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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는 오름의 섬이다. 한라산은 수없이 많은 오름을 이어붙인 덩어리일지도 모른다. 오름은 넉넉한 자락을 펼쳐 사람을 담고 역사를 담는다. 360여개나 되는 오름 대부분이 큰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는 트레킹코스로 각광을 받는 요즈음 제주에서 가장 많은 동아리는 오름과 관련된 것일 듯하다.

오름은 오르다의 명사형이란 설도 있고 몽골어 오르무(산)에서 비롯됐다고도 하는데 후자가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오름은 순우리말 이름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아 언어의 보고(寶庫)라고 하는 제주에 남은 훈민정음의 기세를 보여준다. 새별오름(신성악) 성널오름(성판악) 돔박이오름, 영아리오름, 물찻오름, 윗세오름, 사라오름, 거친오름, 큰오름, 큰드레오름, 물장올, 쌀쏜장올, 불칸디오름...

한라산 기슭의 오름들 ⓒ윤영국

오름중에 정상까지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오름이라면 아마도 아부오름이 아닐까? 송당마을의 앞에 있다고 해서 앞오름이라고도 불리는데 아부오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평평하게 펼쳐진 넉넉한 모습이 아버지를 닮았다 해서 버금아(亞)에 아비부(父)를 써서 아부오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럴듯한 설명이지만 오름에 순 우리말이 많은 것으로 보아 아버지를 닮았다면 아방오름으로 불렸을 것이므로 그보다는 앞오름의 발음상의 변화로, 앞오름이 아포름으로 발음되지 않고 압오름, 아보름 등으로 발음 되면서 변하였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아부오름은 제주시내에서 차로 30~40분 정도 떨어져 있는데 97번 국도에서 1112번 도로로 바꿔 타고 동쪽으로 가다가 첫 번째 큰 삼거리에서 우회전해서 조금 갔을 때, 왼쪽으로 보이는 오름이다. 구릉처럼 보이지 않고 높이로 살짝 돋은 평지처럼 보인다. 도너츠를 뉘어놓고 옆에서 본 모양이랄까? 해발높이는 301m인데 차가 닿는 곳이 이미 250m에 달해 실제 등산고도로는 50m밖에 안 된다.

입구에 철망이 쳐있어 옹색한 자세가 불가피하다. ⓒ리향만당


오름 주위는 개인의 목장이라 울타리가 둘러쳐 있어 몸을 숙여 들어가야 한다. 수많은 한우떼들이 몰려다니기도 하는데 소들이 사람을 공격하거나 목자들이 출입을 금지하는 경우는 못 보았다. 다만 사람들이 안 오길 바라는 것 같기는 하다. 사람들이 많이 오면 완전히 폐쇄를 하거나 그보다 더 많이 오면 차라리 활짝 열어 관광지화 할지도 모를 일이다.

공식적으로 열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닫지도 않은 주인의 마음이야 말로 제주인다운 소심과 달관이 담겨져 있는 듯하다. 등산로라기보다는 사람 발길 따라 만들어진 길 같다. 차로는 50m라지만 걷기로는 300m쯤 가면 정상에 다다른다.

아부오름 분화구는 주화산인 백록담 보다도 큰 분화구이다. ⓒ윤영국


오름 내·외벽에는 약간의 소나무와 심어져 있고 상수리 보리수나무도 드문드문 보인다. 분화구 기저에는 삼나무가 원형으로 조림되어 자라고 있다. 잔디와 초본류들이 있고 봄에는 개민들레가 제법 아름답게 피어난다.

오름 정상에 서면 둘레약 1.8km되는 분화구의 외륜이 흡사 거대한 원형경기장처럼 펼쳐지고 탁 트인 시원한 전망이 일품이다. 겨우 5분 남짓 올라 이런 절경을 감상한다는 것은 일종의 횡재일 것이다.

한 10년쯤 전에 '이재수의 난'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이 분화구 한가운데의 삼나무 울타리 안에 영화세트장을 만들어 '이재수의 난'이란 영화를 찍기도 하였다.

제주의 근대사에 관한 내용에 제주에서 촬영을 했기에 기사들과 단체로 관람을 했는데 주인공으로 분한 이정재의 서투른 제주사투리 때문이었는지 감독(박광수)이 제주사람이 아니어서 제주적인 미묘한 정서가 덜 담겼는지 몰입이 잘 안되었던 영화로 기억이 된다. 아 그보다는 배경화면과 등장인물의 대사를 놓고 저긴 어디고 저 사투린 뭐가 틀렸고 하며 관객보다는 심사위원적 입장에서 봐서 그랬을 수도 있다.

이재수의 난은 1901년 왕조말의 혼란상에 하향식으로 전파된 천주교의 폐해가 겹쳐 일어난 민란이었다. 대원군시기까지 박해를 받던 서학(西學)이었던 천주교는 1896년 공인된 후 프랑스의 위세를 업고 교세를 확장했는데 프랑스인 성직자에게 국왕이 '나(왕)를 대하듯 하라(如我待)'는 징표를 주어 치외법권적인 특권이 부여되었고 교인들까지 위세를 떨치게 되어 제주에 소개된 지 불과 1~2년 사이에 1500여명으로 신자가 불어났다.

마침 대한제국을 선포한데다 왕조말기의 부패까지 겹쳐 과도한 세금이 부과되고 세금징수를 위한 관리(봉세관)가 제주에까지 파견되었다. 국세징수를 본토에서 파견된 봉세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마침 천주교도가 그 역할을 맡게 되어 제주도의 토착세력과 마찰을 빚게 되었다.

서세(西勢)가 동점(東占)한 시기라 양인선교사를 등에 업고 봉세관과 결탁한 천주교도들의 발호에 맞서 제주의 서남쪽 끝 마을인 대정에서 시작된 것이 이재수의 난이다. 조선시대 귀양을 온 사람은 주로 대정에 안치되었는데 그 여파인지 대부분의 민란에서 대정읍이 시발지가 된다.

사실 이재수가 처음부터 난의 주동이었던 건 아니다. 5월에 시작된 란은 처음에는 난이 아니라 진정서제출 정도에서 시작되었다가 관(혹은 천주교측)의 과잉대응으로 무장봉기로 치닫게 되면서 관노출신인 이재수가 지도자가 된다. 처음엔 외래 세력과 토착세력과의 마찰에서 시작 되었을 것이나 정작 유혈화 하면서 빠질 사람은 빠지고 민중봉기의 계급적 성격으로 되어갔을 것이다.

지금은 천주교의 성지가 된 황사평을 휩쓸고 제주읍성까지 접수하여 천주교도를 처형하지만 결국 프랑스 군함과 육지에서 관군이 파견되어 10월초에 진압되고 이재수는 참수된다.

오늘날 아부오름의 한라산너머 정반대인 대정에서 군중을 이끌고 제주까지 점령했던 이재수에 관한 아무런 추모도 표식도 없다. 그는 살아생전 이곳엔 와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다만 그를 소재로 한 영화의 세트장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오늘 그를 기려본다.

고려중엽의 천민이었던 망이 망소이의 난은 어찌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분해방을 외친 첫 사례일지 모르지만 그 두령이 천민이어서인지 역사적 조명을 못 받는 듯하다. 이재수의 난 역시 볼셰비키의 시간을 앞지르는 계급혁명일수도, 전봉준의 제주판 일수도 있는데 아무런 기념이 없는 것은 천민출신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국민 99%가 양반인 마당에, 전부터 양반이었대도 철종 때 간신히 양반떨거지 된 주제에, 갑오경장 때 겨우 성을 만든 사람들 일지도 모르는 주제에 천민하면 왠지 고개를 숙이고 싶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세계평화의 섬, 제주엔 역사가 모조리 슬프다. 소변금지라고 써 놓은 곳이 소변보기 딱 알맞은 것처럼 평화로워서 평화의 섬이 아니라 평화롭고 싶어서 평화의 섬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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