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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2일자 프랑스의 일간지 <르몽드>는 한 면에서 9일에 있었던 '데바 뒤 몽드'를 소개했다. 맨 왼쪽이 살아있는 부르디외로 통하는 로잔바용 '꼴레주 드 프랑스' 교수며 그 옆이 필자.
죽음의 혈투 앞둔 김득구의 각오로

1982년 11월 라스베가스 시저스 팰리스의 라커룸. 연신 아랫배를 쓸어내리며 고통스러워 하는 김득구의 모습이 보인다. 김득구는 세계권투협회(WBA) 라이트급 챔피언 타이틀전을 앞두고 있다. 상대는 챔피언 레이 맨시니. 영화 <챔피언>(2002, 곽경택)에서 내가 유독 선명하게 기억하는 장면이다. 그날 그 시간, 김득구가 느꼈을 불안과 긴장이 그대로 전해져왔던 까닭이다.

최근 나는 내 나이 보다 정확히 10살이 어린 김득구가 느꼈을 불안을 두 차례 연이어 경험했다. 그리고 매번 김득구를 생각했다. 1982년의 김득구와 내 경험의 차이라면 적어도 내게는 맨시니와 같은 '무시무시한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지난 9일 저녁 8시(현지 시각), 나는 파리 샹젤리제에 자리한 극장 '떼아트르 뒤 롱뽀앙'의 대기실에 있었다. 30분 후에 막을 여는 토론회의 연사 중 한 명으로 초대된 것이다. 토론회는 프랑스의 일간지 <르 몽드>가 분기별로 개최하는 정기 행사로 공식 명칭은 '데바 뒤 몽드'. '데바'는 '토론'을 뜻하는 불어다. '세계의 토론' 혹은 '일간지 <르 몽드>의 토론'이라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정계나 학계의 저명인사들이 한 가지 주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자리로, 3년 전부터 시작된 <르 몽드>의 토론회는 날카로운 <르몽드> 독자들이 관객으로 참여한다. 총 700석의 극장에는 좌석 제한이 있는 까닭에 대체로 광고가 나가는 즉시 매진되는 인기 토론회. 개최 두 달여 전부터 준비되고 토론회 사실을 알리는 광고는 <르 몽드>의 지면을 통해 2주 전부터 나간다.

이번 토론회의 주제는 '사이버 민주주의'였다. 인터넷이 민주주의 발전에 미친 영향과 사례, 폐해, 전망을 점검하는 자리. 특히 내년 대선을 앞둔 프랑스는 지난 2002년과는 달리 2007년 대선은 인터넷 전쟁일 거라고 전망되는 가운데 적합한 주제였다. 이날 나와 함께 초대된 연사는 총 8명이라는 것이 <르 몽드> 재단장인 세르주 마르티가 내게 준 유일한 정보였다. <오마이뉴스>의 통신원으로서 한국의 인터넷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주문과 함께.

"르몽드 광고에서 네 이름 봤어!"

▲ 토론회 2주 전부터 <르몽드>는 지면을 통해 '데바 뒤 몽드' 광고를 내보냈다. 유감스럽게도 필자의 이름이 오기됐다.
주변 친구들이 내게 전화를 걸어댄 것은 지난달 25일의 일이다. 내 이름을 <르 몽드>에서 봤다는 것이다. 내가 <르 몽드>에서 광고를 확인 한 것은 다음 날. 나와 함께 무대에 오를 이들이 누구일까 궁금했던 나는 인쇄된 이름 하나하나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광고에서 제일 먼저 발견한 이름은 다름 아닌 피에르 로잔바용. '꼴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다.

'꼴레주 드 프랑스'는 프랑스 최고 권위의 교육기관으로 베르그송, 부르디외, 레비스트로스들이 강의한 바 있다. 더욱이 로잔바용은 현재 프랑스 최고의 지성이며 살아있는 부르디외로 통하는 인물이다. 솔직히 말해 로잔바용의 이름을 발견한 순간 나는 주눅이 잔뜩 들어버렸다. 무대에 올라 준비한 내용만 말하면 되리라 단순하게 생각했던 내가 아니었던가. 그것을 로잔바용이 들을 거라 생각하니 불안해졌다. 망신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던 것이다.

로잔바용 이외에 내년에 치러질 프랑스 대선의 강력한 두 후보 즉 집권당인 대중운동연합(UMP)의 니콜라 사르코지 현 프랑스 내무장관과 제 1야당인 사회당(PS)의 유력 후보 세골렌 루아얄 측 미디어 담당자들의 이름이 보인다. 그 뒤로 지난 '유럽헌법' 국민투표를 앞두고 자신의 블로그를 이용해 강력하게 반대 운동을 펼쳐 스타가 된 마르세이유 대학의 교수 에티엔 슈아르, <르 몽드> 인터넷판 책임자인 브뤼노 파티노의 이름도 들어있었다.

토론회 당일인 9일, 대기실에서 그날 발제를 맡은 이들과 인사를 주고받은 나는 대기실 옆으로 통하는 무대를 힐끔 들여다본다. 한숨이 새나왔다. 기대했던 것보다 무대는 '너무' 컸다. 잠시 후 '저 무대'에 오를 내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울만큼 위압적이었다. 바로 이 순간이었다. 내가 김득구의 1982년을 떠올린 것은. 다리에 힘이 빠진다고 생각했을 때 느닷없이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토론회 10분 전이었다. 대기실의 연사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극장 관리인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대피'하라고 말한다.

로비로 나온 나는 극장 입구에 구름처럼 몰려있는 사람들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관객으로 극장을 찾았으나 경보때문에 피신한 이들이었다. 관객들은 대체로 40~50대의 중년들. 내심 바랐다. 비상사태가 일어나 이번 토론회가 취소되거나 연기되기를.

"시민기자가 몇 명이죠?" - "기껏해야 4만일걸요"

"총 시민기자들이 몇 명이지요 ?"
극장 앞에 몰려있는 관객들에 눈길을 주고있던 내게 누군가 이렇게 물었다. 대기실에서 잠시 인사한 일이 있는 <르몽드> 편집장, 제라르 꾸르투아였다.
"<르 몽드> 소속 기자들보다 그리 많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기껏해야 4만이 조금 넘는걸요."
묘한 일이지만 내 입에서 이런 농담이 나왔다. 물론 하려고 했던 말은 아니었다. 꾸르투아는 기가막히다는 표정으로 웃었고 나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결국 경보기 고장이었다. 관객들은 하나둘 극장 안으로 입장했고 연사들은 다시 대기실로 돌아가야 했다. 이번에는 무대 쪽을 보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만 했다. 연사들이 차례대로 무대에 오른다. 꾸르투아와 함께 진행을 맡은 세르주 마르티가 내게 로잔바용 옆자리를 권한다. 극장의 모든 조명은 무대로 집중돼 관객석은 어두웠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여론조사기관 'TNS소프레스' 회장을 시작으로 토론회는 시작됐다. 관객석에서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재밌는 것은 두 대선 후보측 연사들이 말하는 방식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와 닮은 말투를 구사했다. 사회당의 뱅쌍 펠테스는 단호하지만 설득력이 있었고 대중운동연합의 티에리 솔레르는 독단적이었고 장황했다. 설핏 웃음을 흘리는 내 어깨를 두드린 것은 옆자리의 로잔바용이었다.
"프랑스식 토론이지요. 말이 참 많다는 것 !"
그때 <오마이뉴스>라는 말이 들렸다. 마이크를 잡은 마르티는 <오마이뉴스>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 뒤 말했다.
"우리의 한국 친구, 마드모아젤 박을 소개합니다."

▲ 지난 9일 <르 몽드> 토론회가 열린 '떼아트르 뒤 롱뽀앙' 입구.
ⓒ 박영신
"우리의 한국 친구, 마드모아젤 박을 소개합니다"

인사를 한 나는 바로 내 앞에 마이크를 잡았던 솔레르 쪽을 보며 말했다.
"대기실에서 꾸르투아 편집장은 말을 짧게 해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세 쪽에 달하는 내 연설문을 쓰레기통에 버렸지요. 그러나 솔레르씨의 경우를 보니 그게 실수였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내 마음도 차분해졌다. 그리고 나는 한국의 정치 상황을 요약한 뒤 한국의 인터넷 인구와 그 역할, 배경을 설명했다. <오마이뉴스>가 우리 언론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시민기자들의 활동과 사례까지 설명을 마쳤다.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앞선 연사들이 마이크를 놓을 때는 들리지 않았던. 물론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오마이뉴스>를 향한 박수였다.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잡은 로잔바용은 연거푸 "놀랍다"고 말했다. "믿기 어렵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오마이뉴스>의 사례는 초현실적"이라고도 했다.

총 2시간에 걸친 토론회는 그렇게 끝났다. 극장 지하에서 칵테일 파티가 열렸고 연사들은 토론회에서 다 못한 대화를 이어가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는 샴페인을 한 잔 마신 뒤 가볍게 인사를 하고 극장을 빠져나왔다. 물론 아쉬움은 남았지만 내 역할을 했다는데 만족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빨리 토론회 사실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토론회에 대한 긴장으로 잠을 제대로 못잤던 까닭에 푹 자고싶다는 생각만 했다.

이튿날 오후부터 걸려오는 전화들

▲ 프랑스의 불어권 공영 위성 TV 채널 <테베5몽드(TV5Monde)>의 간판 프로그램 <키오스크>의 패널 명단에 <오마이뉴스>가 올랐다.
이튿날 오후쯤이었다, <르 몽드>의 마르티가 내게 전화를 한 것은. 마르티는 말했다. '어제' 칵테일 파티에서 나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특히 로잔바용은 <오마이뉴스>가 궁금해서 몸살이 날 정도였다며 내가 좀더 그들과 오래 머물지 않아 유감이었다고도 했다. 그리고 마르티는 이렇게 묻는다.
"오늘 아침 라디오 <프랑스 엥떼르>를 들었지요?"
못 들었다고 대답했다. <프랑스 엥떼르>가 <오마이뉴스>의 사례를 방송했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기억난다. 토론회가 열리기 전 마르티가 내게 전화를 한 일이 있다. <프랑스 엥떼르>에서 나를 인터뷰 하고 싶어한다는 요지였다. 생각할 것도 없이 나는 거절했다. 라디오를 통해 내 목소리가 나갈 것이라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었던 까닭이다. 물론 한국의 라디오 방송을 여러차례 하긴 했으나 한국 방송은 내가 들을 수 없기때문에 가능했다. 프랑스의 라디오는 다른 문제였다. 내가 현재 살고있는 땅에서 내 목소리가 방송될 거라는 생각은 내게 악몽이었던 것이다. 토론회까지 마친 후에는 방송을 거절했던 것이 후회가 되긴 했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

그리고 다시 걸려온 전화. 이번에는 친절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프랑스의 불어권 공영 위성 TV 채널 <테베5몽드(TV5Monde)>가 발신지였다. 자신을 국제 정보 프로그램 <키오스크(Kiosque)>의 책임자 실비 브레방이라고 소개한 여자는 '어제' 토론회를 관심있게 봤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를 <키오스크>의 패널로 초대하고 싶다는 것이다. 기뻤을까. 난감했다. 평소 대중공포증이 있는 내게 <르 몽드>의 토론회도 악몽이었는데 이번에는 텔레비전이라니. 지금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니 내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나는 불행하게도 TV를 보지 않는다. <프랑스 2텔레비전>의 8시 저녁뉴스 시간을 제외하면 TV 앞에 앉는 일이 없다. <키오스크>라는 프로그램을 본 일은 당연히 없다. '신문 가판대'라는 뜻을 가진 <키오스크>는 이름 그대로 한 주간 세계의 시선을 집중시킨 사건들을 중심으로 파리에 체류하는 해외 기자들이 패널로 참여하는 정보프로그램이다. 1995년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는 간판 프로그램. 특히 진행자인 필립 드생은 <테베5몽드>의 뉴스국장으로 이전에는 프랑스의 지상파 공영 TV 채널 <프랑스 3텔레비전>의 저녁뉴스를 진행한 바 있는 스타급 진행자. 이같은 사실은 브레방이 보내준 프로그램 사이트를 보고 나서야 알게됐다.

TV에 나오라고?... 그래 한번 해보자

이어진 11일 나는 브레방에게 전화를 걸어 "한 번 해보자"고 말했다. "기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키오스크>에 왜 내가 필요했는지 그 이유를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지난 9일 전세계를 충격에 빠트린 북한의 핵실험과 UN 사무총장에 당선된 반기문 장관, 바로 이것이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한국 주간이었던 것이다. 브레방도 내게 반기문 장관과 북핵 실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북핵과 반기문 장관에 관해 모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모았고 읽었고 정리했다. 13일에는 프로그램 담당 PD가 집으로 들이닥쳐 내가 '일 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갔다. 방송 초반에 패널 소개가 나가기때문에 자료화면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내가 <테베5몽드>에 도착한 것은 지난 15일 오후 2시. 대기실에는 나와 함께 <키오스크>의 무대에 오를 패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악셀 크라우스(트랜스아틀랜틱 매거진, 미국), 요아브 토커(이스라엘 텔레비전 채널10, 이스라엘), 알베르토 토스카노(파노라마, 이탈리아)가 그들이다. 토스카노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술집에서 친구들이랑 농담한다고 생각하면 돼."
토스카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1995년 프로그램이 생길 때 합류한 패널들은 그만큼 여유롭게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풀어갔다.

북핵과 관련된 자료화면이 나가고 드생은 내게 한국의 반응을 물었다. 나는 준비한 자료를 인용하며 설명한다. 진행은 빨랐다. 반기문 장관 이야기로 주제가 바뀌고 다시 내 차례가 됐다. 간단하게 반 장관을 설명하는 동안 토스카노가 농담을 던진다.
"반 장관이 혹시 네 아버지 아니니?"
설명에 몰두하고 있던 나는 토스카노를 돌아보며 댓구했다.
"그랬다면 얼마나 좋겠니."
오전에 반 장관의 인터뷰를 봤다는 미국인 기자 크라우스는 반 장관의 별명 '기름장어'에 대한 질문을 했다. 난처한 질문에도 요령있게 빠져나갈 줄 아는 반 장관의 노련함에서 생긴 별명이었다. 대체로 반 장관의 긍정적인 이미지와 기대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 <오마이뉴스> 와 필자를 소개하고 있는 <키오스크> 홈페이지.
"반 장관이 네 아버지 아니니?"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내가 예상치 못한 주제들로 넘어간 것. 브레방은 내게 이 사실을 알려준 일이 없다. 일요일에 방송되는 <키오스크>는 인터넷으로 다시 볼 수도 없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이전 방송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내게는 참으로 가혹한 사태였다. 생방송이다 보니 중간에 항의를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상식에 기대는 수밖에.

올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방글라데시의 빈곤퇴치 운동가 모하마드 유누스와 그가 창설한 빈민대출 은행인 그라민 은행, 피살된 러시아 기자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 건이 지나가고 현재 프랑스와 터키 관계를 얼어붙게 하는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이 주제로 떠올랐다. 프랑스 하원은 지난 12일 사회당의 주도로 1915~1919년 사이 발생한 오스만투르크의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이 '민족 말살(genocide)'임을 부인하는 행위를 범죄로 규정한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법안 통과의 잘잘못을 떠나 이날 이야기는 '과거사 부정'으로 넘어갔다. 크라우스가 말했던 것이다.
"과거사 부정이라는 말을 쓰지만 전세계에 그런 일은 딱히 찾아보기 어렵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말했다.
"정말 미안하지만 크라우스씨, 아시아에서는 너무도 흔한 일이 과거사 부정 사례입니다."
그리고 한국과 중국에서 벌어진 일본의 만행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고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의 노리개로 전락한 '성노예 피해자들'이 버젓이 살아있으나 일본은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였다. 프랑스인들에게는 익숙치 않은 '성노예 피해자'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오자 드생은 재차 질문했다.
"성노예 피해자는 강요된 것이었지요?"
내 발언이 '민족주의'에 대한 경계가 유별난 프랑스에서 '민족주의' 옹호로 받아들여진 것 같지는 않다. 함께 자리한 패널들은 새로운 사실을 안 것처럼 내게 집중하는 반응을 보여줬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주제였던 '프랑스 사형제 폐지 25주년' 건은 내가 평소에 관심을 갖고 있던 일이었다. 지난 1981년 10월 9일 프랑스에서는 사형제도가 폐지됐으나 우리에게는 진행형이 아닌가. 나는 한국에서 사형제가 정치적으로 이용된 사례를 설명하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정권을 이양하는 과정에서 1997년 마지막으로 사형이 집행된 한국은 관례상 잠재적으로 사형제 폐지국에 속한다고 설명했다. 사형 집행이 이뤄지지 않고 7년 이상을 넘겼기때문이다. 여론은 여전히 사형제 유지를 옹호하는 쪽이 우세하나 지난달 중순 개봉된 사형제를 다룬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송해성)이 관객 동원 3백만을 넘으면서 영화를 보는 이들의 생각을 바꾸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소식이라고도 말했다.

긴박하게 진행된 방송도 그렇게 끝이 났다. 컷 사인이 떨어지자 패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친절한 박수를 보냈다. 첫 방송이었는데 "참 잘했다"고 격려해줬다. 설마 '참 잘하기'까지야 했을까 마는 토론회와 마찬가지로 '내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다음날 재방송된 해당 프로그램을 내 눈으로 볼 자신은 없었다. 때문에 내가 한 방송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입장이 못 된다.

다음날 브레방은 내게 전화를 걸어 방송이 '매우 만족'스러웠다며 앞으로도 계속 프로그램과 함께 해줄 것을 부탁했다. 각국의 패널이 다양하니 한 달에 한 번꼴로 차례가 돌아올 거란다. 이 글을 쓰며 자료 사진을 찾기 위해 해당 사이트를 둘러봤다. 패널 명단에 <오마이뉴스>의 로고와 함께 내 이름이 보였다. 아시아 언론은 중국의 <차이나 유스 데일리>와 인도의 <더 힌두> 그리고 <오마이뉴스>까지 단 셋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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