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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도와주세요. 한 장이라도 좋으니…." 백혈병을 앓는 동생을 위한 수혈부터 아버지를 위한 신장이식에 이르기까지 간절한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곳이 있다.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 홈페이지의 '함께 하는 세상-도와주세요' 코너다. 이곳에선 환자와 수혈자의 자발적인 참여로 따뜻한 나눔이 이루어진다. 간절한 혈액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수술 날짜를 받아놓고서도 애태우는 환자들에겐 단 한 장의 헌혈증도 간절하다.

▲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 홈페이지의 '함께 하는 세상-도와주세요'
ⓒ 대한적십자사 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지난 6월 4일 라병일씨는 수술 날짜를 받아놓고 대한적십자사 홈페이지를 통해 혈소판을 구하고 있었다. 때마침 홈페이지를 찾았던 필자와 혈액형이 일치해 필자가 혈액을 공여하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가까운 헌혈의 집에서 헌혈하시고 여의도 성모병원 라병일씨한테 보내달라고…." 라씨의 부인 이주희(가명)씨는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힘내세요"라는 말이 무색했다. 환자뿐 아니라 가족들이 겪었을 아픔과 고통을 "힘내세요"라는 한마디로 위로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헌혈하는 데 걸리는 30분이 다른 누군가에게 30년을 더 살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BRI@백혈구 수치가 낮아서 줄곧 병원에서 지냈다는 진건이는 얼굴도 모르는 여러 사람들한테 헌혈증을 받고 수술할 수 있었다. 어린아이의 정상적인 백혈구 수치는 4500에서 14500 사이지만 진건이는 골수에서 정상적인 혈액공급이 되지 않아 600에 불과한 상태.

"요즘 같이 각박한 세상, 나 혼자 살기도 바쁜데 누가 헌혈하고 헌혈증을 남에게 일일이 보내줄까 하는 의문도 들긴 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고맙게도 여러분이 연락을 주셨고 헌혈증을 등기로 보내주셨습니다." 대한적십자사 홈페이지를 통해 도움을 요청했던 진건이 엄마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한테 소중한 헌혈증을 받은 뒤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이라며 훈훈했던 그때의 일을 홈페이지에 올리기도 했다.

▲ 서울 지하철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 헌혈의 집
ⓒ 오주연
헌혈에는 전혈과 성분헌혈이 있다. 전혈은 혈액의 모든 성분을 헌혈하는 것이다. 전혈 헌혈일로부터 2개월 후 다시 헌혈할 수 있다. 성분헌혈은 재생이 가장 늦은 적혈구를 헌혈자가 돌려받음으로써 헌혈자의 신체적 부담을 줄여준다. 전혈보다 빨리 회복될 수 있어 14일 후 다시 헌혈할 수 있다. 성분헌혈의 경우 혈액에서 혈장과 혈소판만 헌혈하고 나머지 혈액성분은 헌혈자가 되돌려 받는 반환방식으로 혈장헌혈과 혈소판헌혈이 있다. 여성의 경우 남성보다 체내에 적혈구 수가 적고 혈장성분이 많기 때문에 성분헌혈이 더 적합하다.

혈소판은 라씨나 진건이 같은 혈소판 기능 장애, 혈소판 감소증, 급성백혈병, 재생불량성 빈혈 환자들에게 꼭 필요하다. 혈소판이 필요한 환자의 경우 1회 약 250mL가 필요한데, 전혈에서 분리한 혈소판 성분제제의 양은 50mL 정도밖에 안 되기 때문에 1회 수혈받기 위해서는 5명의 전혈이 필요하다. 하지만 혈소판 성분헌혈의 경우, 1회 400mL 이하를 헌혈하기 때문에 한사람 분의 혈액을 공급한다. 따라서 5명의 전혈자에게 혈소판을 모으는 경우보다 수혈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

▲ 헌혈엔 전혈과 성분헌혈이 있다.
ⓒ 오주연
헌혈은 단순한 봉사를 넘어선 생명 나눔이다. 서울 대방역 헌혈의 집 인근에서 행인들에게 헌혈을 청하는 김모씨는 "하루 평균 헌혈자가 20~30명 정도"라고 밝히고 "학교 같은 곳에서도 많이 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헌혈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헌혈 희망자 10명 중 4~5명이 부적격자로 판정받아 도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김씨는 "예전에는 부적격자 중 여자가 많았지만 요즘에는 남자도 많다"고 말하고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서 헌혈을 할 수 없는 사람도 있고, 약을 복용 중인 사람을 되돌려 보내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 서울 지하철 2호선 대방역 헌혈의 집. 헌혈엔 단순한 봉사 이상의 의미가 있다.
ⓒ 오주연
서울역 헌혈의 집의 경우 하루 평균 헌혈자는 30~40명. 주말에는 이보다 좀 더 많은 40~45명이 헌혈한다고 한다. 서울역엔 휴가를 나오거나 부대에 복귀하는 군인들이 많기 때문에 남자들의 참여도가 상대적으로 높다.

서울역 헌혈의 집 간호사 유현경씨는 "겨울에는 감기약을 복용해서 부적격자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고 남자들은 술 때문에, 여자들은 헤모글로빈이 낮아서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고 말했다.

필자가 서울역 헌혈의 집을 찾은 날, 마감시간인 오후 6시가 가까워오는 시간에도 자리는 헌혈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이 중 자발적인 사람은 20~30% 정도며 대부분은 거리에서 요청을 받고 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자발적 헌혈 참여도가 낮은 이유와 관련, 유씨는 "헌혈을 잘못하면 에이즈에 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 등 부정적인 선입견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 있다"며 아쉬워했다.

▲ 연말연시, 진정으로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보내보자.
ⓒ 오주연
헌혈의 고귀한 뜻을 기리기 위해 세계적으로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적십자연맹(IFRC), 국제수혈학회, 국제헌혈자연맹 등 4개 국제기구가 공동으로 세계 헌혈자의 날을 제정하고 "세계 헌혈자의 날은 헌혈이라는 아름다운 실천을 솔선수범하는 이름 없는 영웅들을 위해 바치는 소중한 기념일"이라고 공동 선언했다.

이처럼 헌혈은 영화티켓을 얻기 위해, 초코파이를 먹기 위해, 혹은 봉사시간을 채우기 위해 작정하고 나서는 행사가 아니다. 내가 헌혈하는 데 10분을 쓰면, 누군가는 10년 후 캐럴을 다시 듣게 될 수도 있다. 가족, 연인, 친구와 함께 가까운 역에 들려 '붉은 기적'을 실천하고 오는 건 어떨까? 산타할아버지의 선물보다 헌혈증 한 장이 더욱 간절한 누군가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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