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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서 찍은 안도의 모습으로 한반도를 닮았다.
ⓒ 오문수
지난 4일 여수역사연구회 회원 20여명, 고려대 사학과에 재직중인 송완범 교수와 함께 여수에서 여객선을 타고 1시간 40뿐쯤 걸리는 면적 3.96㎢의 자그마한 섬 안도(雁島/安島)로 문화 답사를 떠났다. 단지 잊혀져 가는 섬 문화를 발굴하기 위해 찾았으나 정작 안도에서 찾아낸 것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안도는 동쪽에는 동도인 동고지(東古地: 고지는 곳이라는 의미)와 서도인 서고지(西古地) 2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두 섬 사이에는 너비 200m 가량의 좁은 수로가 뻗어있어 하늘에서 바라보면 한반도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수로의 남쪽 끝에 발달한 사주에 의하여 두 섬이 연결되어 있다.

▲ 소치던 소년이 주워 소나무에 칼던지기 하다 가운데가 부러진 신석기시대의 돌칼
ⓒ 오문수
근해에는 멸치, 갈치, 방어, 쥐치, 민어, 도미 등의 어장으로 알려졌으며, 김, 미역 등 해조류의 산지이다. 북동쪽에 있는 만(灣)은 먼 남쪽으로부터 밀려오는 오염되지 않고 깨끗한 맑은 바다와 하얀모래가 잘 어우러져, 어느 곳보다 청정한 해수욕장을 자랑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인근의 다른 섬들과는 달리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어 신석기 시대의 유물인 패총과 돌칼, 빗살무늬토기 등이 여러 점 발굴되었다.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여 신라와 일본의 당(唐)나라 무역의 중간 기착지가 되기도 했다. 기록으로는 9세기 중엽 당나라를 순례한 일본 천태종의 3대 좌주 자각대사 엔닌(圓仁:794~864)의 일기체 기록인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안도에 머물고 간 이야기를 남겼다.

호랑이가 기러기를 잡아먹는 형상...끊임없이 이어졌던 비극

▲ 감기에 좋다는 약초인 황금초 밭은 패총으로 빗살무늬 토기들이 발견되었다.
ⓒ 오문수
이 섬의 바로 앞 금오도에는 망산(344m)이 있다. 안도와 금오도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면 호랑이가 앉아서 앞에 있는 기러기를 잡아먹으려는 형상을 하고 있어 안도에 우환이 끊이지 않는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안도의 역사를 보면 1860년 '무신 대화재' 때는, 일설에는 300여호라고 하나 기록상으로는 100여호 중 한 채만 남기고 모든 집이 불탔다. 또한 1959년 태풍 사라호가 상륙했을 때는 마을의 절반이 물에 휩쓸려 가버리기도 했다.

이 뿐 아니라 답사 당시 만났던 나이 지긋한 주민들은 해방이후 여순사건 발생시 일어났던 주민학살사건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증언했다. 진압군에 의해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은 여수지역사회연구소(소장 김병호)가 지난 1999년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채록해 발간한 자료집에서 상세하게 나와있다.

해방이후 정세는 불안했고 빈부의 격차는 심해졌다. 그 와중에 여순 사건이 일어났고, 여순 사건의 후폭풍은 안도까지 밀려왔다.

자료집에 따르면 당시 백두산 호랑이로 유명했던 김종원 대위를 비롯한 진압군 5연대 병력이 해군의 함포 엄호 사격을 받으며 안도에 상륙했다.

진압군은 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시킨 후 노인, 어린이, 여자, 청년 등으로 분류한 다음 좌익분자들을 찾아내라며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진압군은 제일 먼저 한종일(당시 24세)을 좌인분자로 지목했다. 한씨는 "아무 죄도 없고 일본 군대까지 끌려갔다온 내가 왜 죽냐"며 안심하고 나갔으나 현장에서 사살당했다.

한편 초등학교 교사였던 이종섭과 김기정은 우체국 옆에서 사살 당했는데 이종섭은 좌익사상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40여명을 결박하여 선착장으로 끌고 간 진압군은 그들 중 11명을 그 자리에서 처형했다.

여순 사건 당시 좌익분자로 몰린 주민들 총살당해

▲ 바로 건너편에 보이는 산이 금오도에 있는 망산으로 호랑이 형상이다.
ⓒ 오문수
그렇게 여순사건의 후유증이 가라앉기도 전인 1950년 7월 21일경 안도에는 미군 전투기에 의한 또 다른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의 당사자인 이대혁(72세, 부산 거주. 당시 15세)와 이대혁씨의 동생인 이춘송씨(당시 12세)의 이야기는 상당히 구체적이다.

해방 후 북한에서 월남하여 서울 마포구 염리동 피난민 촌에 살던 이대혁씨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했다. 부산에 도착한 이대혁씨 가족은 부산시 진구 성남국민학교에 집결하여 일주일간 머물다가 같이 수용되어 있던 350여명의 피난민들과 함께 부산 연안부두에 집결했다.

그들은 여객선을 타고 부산 연안부두를 출발해 피난을 떠났다. 이들은 경남 충무의 충무초등학교에 잠시 집결 수용되었다가 보다 안전한 곳을 찾아 항해하던 중 안도의 이야포 해안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피난길은 이곳에서 참혹한 결말을 맺게 된다.

이춘송씨는 당시 있었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래 내용은 이춘송씨의 증언 내용을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발간한 증언자료집을 바탕으로 옮긴 것이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 3일(음력 6월 21일), 날씨는 맑고 쾌청했다. 나는 당시 12살이었고, 형은 15살이었다. 주민들이 지어준 주먹밥을 먹고 난 직후 오전 9시쯤이었다.

이때 어디선가 비행기 소리가 들려왔다. 호기심 많던 나는 재빨리 배 앞쪽을 보았다. 쌕쌕이 비행기 일개 편대(4대)가 오고 있었다. 신기해서 바라보니 처음 총 두발을 발사 한 후 연속 배를 돌면서 폭격을 가했다. 배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 기러기를 닮은 안도의 안내도
ⓒ 오문수
믿었던 비행기가 우리를 향해 총을 쏠 줄이야. 나는 배 물통 뒤에 숨어서 사격 현장을 보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오른쪽 왼쪽 할 것 없이 한쪽에서 7∼8명씩 배 안팎에서 쓰러져 갔다. 미군 제트기가 돌아와 도망가는 배에까지 사격을 가했다. 총알이 배에 맞지 않고 물에 맞으면 탄흔이 물보라처럼 분수대같이 튀어 올라 나의 옷을 흠뻑 적셨다. 주위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신음과 아우성은 하늘을 찔렀다.

선장실 위에도 많은 사람이 쓰러지고 17∼18세 되는 청년 한 사람은 양쪽 엉덩이 살이 다 떨어져 무의식적으로 계단을 잡고 내려오고 있었고, 물통 뒤에 있던 나에게는 죽은 사람들의 피가 흘렀다. 피가 뜨거워 처음에는 누가 오줌 누는 줄로 착각을 하였다. 그리고 내 앞에는 나에게 약을 준 고마운 부인이 팔과 볼에 총을 맞고 배 난간에 기대어 수건으로 피를 봉하고 있었고, 배 안에는 미처 올라오지 못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어느 부인이 죽은 그 위에는 애처롭게 젖을 물고 있는 어린아이도 있었다.

우리는 육지로 올라와서 재빨리 수수밭의 동쪽으로 숨어 살펴보니, 사람들은 산속으로 숨고 없었다. 형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으러 자갈밭을 달려 나갔다가 잠시 후 울면서 돌아왔다. 재빨리 자갈밭에 나가보니 어머니는 입에서 거품을 물고 돌아가셨고, 동생은 어느 집 뒤 나무단 위에 상반신이 시퍼렇게 되어 죽어 있었다. 나는 동생을 안아 어머니 옆에 고이 뉘이고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모르고 몇 시간이나 맨발로 산 속을 헤매며 아버지를 찾았다."


미 전투기 오폭...350여명의 피난민 중 150여명 사망

▲ 사라호 태풍 때 마을의 절반이 유실되자 인공 제방을 쌓았다. 제방너머 보이는 바다가 이야포.
ⓒ 오문수
미 전투기의 오폭으로 350여명 중 150여명이 죽자 매장할 곳을 찾지 못한 군경은 시체를 배에 다시 실어 기름을 붓고 태워버렸다. 결국 이야포의 비극으로 부모님과 막내 동생을 잃은 삼남매(이대혁,이춘송 형제와 누나)가 살아남아 부산으로 돌아왔으나 누나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 인민군 6사단 주력은 순천을 거쳐 광양, 하동방면으로 낙동강 전선에 배치되었으며, 6사단 중 일부 병력이 여수지역 점령을 위해 남하하였으나 섬 지역까지는 진출하지 못했다.

피난민들에게 사격을 가한 비행기는 동경 맥아더 사령부에서 출격한 미공군 제25전투비행단 F80 슈팅스타기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미공군은 인민군이 섬에 진출하는 것으로 생각해 피난민이 타고 있던 여객선을 오폭한 것으로 보인다.

▲ 1950년 한국전쟁 당시 350명의 피난민을 태운 여객선이 안도 이야포에서 오폭을 당해 150여명이 사망했다.
ⓒ 오진영
안도는 반세기 전의 비극을 여전히 안고 있다. 그래서일까?

주민들은 기러기 안(雁)자 대신 평안할 안(安)자를 써서 안도(安島)라 다시 이름 붙였다. 평화로운 삶을 바라는 주민들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원해본다.

덧붙이는 글 | 남해안신문에도 기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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