 어차피 현 여권이 필패할 수 밖에 없는 구도라면, 이렇게까지 경멸을 표출하는 것은 정말 그야말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을 수 없는 감정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어법을 다른 사람에게 한 번 적용해 보면 알 수 있다. 한번 적용해보자.

"박근혜는 동정심 유발의 귀재이다. 별 정치의식 없는 유권자들에게 부드러운 얼굴로 다가간다. 전형적인 향수 자극 수법이다."

"빤하게 꿰뚫어보고 있는 박근혜 의원이 보기에 이명박 전 시장이 하는 행보는 가관일 것이다. '대운하 계획을 발표한다고 무슨 대통령이 되겠느냐?' 하는 비웃음을 낳고도 남는다. 이명박은 감이 아닌 것이다."

"박근혜가 보기에 손학규는 교수 출신의 '학삐리'에 불과하다."

"이 구도를 흔들면 안 되기에 노 대통령이 하는 제안은 죽어라 거절해대는 것이다."

"박근혜의 입장에서 보자면 미국은 전세계를 공산도당에서 지켜주는 고마운 은혜와 은총의 나라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여덟 페이지에 걸쳐 쓴 매체가 있다고 하자. 게시판 글이나 술자리 잡담이 아니라 활자화된 지면에 말이다. 3000원이라는 돈을 주고 사볼 기분이 과연 들겠는가?

이미 돈을 지불하고 책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명의 독자들만 생각하더라도, 별다른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희망사항과 관심법을 이렇게 길게 늘어놓는 것은 독자에 대한 폭력에 가깝다.

내 돈 3000원이 이렇게 아까운 이유

▲ 서울 중구 충정로 시사저널 편집국.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이번 '짝퉁 시사저널'을 받아들고 기분이 나쁜 것은 평소 익숙하던 기자들의 이름이 없기 때문도, 그 주장과 논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때문도 아니다. 무슨 교장 선생님 훈화도 아니고 이렇게 길게 늘어놓은 사설(私說)을 봐야 한다는 것이, 독자로서 무시당했다는 씁쓸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 프로그램 이후 이렇게 남들 앞에서 자기 혼자 생각을 길게 늘어놓는 장면은 처음인 듯하다. 문제가 되었던 민주평통 자문회의에서의 노 대통령 연설만큼이나 격렬하고 말이다. 활자 매체이니 책상은 칠 수 없었겠지만, 펜으로 썼다면 원고지 정도는 찢어지지 않았을까.

미안하지만 이번 '짝퉁 시사저널'에 커버 스토리를 읽으며, 필자인 김행씨는 자기 스스로 그려낸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과 아주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시사저널> 경영진이 그토록 만들고 싶어하던 <시사저널>의 모습이었다는 말인가. 그간 내 돈이 그런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들어갔다는 데에 배신감을 느낀다.

유근일 선생의 말마따나 품위가 중요하다. 필자도 별 품위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품위를 역설하는 특별인터뷰 바로 옆에서는 그런 척이라도 해야할 것 아니겠는가. 인터넷 <독립신문>의 패러디 포스터 옆 페이지에 인쇄된 세이코 시계 광고가 이번만큼 인상 지저분하게 보인 적은 일찌기 없었다.

광고주들께서는 바라건대 자사 제품의 품위를 손상시킨 책임을 <시사저널>에 묻기 바란다.

태그:#시사저널, #짝퉁 시사저널, #시사모, #독립신문, #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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