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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계천에 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시민과 어린이들
ⓒ 이정근
청계천이 복원된 지 1년이 가까워온다. 그동안 수많은 국내외 관람객이 다녀갔다. 심지어 지방에서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찾을 만큼 서울의 관광명소로 등장했다. 하지만 흐르는 물만 구경할 뿐. 청계천에 살아 숨 쉬는 문화와 역사를 제대로 봤는지 의아스럽다. 청계천에 가면 역사가 살아있다.

조선왕국 5백년 도읍지의 숨결이 살아있는 청계천은 곳곳에 문화유적이 남아있다. 조선시대 제일 크고 넓었다는 광통교와 홍수를 예방하기 위한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있는 수표교가 있다. 또한 조선개국이래 최대의 토목공사가 벌어진 오간수문이 있다. 하지만 청계천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원형을 살리지 못하여 안타깝다.

▲ 오간수문 사진. 1907년 헐리기 전 사진을 도자 타일로 재현해 놓았다
ⓒ 이정근
오간수교와 오간수문을 혼동하는데 오간수교와 오간수문은 분명히 다르다. 오간수문은 5칸의 아치형 수문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수문위에 성벽 따라 조그만 길이 있었지만 백성들의 통행을 위한 길이라기보다 수문을 관리하고 경비하는 군졸들의 순라길 이었다.

오간수문은 한양 성곽을 따라 흥인문과 광희문 사이를 연결하는 수문으로서 원형이 살아 있다면 당시의 건축술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인데 성벽과 함께 사라져 아쉽다.

오간수교는 1907년 수문과 성벽을 헐어내고 만든 다리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때부터 비로소 일반인들이 청계천 남북을 잇는 중요 교통로로서 편리하게 이용했다. 뿐만 아니라 바로 인근에 경성전력회사가 들어오고 지금 종합시장 자리에 전차 차고지가 생기면서 서울 장안의 교통 중심축으로 떠올랐다. 여기에서 출발한 전차가 종로와 을지로를 거쳐 마포, 용산, 영등포, 영천으로 연결되었다.

▲ 한양성곽
ⓒ 이정근

조선 초기. 한양을 도읍지로 택한 개국공신들은(그중에서 정도전은) 북악아래 조선의 법궁 경복궁을 짓고 좌청룡 우백호를 연결하는 성벽을 쌓기로 계획했다.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과 북악산 그리고 좌청룡 타락산과 목멱산(남산)을 잇는 환상 형 성벽이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타락산과 목멱산을 연결하려는데 청계천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계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지상과제가 떨어졌지만 그 당시 축성기술로는 커다란 난제였다. 당대의 엘리트들이 머리를 맞대고 몇날 며칠 궁리 끝에 생각해낸 것이 수문을 쌓고 그 위에 성벽을 쌓자는 안이었다. 총책임을 맡은 정도전은 무릎을 쳤다. 그 당시로는 굿 아이디어였고 신기술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오간수문이다.

▲ 오간수문과 연결되어 있던 흥인문
ⓒ 이정근

한양성곽을 쌓고 4대문과 4소문을 통제하니 도성은 철웅성이었다. 하지만 빈틈은 있는 법. 죄를 짓고 한양을 몰래 빠져나가려는 범죄자들이 야음을 틈타 오간수문을 이용했고 명종 때 탐관오리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임꺽정 무리가 도성에 들어와 전옥서를 부수고 달아날 때 오간수문을 통하여 유유히 한양을 빠져 나갔다.

또한, 조선시대 최대의 토목공사가 벌어졌던 곳이 청계천이며 핵심 포인트가 오간수문이다. 자유롭게 흐르던 물에 수문을 설치하고 그 수문에 경비 목적으로 쇠창살을 박아놓으니 부유물이 끼고 토사가 쌓여 조금만 비가와도 청계천이 범람하여 도성은 물에 잠기고 홍수 피해가 컸다. 세종 이후 준설은 하지 않은 채 300여년을 방치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 창경궁 홍화문
ⓒ 이정근

조선실록을 살펴보면 효종 5년(1654년) 6월 8일. ‘큰비가 내려 궐내에 물이 넘치고 익사자가 있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궐내라 하면 창덕궁을 법궁으로 사용하고 동궐(창경궁)을 활용하고 있던 시절이므로 창덕궁보다 지대가 낮고 궐내에 옥류천이 흐르는 창경궁을 지칭하겠지만 청계천 수면과 창경궁 위치를 상상해보면 도성의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이에 1760년 영조대왕은 대대적인 준설 공사를 펼친다. 그렇다고 요즘처럼 벼락치기 공사가 아니다.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준비기간만 8년이 걸렸다. 공사 중에도 신하들의 반대가 거세었다. 특히 유척기가 “퍼 올린 모래가 비가 오면 쓸려 내려가 개천이 다시 막히고 말 것입니다” 고 아뢰자 “100년은 안심할 것이다. 경은 수작하지 말고 물러가라”고 강한 의지를 표명했다.

조선 개국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 청계천 준설

영조 36년. 청계천 준설을 목적으로 한 임시관청인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고 총책임자에 호조판서 홍봉한을 임명했다. 홍봉한은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며 사도세자(장조)의 장인이다. 이처럼 막중한 자리에 세자의 장인을 앉힌 것은 영조대왕이 청계천 준설을 얼마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느냐를 알 수 있다.

연인원 21만5300명이 동원된 조선 최대 토목공사였다. 당시 한양 인구로 봐서 대단한 인력 동원이다. 장비라곤 삽과 소달구지 밖에 없던 그 시절에는 모든 것을 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팔도에서 징발하듯이 인력을 동원했다. 예산도 막대했다. 궁에서 내려 보낸 3만5000냥의 현금과 2300석의 쌀이 투입되었다.

▲ 준천공사 당시의 모습. 삽으로 가래질을 하고 공사 현장에 소가 투입되었다
ⓒ 이정근
2월 8일부터 4월 15일까지 57일간 벌어진 공사 현장에서 퍼 올린 토사가 산을 이루었다. 그 때 만들어진 산이 가산(假山)이라는 이름으로 조선 말엽까지 오간수문과 마전교 사이에 있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에 만들어진 둔덕과 같은 인공 산이다. 마전은 떡을 파는 떡전, 쌀을 파는 싸전 하듯이 말(馬)을 거래하던 곳으로서 방산동 부근에 있었다.

또한 부실공사를 방지하고 후대의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공사를 위하여 공사에 실명제를 도입하고 모든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도록 어명을 내렸다. 그러한 연유로 <준천사실>과 <준첩도>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준첩도>와 <준천사실>은 <조선왕조실록> <지봉유설> <열하일기> <성호사설> 등과 함께 조선시대 명저로 손꼽힌다.

▲ 수문상친림관역도
ⓒ 이정근
영조 임금도 창덕궁에 앉아 보고만 받는 것이 아니라 직접 현장에 나가 공사를 독려했다. 그만큼 준설공사는 왕에게도 지대한 관심사항이었다. 공사 초창기 광통교를 참관한데 이어 공사가 마무리될 무렵, 4월 9일에는 오간수문을 직접 시찰하고 공사에 참여한 관원과 백성들을 치하했다. 그 당시를 묘사한 그림이 <준첩도>에 나와 있는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다.

<준첩도>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짚고 넘어갈 이야기가 있다. 청계천 6가 오간수교 부근에 <준첩도>의 한 부분이 도자 타일로 재현되어있다. 부산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어전준천제명첩>에 있는 수문상친림관역도를 현대적인 기법으로 재현한 도자 그림이다.

청계천이 복원 개통된 이후 타일로 재현된 <준첩도>의 그림이 "틀렸다.아니다. 맞다"라는 공방이 오고간 적이 있다. 옛 기록과 고서화를 알면 우스운 얘기다. 현재까지 발굴된 <준첩도>는 8가지가 전해져 온다. 미공개 <준첩도>가 얼마나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 청계천6가 천변에 모형으로 만들어놓은 오간수문
ⓒ 이정근

가짓수도 많고 소장처도 다양한 준천첩

1.준천첩(濬川帖.호암미술관 소장)
2.준천계첩(濬川稧帖. 개인 이해철 소장)
3.준천계첩(濬川稧帖. 미국 버클리대 소장)
4.준천시사열무도(濬川時射閱武圖. 규장각 소장)
5.제신제진도첩(諸臣製進圖帖. 경남대박물관 소장)
6.어전준천제명첩(御前濬川題名帖. 부산시립박물관 소장)
7.어제준천제명첩(御製濬川題名帖. 서울 역사박물관 소장)
8.준천당랑시사연구첩(濬川堂郞試射聯句帖.고려대 박물관 소장)


▲ 현재의 오간수교. 수문은 간데없고 성벽 모형의 난간석만 있다
ⓒ 이정근
왜 이렇게 가짓수도 많고 이름도 각각일까? 재질도 비단에 그린 것이 있고 종이에 그린 것이 있다. 헷갈리지만 그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해가 된다. 사진을 찍어서 여러 장 뽑듯이 복사한 것이 아니다. 궁중화원들이 하나의 그림을 맡아서 각각 그렸다. 그리고 그림을 받을 사람이 정해져 있었다.

임금님에게 바칠 그림. 공조판서에게 올릴 그림. 규장각에 보관 할 그림. 현장을 지휘했던 공사감독에게 전달할 그림. 하급 관리들이 보관할 그림 등등 심지어 오간수교에 재현된 영조대왕이 나오는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가 있는 <준천첩>이 있는가 하면 아예 왕이 등장하지 않은 준천도가 있다.

이것 때문에 "이본이다","그림이 틀렸다" 논쟁하는 것은 난센스다. 동명 이본도 아니고 틀린 그림도 아니다. 모두가 맞는 그림이다. 하나같이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다만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 중이던 어본(御本)을 프랑스 함대가 약탈해가 아직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은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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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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