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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 신촌마을에 있는 '양심가게'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위 사진은 양심가게 안 모습이다. 아래 사진은 돈통(금고) 위에 놓인 거스름돈통과 외상장부.
ⓒ 이돈삼
구멍가게에 주인이 따로 없다. 소주든, 라면이든 필요한 물건을 골라 알아서 돈 내고 가면 된다. 나무로 짠 상자 하나가 금고 역할을 하고, 그 옆엔 잔돈을 100원짜리와 500원짜리로 나눠 비누상자에 담아 놓았다. 물건을 살 사람이 알아서 사고 양심껏 돈을 내고 가라는 것이다.

공책 한 권과 볼펜 한 자루도 놓여있다. 외상을 해야 한다면 알아서 적고 물건을 가져가라는 외상 장부다. 외상을 달아놓은 것은 다음에 돈이 생겼을 때 갚고 나서 줄로 그어버리면 된다. 한글을 모르는 노인은 그냥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갚아도 된다.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에서 백양사 방면으로 국도1호선을 따라가다 오른쪽으로 만나는 북하면 단전리 신촌마을에 있는 가게의 모습이다. 따로 주인이 없기 때문에 알아서 물건을 가져가고 양심껏 돈을 넣고 가는 '양심가게'인 셈이다.

▲ 주인이 없는 '양심가게' 전경. 벌써 1년 6개월째 운영하고 있다.
ⓒ 이돈삼
이 가게가 요즘 시끌벅적하다. 여기저기서 수시로 구경 오는 사람들 때문이다. 유치원생에서부터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까지 견학을 온다. 주말과 휴일엔 서울에서, 경상도에서 아이들을 앞세운 젊은 부모들도 찾아온다. 이보다 더 나은 현장학습이 없다는 이유다. 하긴 요즘 세상에 주인 없는 가게라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다.

이 마을에 무인 양심가게가 들어선 것은 지난해 봄. 마을회관 한켠에 있던 조그마한 구멍가게가 문을 닫으면서다. 가게주인은 더 이상 가게를 운영할 수 없다며 서울로 떠버렸다.

하나밖에 없던 가게가 문을 닫자 당장 불편한 것은 마을주민들. 자잘한 생필품을 살 수가 없으니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소주 한 병만 살려고 해도 마을 밖까지 나가서 사오든지, 아니면 광주시내를 자주 드나드는 마을이장한테 부탁을 해야 했다. 말할 수 없이 번거로웠다.

그런데도 가게를 인수해서 해보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시골에서 농사일도 많은데 이문이 크지 않는 가게를 붙잡고 있기란 말처럼 쉬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 '양심가게' 운영을 처음 제안했던 박충렬 이장.
ⓒ 이돈삼
“한두 번도 아니고 솔직히 번거로웠습니다. 매번 소주 두 병 사다 달라, 간장 사다 달라, 라면 몇 봉지 사다 달라…. 그래서 무인가게를 생각해냈죠.”

마을이장 박충렬(46)씨의 말이다.

박씨는 처음에 마을기금으로 가게를 차리고 주인 없이 자발적으로 운영하자고 제안했단다. 이에 대한 동네사람들의 반응은 ‘말도 안된다’였다. 하지만 노인들에게 가게 앞에 모여서 소주 한잔 마시는 즐거움을 주고,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가게는 하나 있어야겠다 싶어 고민은 계속됐다.

박씨는 장고 끝에 개인돈 500만원을 들여 가게 문을 열기로 했다. 실패하면 그냥 손해본 셈 치자는 생각이었다. 마을사람들도 한번 해보자고 했다.

이렇게 해서 가게 문을 다시 연 게 지난해 5월. 가게 안을 청소하고 과자, 술, 음료수, 간장, 세제, 화장지 등 생활필수품을 골고루 들여놓았다. 소주 1300원, 맥주 1300원, 간장 3000원…. 노인들이 알아보기 쉽게 가격표도 큼지막하게 써 붙였다. 돈을 담을 통은 나무로 짜서 만들었다. 거스름돈은 비누상자에 따로 담았다. 외상장부로 쓸 수 있도록 공책과 볼펜도 달아놓았다.

ⓒ 이돈삼

ⓒ 이돈삼
당초 우려는 괜한 걱정이었다. 문제가 생기기는커녕 장사가 주인이 있을 때보다 더 잘 됐다. 최만례(74) 할머니는 처음 물건을 살 때 여간 마음이 불편한 게 아니었다고 했다.

“어쩌께 혀야 헐지 모르겄더라고. 나는 지대로 계산허고 돈을 넣었는디, 행여 넘이 오해할까봐 걱정되드랑께.”

하여 물건을 사가지고 나오다가 사람을 만나면 “나 물건값 냈소”하고 확인을 받아야 마음이 편했다고. 조찬익(60)씨는 “밤새 문을 잠그지 않응께 요것이 바로 24시간 편의점이여”라고 했다.

외상장부를 떠들어보니 마을사람들의 생활상이 환히 드러난다. 삐뚤삐뚤 적힌 글씨들을 읽어보면 누가 소주를 즐기는지, 누가 과자를 좋아하는지 다 나타났다. 감기약이 없고, 김이 없어 그냥 간다면서 이것들을 사달라는 요구사항도 적혀있다. 이러한 요구사항을 해결하는 것은 이장의 몫이다.

▲ 외상장부 기록도 주민 스스로 한다. 나중에 돈을 갚으면 전에 적어놓은 것을 두 줄로 그으면 된다.
ⓒ 이돈삼
외상장부에는 외지인들의 흔적도 엿보인다. ‘고창에서 ○○○가족 방문하고 4500원 어치 사가지고 갑니다. 외상 안 했어요’, 자신을 ‘기도원에 다녀간 사람’이라고 쓴 사람은 ‘참으로 좋은 세상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삼천원 어치 물건 사고 만원 넣었습니다. 좋은 일에 쓰세요!’ 라고 써놓았다.

김유순(74) 할머니는 “옛날에 주인이 가게를 볼 때 좀도둑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디 지금은 그런 소리도 안나온다”면서 “돈통이 있는 가게에도 도둑이 없는디, 집안에 도둑이 들 리 만무하다"고 동네사람들 모두 문을 열어놓고 산다고 했다.

정한도(74) 할아버지는 “무인상점이 별 탈 없이 운영되는 걸 보면서 정직한 마을에 사는 것 같아 기분이 좋고 자랑스럽다”고 했다. 박충렬 이장은 “돈통에서 나온 돈으로 늘 필요한 물건을 사고 남는다”면서 “정산은 해보지 않았지만 ‘남는 장사’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시골마을치고는 제법 많은 300여 명(기도원 거주자 포함)의 주민이 살고 있는 신촌마을. 노인들의 비율이 많고 농사를 지으며 사는 모습은 여느 농촌마을과 다를 바 없지만, 양심가게가 주민들의 자긍심을 높여주면서 마을 분위기까지 온화하고 화목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 신촌마을 주민들. 양심가게 등장 이후 마을 분위기까지 화기애애해졌다.
ⓒ 이돈삼

▲ 마을회관 앞에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신촌마을 주민들.
ⓒ 이돈삼

▲ 신촌마을 풍경. 여느 마을보다 넉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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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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