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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전쟁 당시 고부군수였던 조병갑의 증손녀로 알려진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원들 앞에서 증조부의 죄에 대해 사과의 뜻을 밝혔다. 유족들 역시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다.

유족회 정남기 회장의 말처럼 "후손이 책임이 질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조기숙 전 수석은 마치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사과의 뜻을 표명했고 유족회 회원들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졌다. 조기숙 전 수석의 사과는 그의 개인적 판단에 기인한 것이고 또 유족회 역시 이를 수용했으므로, 이 문제 자체에 대해서는 제3자들이 왈가왈부할 수 없을 것이다.

@BRI@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냉정한 시각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역사 앞에서 죄를 지은 자의 후손들이라고 해서 조상의 범죄까지 물려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합의를 담고 있는 헌법에서도 연좌제 금지를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다. 범죄를 저지른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 후손들은 엄연히 제3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조상이 범죄자라는 이유만으로 자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분명 법리적·논리적으로 합당치 못한 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범죄자의 후손들이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고 당당하게 행동하면, 그것을 뻔뻔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정서다. 친일파 같은 민족반역자의 후손이 고급 저택에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즐긴다면, 이를 두고 볼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정서다.

범죄행위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후손을 단죄하는 것도 어딘가 이상하고, 그렇다고 범죄자의 후손들이 아무런 사과도 하지 않으면 그것도 참을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정서다. 그럼,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제3자가 저지른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이 사과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에 관한 몇 가지의 사례를 살펴보기로 한다.

첫 번째 사례 : 1932년 미국 정부 산하 질병예방센터는 매독의 효과를 연구하기 위하여 앨라배마주 터스키기에 거주하는 200명의 흑인들을 상대로 실험을 했다. 이로 인해 매독에 걸린 흑인들은 사망했고, 그 가족들에게까지 병이 전염되었다. 지난 1977년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유족들에게 사과의 뜻을 표명했다.

두 번째 사례 : 1204년의 제4차 십자군 원정 때에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은 십자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난 2000년 5월 4일 그리스를 방문하여 크리스토둘로스 그리스정교회 대주교에게 이 파괴행위에 대해 사과의 뜻을 표명하였다.

세 번째 사례 : 2006년 7월 3일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미국과 유럽은 과거 노예제도와 관련하여 아프리카에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3가지의 사례를 보면서, 우리는 어떤 한 가지의 정서를 느끼게 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직접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지만, 클린턴과 교황의 사과는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리고 차베스 대통령의 요구도 무리한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클린턴, 요한 바오로 2세, 미국·유럽 정부가 과거의 범죄를 직접 저지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범죄자의 직계후손도 아닌데 이들이 사과를 한 것이 당연한 이유는 무엇인가?

클린턴이나 요한 바오로 2세 등이 과거에 벌어진 제3자의 행위에 대해 사과를 한 것은 그들이 과거 범죄자의 '유산'을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린턴은 질병예방센터를 감독했던 미국 정부를 관리하고 있었고, 요한 바오로 2세는 십자군전쟁에 관련된 로마교황청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질병예방센터의 직원이나 십자군 병사의 후손들에게는 사과를 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후손들은 '질병예방센터가 소속된 미국 정부'나 '십자군과 관련된 로마교황청' 등을 관리하는 지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 후손들이 자발적으로 사과를 한다면, 그것을 말릴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후손들은 자신의 사과를 하는 게 아니라 제3자를 대신하여 사과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클린턴이나 요한 바오로 2세는 제3자를 대신해서 사과한 게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사과를 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들은 과거 범죄를 저지른 단체를 관리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본다면, 자기 자신이 직접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그 범죄와 관련된 조직이나 재산을 관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이 사과의 주체가 되어야 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회사의 계승자가 그 회사의 채무까지 승계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법학에서도 조직이나 재산에 대해 법인격을 부여하고 있다. 조직에 대해서는 사단법인격을 부여하고, 재산에 대해서는 재단법인격을 부여하고 있다. 이는 조직이나 재산으로 인해 발생한 법적 문제와 관련하여 책임 소재 등을 처리하기 위한 것이다. 사단법인이나 재단법인의 책임자는 그 법인과 관련된 과거의 행위에 대해서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경우가 있다.

친일파 기타 민족반역자의 후손의 경우에도 이와 유사한 원칙이 적용될 것이다. 조상이 민족반역자라 할지라도 그 자신이 직접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그는 조상의 범죄에 대해 사과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하지만, 조상이 범죄를 저지를 때에 갖고 있던 직책이나 재산을 보유하고 있을 때에는 관리자의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범죄와 관련된 물질적 기초(직책·재산)를 그가 현재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특히 친일파 재산 문제와 관련하여서도 중요한 시사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조상이 친일파라 하여도 그 조상과 무관하게 재산을 축적하였다면, 친일파의 후손은 자신의 재산과 관련하여 하등의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친일파 조상이 친일행위를 통해 얻은 재산을 현재 갖고 있거나 그 재산을 매개로 하여 획득한 재산이 있다면, 그는 자기 자신과 조상이 법적인 제3자라는 점만을 이유로 사과의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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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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