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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옹 시내에 배치된 대여소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벨로브.
ⓒ 박영신
세계 최초의 영화로 알려진 뤼미에르 형제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은 50초짜리 짧은 영화다. 공장 문이 열리고 하루분의 노동을 마친 노동자들이 귀가하는 모습을 담은 이 영화에서 노동자들은 자전거를 타고 있다. 당시 노동 계급의 이동 수단은 자전거였다.

'자전거 지옥' 파리, '자전거 천국' 리옹

오랫동안 프랑스 노동자들의 발이 돼온 자전거 상표는 '이롱델(hirondelle)'로 제비라는 뜻. 당시에는 '이롱델' 이외에 다른 상표가 없었으므로 이것은 자전거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쓰이기도 했다. '자전거를 탄 순경'을 '이롱델'이라 부를 정도였으니.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파리 외곽의 방리유에 살면서 파리 시내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의 교통수단은 주로 교외선이나 자동차다. 그러나 파리 시내에 사는 행운을 가진 중산층의 경우 집과 일터의 거리가 가까우므로 자전거로 출퇴근이 가능하다. 자전거 이용 계층이 뒤바뀐 것이다.

더욱이 과거의 '이롱델'은 자취를 감춘지 오래, 그 자리에 '가젤'이 들어왔다. 네덜란드산 '가젤'은 전용 정비소가 따로 있을 만큼 고급 자전거로 통한다. 자전거판 라무진이라고 할까. 자전거 하나로 판단된다, 거주지가 파리인지 방리유인지. 상표가 가젤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옛날 노동자의 발이었던 자전거는 이제 부의 척도가 됐다.

그러나 멋드러진 가젤을 갖고도 파리 시내를 누비기는 여러 모로 불편하다. 이렇다할 자전거 전용도로도 없을 뿐더러 거친 파리의 운전자들 사이에 자전거가 끼어드는 것은 일종의 곡예와도 같기 때문이다.

파리시는 자전거와 버스 전용 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막대한 자본을 투입할 계획이나 그 효과에 대해서는 대체로 회의적이다. 최근에는 특히 자전거 불법주차까지 엄격하게 단속하고 있어 자전거 이용자들의 볼멘 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자전거를 탄 시민들의 모습이 점점 늘어가는 도시가 있어 눈길을 끈다. 영화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의 배경이 된 도시, 마르세이유와 함께 프랑스 제 2의 도시를 다투는 리옹이 그 주인공.

리옹시는 시내 뿐만 아니라 인접한 방리유 빌뢰반까지 범위를 넓혀 시민들의 자전거 이용을 권장하고 있다. '자전거를 이용하라'는 구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직접 자전거를 조달하고 시민들에게 거의 무료로 빌려주는 적극적인 정책을 펴고 있다.

일견 돈키호테와도 같은 시립(?) 자전거 정책이 알려지자 일종의 놀이처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시민들은 하나둘 페달을 밟기 시작했고 이제는 생활이 됐다. 시립 자전거의 붉은 라벨은 리옹 시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2~3km의 짧은 거리를 위해 자동차를 운전하는 불편에서 해방된 것. 자전거는 이제 노동자, 중산층의 구별을 떠나 온전히 시민의 것이 됐다. 도시의 풍경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벨로브'의 도시 리옹, '자전거의 수도'를 꿈꾸다

벨로브(Vélo’V)라 부른다, 리옹의 시립 자전거 제도를. 불어로 자전거를 뜻하는 벨로(vélo)와 영어 러브(love)가 만나 탄생한 파생어다. 이른바 '사랑의 자전거', 혹은 '자전거 사랑'!

지난 2004년 5월 19일 리옹시는 세계 최초 '자전거의 수도'를 표방하며 벨로브를 선 보였다.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에서 이미 도입한 바 있는 개념이지만 시범 단계에 있던 것을 대중적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리옹의 예는 한 발 나아간 것이다.

벨로브는 쉽게 말해 리옹시가 운영하는 일종의 자전거 대여소. 벨로브가 시작된 첫 해에는 자전거 1200대에 대여소 120곳을 배치했으나 시민들의 열광적인 호응에 힘입어 5개월후에는 자전거 2000대, 대여소 200곳으로 늘어났다. 올해는 자전거 3000대, 2007년까지 4000대로 점차 늘여갈 계획.

벨로브 이용 방법은 간단하다. 먼저 시민들은 가정에서 300m 근방에 있는 무인 자전거 대여소로 간다. 14세 이상이면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자전거는 신용카드나 벨로브 전용 카드를 이용해 대여할 수 있다. 연회비 5유로를 내고 벨로브 가입자로 등록되면 150 유로의 보증금이 예약된다. 이것은 고장이나 도난 예방책일 뿐 실제 통장에서 인출되지는 않는다.

주로 가입 기간은 1년 단위이나 여행자들을 위해 8일 이용권도 발급하고 있다. 8일 회비는 1유로.

대여소에서 자전거를 골랐다면 이제 자전거를 타면 된다. 첫 30분 이용은 무료, 한 시간은 0.5유로이나 이후 1시간이 추가될 때마다 1유로씩 부과된다. 그러나 리옹시의 조사 결과 벨로브 가입자의 1회 평균 이용시간은 17분, 평균 거리는 2.6km였던 것으로 나타나 거의 무료 대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벨로브로 이동하다 목적지에서 가장 가까운 다른 대여소에 자전거를 주차시키면 벨로브 여행은 끝. 벨로브는 리옹시나 빌뢰반 밖으로 끌고나갈 수 없으며 이용 시간이 24시간을 넘으면 안 된다. 그러나 벨로브가 가진 미약한 제약에 반해 그 효과는 상상을 초월한다.

벨로브는 교통수단을 용이하게 했다는 사실 이외에 시민들의 생활방식을 바꾸고 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일하러, 장보러, 바람쐬러 가기 위해 벨로브를 찾는다. 공공 교통수단이 끝난 늦은 시간에 친구들끼리, 혹은 혼자서 둘이서 밤에 놀러갈 때도 벨로브를 이용하는 것이다.

문화를 변화시켰다고도 할 수 있다. 집단적 개인주의로 불러도 좋을 문화. 시민들은 각자 독립적으로 원하는 목적지와 시간에 따라 벨로브를 이용하지만 이것은 공공 수단이며 또 규칙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라틴 민족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시민의식이 필요한 제도이므로.

전세계로 수출되는 벨로브의 경험

흥미로운 것은 벨로브 작업에 리옹시는 1유로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옥외 광고업체인 JC 데코(JC Decaux)가 자전거 생산·설치비·유지비를 담당하고 있다. 반면 벨로브 작업을 전담한 JC 데코가 가져가는 것은 버스 정류장의 광고판 등 리옹 시내 광고 공간이다.

3년 연구 끝에 탄생한 자전거 벨로브는 브레이크·바퀴·속도·조명등이 디지털화돼 내장된 까닭에 일반 자전거보다 부피가 크고 무겁다. 결함이 있는 자전거는 주차장에서 움직이지 않고 이 사실은 점검부에 자동으로 전달된다. 완력으로 자전거를 끌어내려 하면 경보가 자동으로 작동된다. 때문에 벨로브 도난 사고는 극히 드물다.

벨로브 한대 당 하루 25~30명이 사용하며 전체 1%가 수리에 들어가는데 한 대 당 매년 1000유로가 소요되고 있다. 벨로브 수리비 등의 유지비는 이미 예산에 들어있었으나 시행 과정에서 예측하지 못한 비용이 지출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여소의 위치. 리옹에는 언덕으로 이뤄진 지역이 많다. 그러나 벨로브를 이용해 언덕을 오르는 이용자는 극히 드물다. 속도 조절이 3단계로 한정된 벨로브는 오르막길에 취약하기 때문. 그렇다고 22kg에 달하는 벨로브를 들고 언덕을 오를 수도 없는 형편이다. 결국 대다수의 이용자들이 언덕에 이르면 주변 대여소에 벨로브를 주차하고 걷거나 지하철을 이용하게 된다.

시민들의 이런 습관이 유발하는 문제는 의외로 심각했다. 언덕 바로 아래에 위치한 대여소에는 자전거가 넘쳐 더 이상 주차할 공간이 없는가 하면 다른 대여소에서는 단 한대의 자전거도 발견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용객이 몰리는 출퇴근 시간에도 같은 문제가 발생했다. 마침내 JC 데코는 추가비용을 들여 전용 트럭을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벨로브를 실어 옮겨 골고루 분배할 수 있는.

벨로브가 시민들로부터 열광적인 사랑을 받게 된 지금 리옹시는 다른 고민에 빠졌다. 자전거 이동은 습관이 됐으나 마땅한 자전거 전용도로가 없다는 것. 좀더 효율적인 벨로브 운용을 위해 리옹시는 매년 15km씩 총40km에 달하는 자전거 전용 도로를 확보하기로 했다.

리옹시가 자전거 전용도로 확대에 예산을 할애할 수 있었던 것은 벨로브의 효과와 열광적인 시민의 반응이다. 성공적이라고밖에 평가할 수 없는 리옹의 벨로브는 현재 낭트·바르셀로나·퀘벡·워싱턴·암스테르담 등 세계 대도시가 눈여겨 보고 있는 경험이다. 지난 6월 13일 베르트랑 들라노에 파리 시장은 파리에 벨로브 도입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마르세이유에서는 내년부터 벨로브를 이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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