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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선우원 장의준 허경
정리 : 박영신


▲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한국영화/음악제의 개막식에 모습을 드러낸 봉준호 감독.
ⓒ 염준호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봉준호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 고전영화가 프랑스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 한국 영화에 관한 정보의 결핍은 한국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 기인한다. 그러나 당시 한국 영화가 다른 동아시아 국가보다 결코 뒤처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구로자와 아키라 시대에 한국에도 이에 버금가는 거장들이 존재했다. <오발탄(1961)>의 유현목 감독이 대표적이다."

이같은 답변은 프랑스인 관객 한 명의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시작됐다.

"한국영화는 최근 10년 간 프랑스에 급속도로 알려져 사랑받고 있다. 구로자와 같은 고전 거장의 결핍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가 이같은 쾌거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 놀랍지 않은가?"

중국이나 홍콩의 무협영화, 일본의 사무라이 혹은 야쿠자 영화는 이미 오래 전부터 프랑스에 잘 알려진 반면, 한국영화는 역사가 빈약하다는 '오해'에서 비롯된 이 질문은 봉 감독을 발끈하게 한 것.

제2회 '스트라스부르 한국영화·음악제(이하 페스티벌, 집행위원장 라기태)' 개막식 날 벌어진 장면이다. 페스티벌은 위의 예처럼 프랑스인이 갖고 있는 한국을 향한 편견의 벽을 허무는 과정이었다.

봉준호 "유현목 감독은 구로자와에 버금가는 거장"

페스티벌의 공식명칭은 '한국의 방주'. 지난 7일 문을 연 페스티벌은 엿새 동안의 여정을 마치고 12일 막을 내렸다. 파리에 비해 한국영화를 만날 기회가 상대적으로 빈약한 스트라스부르 시민들은 페스티벌에 열광적 호응을 보냈다.

지난해 11월 스트라스부르에 거주하는 한국인 유학생과 프랑스인들이 모여 결성한 한불예술교류협회(ACEFA)가 주최한 이 페스티벌에서는 스트라스부르 시네마스타, 국립현대미술관, 스트라스부르 영상자료원 등 6개 공간에서 <말아톤(2005, 정윤철)> <파이란(2001, 송해성)> <망종(2005, 장률)> 등 총 15편의 한국장편영화가 소개됐다.

봉준호 감독이 참석한 가운데 <괴물(2006)>이 개막작으로 특별 상영돼 이른바 '봉 마니아'들을 열광시키기도 했다. <괴물>은 오는 22일 프랑스 전역 250개 관에서 공식 개봉될 예정이다.

노장 유현목 감독 또한 스트라스부르에 귀한 걸음을 했다. 페스티벌이 마련한 유 감독의 회고전 때문. 회고전에는 <오발탄> <김약국의 딸들(1963)> <장마(1979)> 등 세 편이 소개됐으며 관객과의 대화도 이어졌다.

특히 유 감독의 대표작이라 할 <오발탄>은 스트라스부르 시민들의 발걸음을 페스티벌로 불러모으는 데 톡톡히 한 몫을 했다. 이 영화는 지난해 1월 시네마떼끄 프랑세즈가 개최한 '한국영화 50년'을 통해 프랑스에 이미 소개돼 '한국의 네오리얼리즘'이라는 찬사를 이끌어낸 바 있다.

유현목 감독은 페스티벌이 막바지에 이른 지난 11일 영화제를 준비한 한불예술교류협회 회원들과 저녁을 함께 하며 자신이 걸어온 길을 담담하게 들려줬다.

산수(傘壽, 80)를 넘긴 나이에도 함께 한 젊은이들에 뒤지지 않는 열정을 과시한 감독의 모습에 이탈리아의 노장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이 겹쳐진 것은 환상이었을까.

1985년 안토니오니는 신체 일부가 마비되는 치명적인 사고를 당했으나 그로부터 10년 후인 1995년 빔 벤더스 감독의 도움으로 <구름 저편에>를, 2004년에는 왕가위·스티븐 소더버그 감독과 함께 <에로스>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의 열정적인 영화 작업은 92세에까지 계속됐다.

욕심일 수도 있겠으나 한국영화의 한 시대를 관통한 유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되는 이유다. 아래 유 감독과 나눈 일문일답을 소개한다.

<오발탄>이 그린 암울한 시대 "이대로는 집에 못 간다. 술 먹으러..."

▲ 제2회 스트라스부르 한국영화·음악제 포스터
- 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 스트라스부르, 리옹 등 세 곳에서 열리는 국제영화제에서 모두 '회고전'의 주인공으로 감독은 프랑스를 찾았다. 감회가 궁금하다.
"지난 2000년, 엑상프로방스 지방 영화제에 초대된 이후 이 곳 스트라스부르 영화제가 두번째다.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영사기를 발명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아닌가. 영화의 모태인 프랑스에 오게 돼 기쁘다. 게다가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 <사형수 탈옥하다(1956)> 중 레지스탕스가 감옥을 탈출하는 장면에 나타난 심리묘사의 디테일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 대표작 <오발탄>을 일러 '한국 네오리얼리즘의 시작'이라 평가하기도 하는데 감독의 생각은.
"<오발탄>이 네오리얼리즘에 속한다고, 나는 촬영 전에 이미 인식하고 있었다. 이전에 서울에서 프랑스 영화 <죄와 벌>을 본 일이 있다. 표현주의적인 카메라 앵글들에 충격을 받았고 꼭 그 기법을 사용하고 싶었다.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만일 내가 한국 네오리얼리즘의 선구자라 평가받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가 고난의 시대, 즉 새로운 영화기법의 부재 상황을 돌파했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오발탄>에서 보여진 시대의 암울한 상황이 일반 관객들로 하여금 많은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오발탄>을 보고 난 후 관객들이 이렇게 말했다더라. '이대로는 집에 못 간다. 술 먹으러 가자!'"

- 감독은 저서 <영화인생, 헤화당>에서 '나는 반공영화를 4편이나 만들었다'고 술회한 일이 있다. 이 시기가 궁금하다.
"반공영화가 정책적으로 권장되던 시대였다. 반공영화를 찍는 영화사에 외화 쿼터 이득을 주던 시기였다. 당시 내 작업 성향은 이념보다 문예적이고 예술적인 면에 치중했다. 기독교 휴머니즘 쪽에 가까웠다."

- 1956년 <교차로>로 데뷔했다. 당시 영화 하던 풍토나 여건 혹은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면.
"스토리 위주의 당시 영화계 풍토에 불만이 있었다. 고유한 주제의식을 찾는 것보다 내게 중요했던 것은 영화 테크닉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교차로>가 나오자 <동아일보>는 나를 '정열적인 테크니션'이라 묘사했다. 바로 이 때부터 '영상파 감독'이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교차로> 이전의 한국영화는 배우의 표정이 영상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구 소련의 몽타주 기법, 포토제닉 이론에 도취됐던 까닭에 한국영화의 영상을 개혁하고자 하는 바람이 있었다. <교차로>에서 영상 테크닉에 특히 치중했던 까닭이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교차로>에 영향을 받은 많은 감독들이 오히려 테크닉에만 치중하게 된 것이 문제였다. 나를 비롯해 다른 감독들도 테크닉 과잉에 관해 반성해 볼 기회를 갖게 됐다. 주제의식을 탐구 하게 만든 계기였다. 즉 문예영화를 하자는 결심을 하게 됐고 그 열매가 바로 <오발탄>이다."

▲ '관객과 의 대화'에 나선 유현목 감독. 프랑스의 한국영화 평론가 앙트완 코폴라 교수는 이날 <오발탄>을 일러 '한국영화사에서 네오리얼리즘의 시초가 된 영화'라고 소개했다.
ⓒ 염준호
"유현목은 사탄이다" 웃지 못할 일화도

- 감독의 작품을 관통하는 철학을 일러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영향이라 말하기도 한다. 감독에게 <죄와 벌>은 성경에 버금가는 텍스트로 알려져 있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셨던 어머니 얘기를 빼고 <죄와 벌>을 말할 수는 없다. 당시 어려운 시집살이 중 종소리를 따라 무작정 교회로 간 것이 어머니가 기독교에 입문한 계기다.

내가 서울에서 대학가겠다고 38선을 넘으려 하자 어머니는 '너는 목사가 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38선을 넘던 중 공동묘지 근처에서 소련군과 마주쳐 성경책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나중에 서울에 오셨을 때 솔직하게 활동사진을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어머니는 이렇게 당부하셨다. '무엇을 하든 복음만 전해라.'

내 영화들을 잘 보면 부분적이긴 하나 기독교적 색채가 스며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오발탄>의 주제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신을 상실한 현대사회에서 신은, 기독교는 과연 무엇일까? 신이 발사한 탄환은 빗나가 버린 것이 아닐까?'

<순교자>(1965)에서 학살로부터 살아남은 한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의 존재를 믿어야만 합니다.' 신을 부정하려고 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한국 최초로 기독교인을 자극시킨 영화이기도 하다.

기독교 신문에서 나운영씨는 나를 가리켜 '사탄'이라고 했다. 참 무식한 얘기다. 반면 평범한 신자이셨던 어머니는 <오발탄>을 보시고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항상 아들이 하는 일을 믿어주셨다."

- <오발탄> <순교자> <카인의 후예>(1968) 등 배우 김진규씨와 유독 작업을 많이 했다. 감독이 평가한 뛰어난 배우는 누구였으며 이유는 뭘까.
"김진규는 생각하는 얼굴이다. 그게 좋았다. 여배우는 문희를 선호했다. 작은 얼굴에 큰 눈을 가진 그녀는 내게 있어 포토제닉이었다. 여기서 포토제닉이란 외양적인 것이 아닌 사진 뒤의 혼, 즉 영혼이 드러나는 사람이란 말이다. 이것은 화면의 여백을 채우는 힘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배우로서 미인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미인은 지금이나 그 때나 포화상태 아닌가? 연기력이 살아있는 배우가 좋다."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치는 젊은 감독 아쉬워"

▲ 스트라스부르에 온 유현목 감독
ⓒ 염준호
- 1995년 칠순의 나이에 영화 <말미잘>을 들고 돌아왔다. 이것은 우리 영화사에서 충격적 '사건'이었다.
"미국의 한 심리학자가 정신적·육체적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 직업 순위를 조사한 일이 있는데 첫번째가 영화감독, 두번째가 강대국 지도자 그리고 세번째가 전시 군사지휘관이었다. 알다시피 <말미잘>은 칠순에 찍은 작품이다. 체력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을 뿐 아니라 영화용어가 많이 바뀌어서 새로 공부하느라 힘들었다.

당시 대학원생인 아마추어 38명 정도의 스태프를 채용했는데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라 작업을 진행하기 참 힘들었다. 그런 가운데 한 청년이 사퇴하겠다고 선동을 하는 거다. 두 배로 힘들었다.

지금도 영화를 찍고싶은 의욕은 있지만 우리 영화계에서는 감독이 나이 40만 넘어도 제작자들이 쓰지 않으려 한다. 노장들은 제작자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요구를 많이 하니까. 이런 이유로 40~50대 감독들은 거의 일을 못한다. 사실 50~60대까지 영화를 계속 찍는 게 좋다고 생각 하는데 경제나 시장의 논리에 좌절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 눈여겨 본 재능있는 후배 감독이 있을 것이다.
"<하얀전쟁(1992)> 정지영 감독을 좋아한다. 경솔하지 않고 신중한 그의 자세가 좋다. 이창동 감독도 보기 드문 지성파 감독이라 생각한다. "

-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요즘 영화학도들은 외국에서든 국내에서든 이론을 배우지만 제작자들은 흥행을 이유로 이들의 작업을 꺼리게 된다. 이 점이 안타깝다. 감독이 되려면 현장 경험이 있어야만 한다. 조감독 생활 하면서 단 두세 작품이라도 몸으로 때워보는 게 영상 테크닉의 발전을 위해 중요하다.

그런데 요즘 젊은 감독들은 이런 것을 싫어하는 것 같다. 외국에서 배워왔다는 자부심때문인지 조감독 생활을 하면서 몸으로 공부하기를 꺼린다. 결국 스태프를 통제하기도 힘들게 될텐데 말이다.

내가 할리우드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점은 배우가 비록 화면에는 안 나온다 하더라도 화면에 나오고 있는 상대 배우를 위해 마치 카메라를 받고 있는 것처럼 진지하게 연기를 해준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 연기자들은 화면에 안 나올 때 연기를 진지하게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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