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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의 서재 한 켠입니다.
ⓒ 박균호
책 읽기를 즐기며, 책 수집을 낙으로 삼는 이들은 정운영 선생의 다음 말을 가슴 깊이 수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책을 수집하면서 재벌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실은 저 자신도 당장 자기 명의의 들어갈 집 한 채 없는 이들이 셀 수 없이 많은 이 나라에 재산이 수백억 혹은 수천억대의 재벌들이 끊임없이 이윤추구에 신명을 다하는 모습을 도무지 이해 못하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십년 이상 수집하다보니 제가 이해하지 못할 일로 여겼던 재벌들의 행태를 저 자신이 몇 곱절 더 심하게 답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수년전부터 책 사냥에 몰두해왔던 제 서재에는 이중주차(?)를 하지 않으면 도저히 책을 더 이상 둘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책에 대한 탐욕은 그칠 줄을 모릅니다.

책을 빌려주는 사람은 바보다! 그러나 빌린 책을 돌려주는 사람은 더 바보다! 라는 금언을 목숨처럼 지켰고, 희귀본이라면 저의 기호에 상관없이 1권 이상 구매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저의 무분별한 수집욕구를 점잖게 타일러주는 작은 사건이 발생한 것은 작년 이맘때 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하루에 한번 씩 꼭 들리는 인터넷 헌책방을 별 생각 없이 접속했는데 시쳇말로 초대박이라고 할 만한 책들이 무더기로 보이더군요.

정신없이 장바구니에 담는 것도 모자라 이 대박을 혼자 즐길소냐?며 저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동지(?)에게 연락해서 오순도순(?) 책 사냥을 마친 후에 느긋하게 커피한잔을 마시려는 찰라 그 후배가 제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배님, 또 누가 한 분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 녀석이 무슨 소리야? 며 뜨악하게 생각했었는데 그 후배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그 말의 옳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배의 말인즉 그 헌책방의 홈페이지 전면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던 맛있는 사냥감인 책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여러 사람이 아닌 한 사람에 의해서 오랜 시간동안 정성들여 수집한 책들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한 사람의 피와 땀이 고스란히 담긴 컬렉션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귀한 보물들이 왜 헌책방에 나와서 탐욕스러운 초보 책 사냥꾼들의 먹잇감이 되느냐는 것인데 그것은 그분이 사망한 경우에나 가능한 시나리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종종 또 한분의 애서가가 돌아가셨구나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컬렉션을 인터넷 헌책방에서 보게 되었고 이러한 풍경이 어찌 저에게는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40대 돌연사가 아주 흔한 사회에서 코앞에 나이 40을 바라보는 제가 과연 얼마나 이 책들을 움켜지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제가 없다면 그토록 귀하게 여겼던 저의 자식 같은 책들은 다른 먼저가신 애서광의 책 목록처럼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하기가 쉽지 않겠지요.

그래서 책도 흐르지 않고 고이면 썩고 추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책은 그 책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가야한다는 것도 깨닫습니다. 제가 비록 힘들게 무시 못 할 비용이 든 책일지라도 나보다 더 그 책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에게 한 권 두 권 양도하게 되었지요.

책을 모으고 소장하는 즐거움도 커지만 그 책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선물하는 즐거움은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두 권 나눠주다 보니 저도 가끔 책을 선물 받는 경우도 많게 되었는데 제가 3년을 찾아 헤매다 못 찾던 <워터멜론 슈가에서> <캐치 -22> 등을 이런 행운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저의 소장도서 일부를 학교 도서관에 기증하고 그 책을 읽는 학생들의 진지한 눈길을 바라보면서 역시 책도 흘러야 제 맛임을 되새기는 요즘입니다

무작정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물려주지 말아야 할 것은 돈 뿐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워터멜론 슈가에서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최승자 옮김, 비채(2007)


캐치-22 1

조지프 헬러 지음, 안정효 옮김, 민음사(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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