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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에서 소리치는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 그는 지난 1982년 마을 주민 148명을 학살한 혐의로 사형이 확정됐다.
ⓒ 연합뉴스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지난 1982년 바그다드 북부 두자일 마을 주민 148명을 학살한 혐의로 사형이 확정됐다고 AP통신 등 26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이란과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아랍의 맹주를 꿈꿨던 후세인도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운명에 처해지게 됐다.

후세인의 사형이 확정되자 미 백악관은 "정의를 추구하는 이라크인들을 위한 이정표"라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라크 내부의 각종 종파 갈등이 진정되기를 기대했다.

@BRI@그러나 후세인의 사형이 확정된 날에만 유혈충돌로 이라크인 54명이 숨졌고 미군이 7명이 전사하면서 미군 사망자만 모두 2978명에 이르렀다. AP통신은 "이 숫자는 지난 2001년 9·11 사태 때 숨진 희생자수는 2973명보다 5명이 많은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통신은 "후세인의 사형을 요구했던 시아파와 그의 재판을 공정하지 못한 것으로 봤던 수니파 사이의 종파 갈등이 더 격화될 것"이라고 전했다.

후세인에게 사형이 선고된 이유는 지난 1982년 7월 시아파 신도들이 집중적으로 살고 있던 두자일 주민을 학살한 혐의다. 당시 바그다브 북부 60㎞ 지점에 있는 두자일 마을을 지나던 후세인은 몇명의 저격수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암살을 모면한 후세인은 어린이와 부녀자까지 포함된 두자일 마을 주민을 마구 잡아들였고 이 가운데 148명을 처형했다. 후세인 쪽 변호인은 "이는 당시 이라크 법에 따른 합법적인 법 집행이었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후세인의 재판은 39번의 심리가 진행됐고 이 와중에 3명의 변호인과 증인이 암살됐다. 전혀 기가 죽지 않은 후세인은 재판정에서 "나는 이라크의 합법적인 대통령이다, 누가 누구를 심판하는가"라고 외쳤고 "차라리 총살을 당하겠다"고 대들었다.

"차라리 총살을 당하겠다"는 그의 발언은 당당하게 죽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지만 결국 교수형에 처해지게 됐다.

결국 지난 11월5일 1심 재판에서 후세인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후세인 쪽은 항소를 제기했으나 26일 이라크 최고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후세인의 이복 형제이자 두자일 마을 학살 당시 이라크 정보국장이었던 바르잔 이브라힘, 이라크 혁명법정 재판장으로 두자일 마을 주민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아와드 하메드 알 반다르도 사형 원심이 확정됐다.

이라크 법에 따르면 후세인은 사형인 확정된지 30일 안에 교수형에 처해져야 만 한다. 이제 후세인의 목숨은 내년 1월27일까지만 보장된 상태다.

시아파와 수니파 반응 엇갈려

현재 이라크 법에 따르면 후세인에 대한 사형 집행은 잘랄 탈라바니 대통령(쿠르드족)과 2명의 부통령(시아파·수니파 한명 씩)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탈라바니 대통령은 후세인 사형에 반대하면서도 부통령인 아디 압둘 마흐디(시아파)이 자신을 대리해 서명하라고 한 상태다. 이것도 합법이다.

마흐디는 "후세인 사형에 서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수니파 부통령인 타리크 알 하시미도 자신의 임기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후세인 사형에 서명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로서는 후세인은 한달 안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운명이다. 라에드 주히 이라크 최고법원 대변인은 "대통령이 사형에 서명하지 않더라도 후세인을 처형할 것"이라고 밝혔다.

후세인은 현재 바그다드 공항에 있는 미군 기지인 캠프 크로퍼에 수감되어 있다. 그가 여기서 교수형을 당할 지 아니면 이라크 정부가 사형을 집행하는 바그다드 감옥에서 처형될 지 아직 분명하지는 않다.

후세인 사형 확정에 시아파와 수니파의 반응은 극단적으로 갈렸다.

바그다드의 사드르시티에 살고 있는 리야 압둘 사타르 "우리는 아주 행복하다, 우리는 확실히 후세인을 없애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후세인의 고향이자 수니파의 핵심 지역인 티크리트 주민인 사드 이브라힘 켈릴은 "이것은 법과 정의와는 관계없는 정치적 판결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후세인 사형 확정에 가장 환호하는 곳은 미 백악관이다.

백악관 쪽은 "오늘은 압제자의 통치를 법치로 대체하려는 이라크 국민들의 노력에 하나의 이정표를 새겼다"며 "후세인은 그가 이라크 국민들에게는 부인했던 적절한 절차와 합법적인 권리를 부여 받아왔다"고 발표했다.

미국 이라크 발빼기 중요한 계기

부시 대통령이 최근 병력 증파를 발표하기는 했지만, 결국 미국은 이라크에서 얼마나 모양을 갖춰 철수하는 것이 목표다. 후세인의 사형 확정은 이의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대외적으로 이라크 공격의 목표를 완수했고 따라서 철수하는 것이라고 내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라크에서 서둘러 발을 빼고 싶어하는 미국이 이번 재판에 입김을 행사했다는 것은 예상보다 빠른 후세인 사형 확정에서도 확인된다.

후세인의 양민 학살 혐의는 단지 두자일 마을 사건만이 아니다. 지난 1987~1988년 후세인은 독가스 등으로 쿠르드족을 공격해 10만명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 혐의로 또 다른 재판이 내년 1월8일 시작될 예정이었다.

후세인이 두자일 마을 사건으로 사형에 처해지면 쿠르드족 학살 사건의 진상 규명은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 이 때문에 후세인의 반인륜적 범죄를 낱낱히 파헤치기 위해서는 그의 사형 선고가 최대한 늦춰지거나 아니면 종신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예상을 뒤엎고 후세인의 사형 선고가 빨리 이뤄진 것은 결국 부시 행정부에게 이라크 전 마무리를 위한 확실한 '전리품'(=후세인의 목숨)이 필요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후세인의 나이가 내년 4월 이라크 법으로 사형이 금지되는 만 70세가 되는 것도 사형 확정을 서두른 한 이유로 보인다.

그러나 지난 2003년 12월 후세인이 티크리트의 한 농가 토굴속에서 수염이 덮수룩한 모습으로 잡혔을 때 미국은 이라크 전쟁이 진짜 끝난 것으로 봤다. 구심점이 없어지면서 저항세력도 오합지졸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빗나갔다. 후세인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고 해도 과연 미국의 뜻대로 이라크 국민이 움직일 지는 미지수다.

교수형 확정된 후세인의 일생

(두바이=연합뉴스) 강훈상 특파원 = 이라크 두자일 마을의 시아파 주민들을 학살한 혐의로 기소돼 26일 사형이 최종 확정된 사담 후세인(69) 전 이라크 대통령은 아랍권의 패권을 손에 쥘 야망을 가졌던 독재 통치자였다.

후세인은 풍부한 오일달러로 풍족한 생활을 즐겼던 이라크 국민을 1980년 이란전, 1990년 쿠웨이트 침공 등 잇따른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했다. 결국 2003년 미군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됐고 같은 해 12월 고향 티크리트의 한 농가 토굴에서 수염이 더부룩한 초라한 모습으로 체포됐다.

1937년 4월 28일 바그다드에서 북쪽으로 150㎞ 떨어진 티크리트시 외곽의 알-오자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후세인은 18세 때 바그다드로 상경, 학생운동에 참여하다 1956년 반정부 봉기를 계기로 이듬해 범-아랍 정치세력인 바트당에 입당한다.

이 때부터 후세인은 본격적으로 정치수업을 받으며 바트당의 핵심분자로 성장한다.
후세인은 십자군 전쟁에서 기독교 연합세력을 물리치고 예수살렘을 탈환한 이슬람의 영웅 살라후딘의 이름을 따 자신도 살라후딘과 같은 추앙을 받자는 뜻에서 자신이 태어난 티그리트주의 이름을 살라후딘주로 개명하기도 했다.

그의 정치적 야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1959년 왕정붕괴 후 집권한 압델-카림 카셈 대통령 암살모의에 개입, 국외로 도피해 이집트와 시리아를 전전하다 1963년 바트당이 쿠데타로 집권한 뒤 바그다드로 돌아왔으나 불과 9개월 뒤 다시 정권이 뒤바뀌자 체포돼 1966년까지 수감생활을 했다.

1968년 바트당의 재집권 계기가 된 쿠데타에서 핵심역할을 한 뒤 혁명평의회 부의장으로 권력의 최정점을 향해 급속히 부상하던 후세인은 마침내 1979년 아메드 하산 알-바크르 대통령의 뒤를 이어 이라크 지도자의 자리에 섰다. 아랍 세계의 지도자로 부상할 기회를 노리던 후세인은 1980년 9월 이란-이라크전을 일으켰고 1988년 참혹한 대가만을 남긴 채 이란과 휴전협정을 맺었다.

전쟁으로 인한 외채 부담에서 벗어날 기회를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모색했던 후세인은 1990년 8월 쿠웨이트를 전격 침공했지만 전세계적인 비난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라는 위기에 처했다.

이어 1991년 1월 미군 주도의 걸프전에서 패퇴한 후세인은 그해 2월 쿠웨이트에서 완전히 철수해야 했다. 잇따른 실정에도 후세인은 1995년 10월과 2002년 10월 두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 100%에 가까운 압도적은 찬성률로 대통령직을 이어간다.

이후 유엔의 경제제재 등 국제적 고립, 미국 및 영국의 끊임없는 군사적 압박 속에서도 탄탄한 국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권력을 유지했던 후세인은 결국 9.11 테러 이후 강경파가 득세한 조지 부시 미국 행정부의 사상 유례없는 '예방전쟁' 속에 두 아들을 잃은 채 권좌에서 쫓겨나 도망자 신세가 돼야 했다.

지난 2004년 미군에서 이라크 임시정부로 인계된 후세인은 지난해 두자일 마을 학살사건 주도 혐의로 이라크 특별재판부에 의해 기소되며 법정에 서야 했다. 지난해 10월19일 시작된 후세인 재판은 피고측 변호사의 피살과 후세인의 옥중 단식 등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결국 법원은 "총살형을 받겠다"고 말했던 후세인에게 교수형을 선고했다.

결국 후세인은 26일 최고 항소법원에서 교수형이 확정되면서 24년에 걸친 그의 철권통치의 흔적과 서방 세계에 맞서 중동의 패권을 쥐려는 야심도 교수대에 함께 매달리게 됐다.

hsk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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