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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남자네 집 표지 >
ⓒ 현대문학
마음에 들지 않는 헌집 이사 결정은 그동안 이리저리 내 집 마련을 꿈꾸던 나를 보기 좋게 비웃었다. 차선책으로 제대로 된 전세 집을 구하려고 전세자금 대출을 알아 봤으나 그 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서민을 위한(?) 부동산 정책'을 개탄하며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꿈꾸던 집은 어떤 집이었는가. 큰돈 만져 볼 일 없는 월급쟁이들에게 확실한 재테크는 부동산임을 모르지 않지만 그 한 목표를 위해 있는 힘을 다해 허리끈을 졸라매는 생활을 참아내기에는 역시 나는 낭만주의자인가 보다. 내겐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여기면서 '그냥저냥 즐기면서 사는' 걸로 마음의 가닥을 잡았다.

이삿날이 잡히면서 마음의 분주함과 함께 헌집의 불만으로 가득해지는 걸 삭히기 위해 재미있는 책을 읽기로 했다. 한창 '집'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으니 '집'이 들어가는 책 중에 눈에 띈 것이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

결코 집 이야기는 아니지만 사랑 이야기만큼 저절로 빨려 들려가는 이야기는 없으니 '됐다' 싶었다. 내가 읽은 그의 작품들은 모두 훌륭했다는 나름의 판단으로 서슴없이 집어 들었다.

작가는 50년 전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악다구니로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일상사와 그 속에 '구슬처럼' 간직되는 찬란한 사랑의 시간들을 세세히 다룬다.

노년의 화자인 '나'는 이사 간 후배의 집을 찾아가면서 자신의 첫사랑인 그 남자의 집을 알게 된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면서 '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첫사랑은 현실과 비껴가기 마련

한 동네에서 먼 친척 사이로 그들의 사랑은 시작된다. "그 남자의 존재는 눅눅하고 어두운 숲 속을 비집고 드는 빛살처럼 찬란한 것이었다." 전시 상황에서 그들의 사랑은 사진처럼 선명하고 아름답다.

전쟁마저 잊게 만드는 그 구슬 같은 사랑이지만 '나'의 현실감각을 외면하게 하지는 못한다. 어정쩡한 상태로 첫사랑을 그대로 남겨둔 채 '나'는 현실 감각이 투철한 은행원의 부인이 된다.

마치 결혼 전 사진이나 영화에서 보았던 집에서 결혼 후에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이 여지없이 깨지는 것과 같다. 마음에 있는 것이 내 것이 되는 일은 참 쉽지 않다.

언젠가 읽었던 시가 생각난다.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 갔다 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언뜻 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여하고 싶은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은 집, 눈 오는 집…

-김용택 '그 여자네 집' 중에서


누구나 그러하리라. 시인 또한 그러한 집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상적인 집을 그려낸 것이리라. 비루한 첫사랑의 흔적처럼 단칸방에서의 생활을 '알콩달콩'이란 말로 간단히 참기름 친 비빔밥의 버무림처럼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실상의 단편들은 그지없이 궁상스런 모습에 지나지 않는 질펀함 멍석 같은.

윤리 뒤에 숨겨진 욕망의 '나'

연애는 연애, 결혼은 결혼이란 통상적 현실인식으로 안정적 기반을 갖춘 결혼 생활을 하는 화자 '나'는 일상을 일탈하고픈 욕망에 사로잡힌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발밑의 언 땅이 고무공처럼 나의 온몸에 탄력을 주는' 그 남자를 다시 만나 연애를 한다. 하지만 그 남자와의 시간들이 사실은 '벌레의 선물'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목청껏 소리를 질러 그 남자를 밀어낸다.

박완서는 이와 같은 일탈을 "또 다른 길을 두고 운명적으로 '한 길'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원초적 운명이 주는 너무나 인간적인 반란 같은 것이었다"고 서술한다.

바로 이런 구절이 있어 작가의 책을 뒤적이게 되는가 보다. 인간 내면의 본성을 이렇게 예리하게 뽑아 낼 수 있는 역량에 어찌 소홀할 수 있을까.

"사랑은 도발이다. 벌레의 것이든, 사람의 것이든. 억지로 생겨나는 감정도 아니지만 간신히 학습된 도덕률과 통념과 체면으로 가린다고 해도 끝내 그 통제 안에 머물지도 않는다. 피한다고 비켜갈 수 없고, 간절하게 원해도 잡히지 않는 야멸찬 그 정체는 무엇인가.” (본문 중에서)

사랑에 대한 결혼생활의 허와 실을 제대로 가늠할 수 있는 구절. 사랑에 대한 신랄한 현실인식과 체념, 숨김없이 드러나는 속마음을 제대로 보여준다.

결혼생활의 이중적 결함은 잘 맞지 않는 기성복을 몸에 맞추어 자기 옷이 되는 예와 같다. 자기의 것이 아니지만 옷을 입어야 한다면 그것을 운명이라고 일컬어도 무방하리라.

10년이 되어가는 무덤덤한 나의 결혼생활은 신혼 때처럼 집안 구석구석 인테리어에 신경을 쓰거나 요리 책자들을 갈피해 메모를 잊지 않는 정성과는 한참 멀어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생활의 군더더기 살이 여기저기 붙으면서 일착으로 넓은 평수의 집만을 원하는 볼품없는 소시민이 된 것이다.

'그렇고 그런' 집은 나의 결혼 생활의 초라함을 더욱 실감나게 하는 증거물처럼 보여지기도 하는 동기가 되어 나 또한 사소한 일탈을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또 어쩌랴. '간신히 학습된 도덕과 통념'은 아직까지 견고한 성(城)인 것을.

작가는 '문득 집에도 영 같은 게 있을지 모른다'고 한다. 적어도 집은 그곳에 사는 사람을 말해준다.

이사 오기 몇 주 전부터 우리 부부는 이 낡은 아파트를 손 봤다. 비지땀을 흘려가며 벗겨진 곳. 못 자국이 움푹움푹 패여 있는 곳. 더럭 더럭 때가 붙어 때어지지 않는 시트지들. 베란다에는 썩은 합판들과 겹겹으로 붙어 있는 스티로폼들을 모두 들어내어 정리하고 하얗게 페인트를 칠했다.

이사 온 지 한 달이 다 되었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상태다. 힘은 들지만 우리의 손길이 닿은 곳마다 적당히 새로워지는 모습을 보며 나의 몰랐던 재주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현실이란 내가 원하지 않은 곳이 아니지만 당장 발붙여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적응해야 하고 순응하게 된다. 가슴 한 켠에 일탈의 꿈을 기대감으로 남겨 두는 것도 현실을 이겨내는 활력소가 되어 주는 차원으로 나의 교과서적인 정리도 마무리된다.

'우리의 포옹은 내가 꿈꾸던 포옹하고도, 욕망하던 포옹하고도 달랐다. 우리의 포옹은 물처럼 담담하고 완벽했다. 우리의 결별은 그것으로 족했다.'

그 남자와 육친애적 관계로 묶이듯 사랑에 대한 열정이 일정한 선에서 꺾이지만 지루한 교훈적 메시지와는 거리가 먼 것이 이 책의 강점이다. 50년 전 저쪽과 지금의 경계를 넘어 작가의 차분한 감정이 생생한 삶의 진실들을 속속들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죽어가면서도 무덤이라는 집을 가지려고 하는 인간에게 집이란 과연 무엇일까. 집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그 집을 둘러싸고 사람들의 이야기가 넘실댄다.

집에서 안주하기 위해 다른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것들. 그 중에 차마 떨치기 힘든 비밀처럼 잠재된 우리의 욕망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필요하지만 때때로의 구속을 원하는 집은 아마도 결혼과 닮았다. 그래서 한 번 쯤 집을 떠난 여행이 필요하듯… 하지만 결혼에서의 외도는 다시 돌아 올 수 있는 집과는 다르다.

결혼한 이들이나 결혼을 앞두고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현대문학(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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