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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작은 꽃 무리지어 보라빛으로 들판을 물들이고
ⓒ 김민수
이파리가 영락없이 난을 닮은 꽃이 있다. 한 겨울에 푸른빛을 잃지 않는 것도 난을 닮았다. 난이 선비들의 꽃이요, 귀공자라면 맥문동은 민중들의 꽃이요, 그냥 저냥 살아가는 서민들을 닮은 꽃이다.

난을 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맥문동은 난에 비해 쉽게 기를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생명력이 그만큼 강하다는 이야기다. 깐깐하지 않고, 까탈스럽지 않고 수더분하다. 그 수더분함으로 인해 특별한 존재로 여김을 받지는 못하지만 그 수더분함의 아름다움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그 어느 꽃보다 예뻐 보이는 꽃이다.

거실에는 혼자서 들기에는 버거울 정도의 큰 화분이 있고, 그 화분에는 맥문동이 자라고 있다. 얼마나 잘 퍼지는지 이듬해 포기를 나눠서 심으면 또 그만큼 자라난다. 어머님은 난보다 풍성한 맥문동을 좋아하신다. 실내에서 자란 탓인지 몇 년째 꽃을 피우지 못하지만 어머니는 그 푸른 빛깔이 좋다고 하신다.

▲ 먼저 피어난 꽃, 피어날 꽃이 어우러져 여름 한철 내내 보라빛 꽃을 피우고
ⓒ 김민수
보랏빛은 고난을 상징하는 빛이다. 한 겨울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푸른 맨살로 겨울을 난다. 차라리 이파리가 시들어 깊은 땅 속에 뿌리만 남아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데도, 얼어터지고 짓무르면서도 햇살 한 줌만 있으면 다시 그 푸른 맨살에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그렇게 겨울을 온 몸으로 견디어냈으면 급한 마음에 꽃을 화들짝 피울 것 같은데 먼저 연록의 새순을 내고, 그 연록의 새순들이 봄의 햇살과 여름의 햇살에 짙푸른 빛을 낼 즈음이면 꼿꼿이 꽃줄기를 세우고 보랏빛 꽃망울을 다닥다닥 맺는다. 그렇게 한꺼번에 피지 않고 아주 아껴서 꽃 몽우리를 하나씩 하나씩 피어내는 것이다.

절제, 그렇다. 나는 그에게서 절제의 미를 본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을 간직하고 있어도 한꺼번에 '나 봐라!' 하고 내어놓지 않는 그 절제의 미를 보는 것이다. 가진 것이 풍성해도 그저 수수하고 수더분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 자기의 분수를 지켜가면서 살아가는 꽃이구나 생각이 든다.

▲ 풀섶에 숨어피는 작은 꽃, 그들을 만나는 것은 설렘이다.
ⓒ 김민수
오늘 날 분수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중용의 도를 지키지 못하고 어느 한 쪽으로 편향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너무 자기만 생각하면서 살아가다 보면 눈이 먼다.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자기가 보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진리라고 생각하고 강요하려고 한다. 마음의 눈이 먼 사람이 지도자가 되고 원로가 되면 그의 삶만 피곤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피곤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맥문동의 꽃이 보랏빛인 이유, 나는 그것을 고난의 계절 겨울과 연결을 시킨다. 물론 맥문동의 모든 꽃이 보랏빛은 아니지만, 겨울에 푸른빛을 간직하고 있는 것들이 모두 보랏빛의 꽃을 피우는 것은 아니지만 보랏빛 맥문동, 그것을 보면 나는 역경을 헤치고, 자신의 삶을 활짝 피워 가는 한 사람을 보는 듯하다.

▲ 작은 꽃을 어슬렁거리는 작은 곤충(노린재)도 보랏빛에 물들라
ⓒ 김민수
장대비가 내린다.
장대비에 애써 피운 꽃들이 떨어지겠구나.
겨우 피어난 꽃이 장대비 한 방울만 하다.
한 방울 또 한 방울이 모이고 모여 바다가 되듯이
작은 꽃 한 송이 한 송이 모여
초록물결 출렁이는 바다에 보랏빛 파도를 내어놓는다.
오늘 아침 활짝 웃으며 피어난 꽃,
내일 또 모레까지도 넉넉하게 웃는 꽃,
꽃 지면 둥글둥글 열매를 맺는 꽃,
열매를 보아 그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모진 곳 없는 마음인가보다.
아주 오래 연단 되면 그렇게 둥글둥글 살아가는 것인가 보다.
아직도 각진 내 마음……

(자작시 '맥문동')


▲ 꽃대는 꼿꼿하게 하늘을 향하고
ⓒ 김민수
갑자기 장대비가 내린다. 저 비에 무더운 여름이 훌쩍 도망을 가버릴 것만 같다. 그랬으면 좋겠다. 열대야로 잠 못 이루던 밤이 얼른 끝나고, 사람의 체온이 그리워지는 그런 계절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겨울은 사랑하는 이의 체온이 그리운 계절이다. 그래서일까? 그들의 이파리는 무성해서 작은 바람에도 서로 부대끼며 춤을 춘다. 장대비가 그들의 이파리를 흔들어 놓을 때에도 그들은 함께 부대끼며 춤을 출 것이다. 그리고 추운 겨울 바람에도 그들은 그렇게 부대끼며 서로를 격려했을 것이다.

이제 가을이다. 왜 가을이냐면 가을꽃들이 피어나니까 가을이다. 바쁜 일상을 훌훌 털어 버리고 가을 숲, 가을들판으로 나가 한 겨울을 보내고도 인내하다 피어난 가을꽃들을 만나야겠다. 그리고 보니 가을꽃들은 다른 계절 꽃에 비해 보랏빛 꽃들이 참 많다. 오랜 인내 끝에 피어나는 꽃들이라서 고난의 의미를 그 마음에 새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가을 꽃 아니라도 보랏빛 꽃들을 세어보자.

엉겅퀴, 잔대, 도라지, 절굿대, 해국, 쑥부쟁이, 물봉선, 누린내풀……. 그리고 또 다른 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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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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