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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문화원에 드나들던 시절 만화 전시장과 영화 판넬 앞에서
ⓒ 이명옥

경복궁 앞에 자리하고 있던 80년대 프랑스 문화원은 유럽 문화를 맛보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위치도 좋았지만 유학생을 위한 안내부터 샹송, 프랑스회화, 유럽 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를 맛볼 수 있는 곳이어서 수많은 영화학도와 불어, 영어 전공자들이 드나들었었다.

그 당시 내 놀이터는 거의 프랑스 문화원과 세종문화회관 주변이었다. 목요샹송(Chanson Jeudi), 토요일 회화클럽(Voix amis), 르노와르실에서 상영되던 유럽의 감미로운 영화들은 문화적 목마름을 채워주거나 어학 실력을 키우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82년 이브 몽땅의 고엽(Les feuilles mortes)을 시작으로 계속된 샹송 클럽에서 되지도 않는 실력으로 샹송 번역까지 동참해 가면서, 몇몇의 주한 프랑스 인들과 친구가 되어 함께 여행을 하거나 음악회 등을 다니는 일이 잦아졌다.

아시안 게임이 열리고 있던 해인 1986년 4월 5일 부모님은 홍도 여행 중이셨다. 무슨 느낌이 계셨던지 한번도 제지한 적이 없던 큰딸에게 “휴일에 어디 나가지 말고 동생들과 그냥 집에 있으라”고 당부를 하셨지만 이미 약속된 강화도 행을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철도 사업을 위해 서울에 와 있던 띠에리 부부와 건국대에서 불어를 가르치던 마리옹, 프랑스 문화원 직원, 그의 친구 두 명과 나 이렇게 7명이 강화도 여행을 떠났다.

▲ 1986년 4월 5일 사고 직전 강화도에서( 금발 머리가 마리옹, 긴 머리를 땋아 내린 사람이 띠에리 부인)
ⓒ 이명옥

여행은 한없이 즐거웠고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드디어 웃고 떠들며 놀다가 전등사를 가기 위해 외포리에서 배를 타려 기다리던 중 역사적인 그 사건은 터지고야 말았다. 세 명은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고, 네 명은 배를 타기 위한 줄서 있었는데 승선을 알리는 아나운서 멘트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사러 간 일행에게 그냥 돌아오라고 급히 손짓하기 시작했다. 가운데 쯤 서있던 나는 후진을 하던 승용차가 실수로 나의 왼쪽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는 바람에 넘어졌고 내 다리위로 바퀴가 지나가고 말았다.

말로만 듣던 교통사고가 내게 일어난 것이다. 음주자가 운전한 것 같았는데 정신이 없어 확인을 못했고,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처음엔 내가 그냥 넘어졌다고 우기던 가해자들은 증인들과 불어와 영어로 항의하는 나의 일행을 보고 놀랐는지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였다.

원주 세브란스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하고,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후송된 후 돌이켜 보기도 싫은 2년여의 병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간단히 생각했던 나의 사고는 의외로 복잡했다. 초진 16주 진단인 복합 골절인데 특이체질이어서 뼈가 잘 붙지 않아 오랜 병원생활을 했던 것이다.

홍도에 놀러 가셨다가 태풍으로 발이 묶인 채 오시지도 못하고 큰딸의 사고 소식을 접한 아버지는 함께 여행중인 죄 없는 엄마에게 불같이 화를 내셨다고 한다. 내게 대노하셨던 아버지는 한 달이 넘도록 병원 한번 찾지 않으셨고 나중에 마지못해 한번 오셔서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돌아가셨다

아무튼 6인용 정형외과 일반 병실에 이틀이 멀다하고 찾아오는 외국인들과 매일 10여명이 넘는 방문객들로 인해 병원에서 나는 특이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남불 출신인 띠에리 부부는 부모님이 불란서에서 농장을 하고 계셨는데 병원에 프라이팬까지 가져와 뿔레(닭고기 가슴살 요리)를 해주고, 닭 뼈와 양파 등 야채를 넣고 18시간 이상 고아 만들었다는 담백한 국물을 병에 담아 가져오기도 했다.

사진 찍는 것을 즐기던 띠에리는 깁스한 내 다리를 기념이라며 찍기도 하고 깁스에 덕담인지 장난인지 글을 적어 주기도 하였다.

▲ 마리옹이 사다 준 아스테릭스의 모험
ⓒ 이명옥

어느 날 마리옹이 ‘아스테릭스의 모험’이라는 유명한 만화책을 사 가지고 왔다. 프랑스에서는 병원에 있는 친구를 방문할 때 무언가 선물을 사 가지고 가는 것이 예의라고 한다. 그녀가 사온 ‘아스테릭스의 모험’ 시리즈는 프랑스 만화의 고전에 속하는 유명한 만화지만 책을 들춰 본 나는 깜짝 놀랐다. 고어도 있고 웬 글씨는 그리도 빡빡한지….

난 읽지도 않은 그 책을 집에 가져다 놓으라고 동생에게 줘 버렸다. 아뿔싸! 며칠 뒤에 찾아온 마리옹이 내게 “책을 벌써 다 읽었느냐?”고 묻는 것이다. 나는 "아직(Pas encore...)" 이라고 대답한 뒤 동생에게 그 책을 다시 가져오라고 일렀다.

다음날 케이크를 사 가지고 병원에 온 마리옹은 나와 침대에 나란히 앉아 내게 만화책을 펼치게 한 뒤 크게 읽으라고 시키는 것이 아닌가? 큰 소리로 읽으면 “이해되니?(Tu comprends)" 라고 물어본 뒤 ”응(Oui)"이라고 대답하면 다음으로 넘어가고, “아니(non)"라고 대답하면 일일이 설명을 해 주면서 그 책을 다 읽힌 후 또 사다 주고 또 사다 주고….

그렇게 해서 3권의'아스테릭스의 모험"이란 만화책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는 마리옹이 책을 더 사다줄 까봐 얼마나 겁을 먹었던지…. 나중에 마리옹은 내가 지겨워하는 것을 눈치챘던지 가판대에서 파는 주간 여성을 비롯한 한국판 주간지를 있는 대로 사 가지고 오기도 했다.

한국말을 모르는 마리옹은 그 저급한 잡지들이 아마도 프랑스의 렉스프레스나 르몽드, 피가로처럼 평이 괜찮은 잡지인 줄 알았나 보다.

그 후 한국에서 임기를 마친 마리옹이 벨기에에 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살기 바빠 서로 연락이 끊긴 상태지만 그녀의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과 열심히 병원을 찾아와 큰소리로 책을 읽히고 설명해 주던 시절이 마냥 그리워진다.

이제 불어를 손에서 놓은 지 어언 20년이 가까워 쉬운 단어조차 생각나지 않지만 이번을 기회로 다시 불어 공부를 해 봐야 할까보다.

덧붙이는 글 | <당신의 책, 그이야기를 들려 주세요> 공모글입니다.


아스테릭스 라자드 왕국에 가다 - 아스테릭스의 모험

르네 고시니 글, 우데르조 그림, 이승형 옮김, 코스모스출판사(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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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