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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대(강원도 춘천시)에 다니는 B(사회학과 2년)씨는 요즘 강의평가제도가 불만스럽기만 하다. 지난 학기에 수강했던 교양 과목의 휴강 일수가 전체의 2/3에 달할 정도여서 학기말 강의 평가 기간에 최악의 평점을 주었지만, 달라진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번 학기에 그 수업이 또 개설됐다고 들었습니다. 후배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여전히 강의보다 휴강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숭실대에 다니는 H(경제학과 3년)씨.

"강의실에 오버헤드프로젝터니 뭐니 해서 첨단 기계가 있으면 뭐하나요? 교수는 매일 책만 읽는데…."

그는 이번 학기에 경제학과의 몇 안 되는 전공 가운데 필수과목이나 마찬가지인 수업을 들었다.

"우리들 사이에선 대대로 내려오는 '좋은 학점이 보장되어 있는 수업'이라 할 수 있죠. 교수는 앞에서 책만 읽고 그러다 보니 학생들은 대출이나 땡땡이가 비일비재하고…. 시험은 매년 내려오는 족보를 통해 공부하면 B+ 정도는 쉽게 받을 수 있죠."

강의평가, 실질적 평가 어렵고 인센티브도 없어

▲ 강의평가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부서가 없다보니 대학 내의 강의 평가 설문지는 과목의 성격이 무시된 채, 대부분 단일 평가 설문지로 운영되고 있었다.
ⓒ 한국강의평가실태분석 논문 발췌
대학 강의 평가제도가 표류하고 있다. 지난 1990년대 초, 대학 교육의 내실화를 기하고, 학생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한다는 취지로 도입된 강의평가제가 대학 당국의 무관심 속에 '빛 좋은 개살구'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서울 17개, 지방 3개 대학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0개 대학 모두 강의평가제를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강의평가제의 결과에 따라 과목을 개설한 교수에게 불이익을 주는 경우는 단 한 건도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조사 대학: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숭실대 경희대 카이스트 한국외대 홍익대 한양대 경원대 단국대 한림대 경북대 조선대 감리교신학대 강원대 춘천교대 항공대 인천교대).

그렇다면, 10년을 넘긴 대학의 강의평가제가 정착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 해결 방안은 무엇일까?

@BRI@한림대 B씨의 사례를 접한 기자는 한림대 강의평가 담당자와 직접 통화를 시도했다. 해당 직원의 입에선 전혀 뜻밖의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강의 평가에 있어, 최악의 평점을 준 학생들의 결과는 평가 집계에서 뺀다"는 것이었다.

이유인 즉, 최악의 평점을 주는 경우에는 학생들이 무성의하게 평가에 임했다고 판단, 아예 집계 대상에서 제외해 버린다는 것. 결국, 성의껏 작성해도 최악으로 강의 평점을 주었을 경우에는 집계 대상에서 빼 버리니, 제대로 된 강의 평가가 어려울 수도 있다.

사정은 다른 대학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K대의 관계자는 "학생들이 선생을 평가하는 것 자체도 받아들이기 힘든 데다, 최악으로 평가해 놓는다면 사실 여부를 떠나 교수들이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든 것 아니냐"며 "교수들의 반발도 무시할 수만은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문제는 또 있다. 최악의 강의평가에 대한 제재는 둘째치더라도 우수 강의에 대한 성과급제나 인센티브제가 거의 전무한 실정이기 때문이다. 취재진이 조사했던 20개 대학 가운데 대부분 대학이 인센티브 제도를 실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대학 또한 상패나 상장만을 수여할 뿐, 실질적인 당근에 해당하는 상금이나 강의 시간 축소 등은 전혀 제공하고 있지 않았다. 이에 대해 단국대 김 아무개 교수는 "학교에서 특별한 인센티브도 없고, 잘하는 교수나 못하는 교수나 대우가 똑같은데 열심히 하려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라고 털어놓았다.

또 대부분의 조사 대학에서 교수 재임용의 인사 고과에서 강의평가결과가 차지하는 비중은 5%에도 미치지 않았다. 반면, 연구 실적의 경우, 적게는 80%, 많게는 95%에 이를 정도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교수들이 연구 실적보다 강의 준비에 시간을 투자할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다.

호주, 총리가 '올해의 강의상' 시상

반면, 미국이나 호주의 국립대 및 사립대의 경우, 각종 강의 우수상들이 즐비한 데다 인센티브도 뛰어난 편이어다. 일례로, 호주 시드니에 있는 뉴 사우스 웨일스 (New South Wales) 대학의 경우에는 매해 26명의 교수에게 'Best Teacher상'을 주고 있으며, 상금도 2000만 원 정도의 파격적인 규모로 책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호주 정부 역시 총리 주최로 우수 강의를 실시하는 교수에게 직접 수상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최우수 강의 대통령상(The Prime Mister's Award for Australian University Teacher of the Year)'이라 불리는 이 상은 매년 전 호주의 대학들에서 엄선된 강의 가운데 가장 우수한 평가를 받은 한 명에게 4500만 원의 상금과 함께 수여된다.

미국 대학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해서, 오스틴에 있는 텍사스 주립대는 150여 개에 이르는 각종 우수 강의상과 함께 총 2억 원에 달하는 상금을 부상으로 마련하고 있다. 미시건 주립대의 경우에는 최고 상금 2000만 원의 최우수 강의상을 해마다 5~7명의 교수들에게 수여하고 있다. 반면 강의 평가에서 신통치 못한 점수를 기록한 교수의 경우, 재임용 또는 재계약시 최우선 탈락 대상으로 고려되고 있다.

연세대, 학생들 기준에 맞춘 강의 평가

▲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강의를 평가하는 연세대 웹진 연두의 강의평가 페이지(http://www.yondo.net).
ⓒ 웹진 <연두>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강의평가제도가 겉도는 이유는 비단 대학 당국과 정부, 교수들만의 문제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미국 대학이 제시해 주고 있다. 미국 텍사스 주립대의 경우에는 해마다 매 학기가 시작되면 총학생회가 학생회관 앞에 수백 장의 흰 벽보를 붙여 놓는다. 종이에는 그 학기 개설 과목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학생들이 해당 과목에 대한 질문과 답을 자유로이 적을 수 있다.

학생들은 자신이 수강했던 과목명이 적힌 백지들을 찾아내서 거기에 자유롭게 한 줄 평을 쓰고, 서로 정보를 얻어 가고 있다. 실제로 이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수학했던 한림대 심훈(38)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학생들 스스로가 강의를 평가하고 서로에게 정보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회상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변화의 바람은 조금씩 불고 있다. 연세대의 경우, 지난 학기부터 학생들 스스로가 강의평가를 하고 있다. 이 운동에 앞장 선 한정원(연세대 2년)씨는 "학교가 실시하는 강의 평가가 너무 형식적이라는 생각에 직접 나서게 됐다"며 "학생들의 참여가 폭발적이어서 놀라울 따름"이라고 밝혔다. 강의 평가는 교수 성향, 인상적인 강의 내용, 출석 확인 등 15가지에 이르는 항목을 꼼꼼하게 다루고 있다. 평가내역은 연세대 학보인 <연세춘추>를 통해 공개돼 학생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학생 강의평가에 참여했던 연세대 Y(경영 2년)씨는 "수업이나 교수와 관련된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며 "형식적이지 않은 질문지와 공개돼 있는 강의평가결과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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