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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천문학사
'인생에는 연습이 없다'는 말에서의 '연습'과 조정래 소설의 <인간연습>에서의 '연습'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분명 국어사전에 나오는 연습이라는 말은 같을 텐데 말이다.

<에센스 국어사전>에 나오는 연습(練習)은 '학문이나 기예 따위를 익숙하도록 익힘'이라는 의미다. 인생연습이 아니고 인간연습이기 때문에 소설<인간연습>에서 함축하는 '연습'이라는 의미가 슬프고 아픈 것인지도 모른다.

인생연습은 삶의 숙달을 향한 예비과정처럼 느껴지지만 인간연습은 인간 그 자체가 되기 위한 연습이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진다. 인간연습은 인간이 아닌 생명체가 인간이 되기 위한 연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념과 사상이 다르다고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닌데. 사회가 요구하는 이념과 사상에 맞는 인간이 되기 위한 연습이 바로 인간연습이다. 얼마나 비인간적인가? 이념과 사상의 차이가 인간과 비인간으로 나누는 기준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대하소설 이후에 처음으로 나온 조정래의 <인간연습>은 한 시대의 종말과 마무리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고 시의적절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세계사적으로 볼 때,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1991년 러시아의 붕괴와 더불어 사회주의의 몰락은 국제질서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사상과 의식까지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현대사적인 의미로 볼 때,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냉전(Cold War)의 유물이 여전히 사회와 정치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지만, 1990년대를 기점으로 이념과 사상의 대립과 갈등은 상당히 약화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10년 안에 우리나라에 닥쳐올 사회와 정치구조의 변화를 생각한다면 이념과 사상의 대립은 박물관에 갈 대표적인 유물이 될 것이다.

문학평론가인 황광수의 말대로 <인간연습>은 이념형 인간의 종말과 거듭나기의 기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념과 사상을 생존의 이유와 공존의 이유로 여겨왔던 윤혁과 박동건의 삶은 사회와 국가가 어떻게 개인의 삶과 죽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체제가 만들어낸 중간인(中間人)이자 체제의 주변인(周邊人)으로 살 수밖에 없는 이들의 삶은 우리 현대사가 고스란히 짊어져야 할 과제임에는 틀림이 없다.

윤혁과 박동건이 추구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순수'와 '희생'이라는 의미로 시작되었지만 정치이데올로기의 타락과 권력투쟁이 만들어낸 남과 북의 체제는 이들의 설자리를 0.5평 독방에 가둬버리는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시대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혁명적 낙관주의에 입각하여 30여년을 견디어온 비인간적인 감옥생활을 해온 윤혁과 박동건은 비슷한 인생의 경로를 겪지만 둘의 종말은 천양지차다. 끝까지 혁명적 낙관주의를 포기하지 않은 박동건은 가족과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당하는 삶을 살다가 죽지만 윤혁은 이념형 인간에서 새로운 희망의 싹을 틔워내기 위해 '인간의 꽃밭'을 찾아낸다. 윤혁은 조금씩 조금씩 사회의 변화와 이념의 변화추이를 수용하는 변절(?)을 택하여 인간성을 가진 인간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념과 관념이 현실성을 획득하면 충돌하게 되고, 그 현실성은 인간의 행동이기 때문에 극한적인 상태로 흘러 전쟁이 된다는 간단한 설명이 결국 1950년의 한국전쟁을 이념전쟁으로 결정짓는 윤혁의 태도에 공감이 간다. 남과 북의 충돌이 인민과 국민의 충돌이 아니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념충돌이 빚어낸 비극이라는 것이다.

이념투쟁은 민족간의 갈등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간의 갈등, 이웃간의 갈등, 심지어는 부부간의 갈등도 화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죽을 때까지 아내와 화합을 하지 못하는 박동건의 삶의 비극성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박동건 자신의 삶은 주체적이고 성공적일지는 몰라도 인간관계의 삶은 비극적 너무나 비극적인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윤혁의 삶도 마찬가지다. 남북의 대립이 윤혁과 그의 아내 사이의 인간적 관계를 단절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생사를 알 수 없는 아내의 정체는 윤혁의 삶과 사상을 끊임없이 지배하고 있다.

그렇지만 윤혁과 박동건의 비극은 이들만의 책임이 아니다. 아니 이들은 이념선택의 책임은 있을지 몰라도 이들의 비극적인 삶에는 전혀 책임이 없다. 바로 체제와 사회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분단국가로서 이념이 가지는 절대성을 고려해 본다면 윤혁과 박동건의 비극적인 삶을 남과 북의 국가가 보상해야 한다. 그래야 현대사의 아픔과 고통도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다행히 윤혁이 찾은 '인간의 꽃밭'에서 새로운 삶이 꽃필 수 있다는 개연성이 우리의 무거운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해준다. 결국 인간이다. 인간이 중심이다. 사회주의의 몰락의 원인을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려고 만들어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그 반대로 비인간적으로 운영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윤혁과 송민규의 결론을 보면 말이다. 인간성을 상실한 어떤 체제나 이념도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지극히 단순한 진리를 드러낸 셈이다.

고아로 살아가는 기준과 경희와 같은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순수성이 사회와 이념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인간의 삶이고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생산물이라는 사실은 인간의 순수성과 본능에 어긋나는 이념이나 체제는 그 자체로 존재의미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인간연습>은 사상의 장기수인 윤혁과 박동건의 삶과 생각을 통해 이념의 허구성를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을 위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이념이 결국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만들고 인간을 파괴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념 갈등의 무가치성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우리시대의 이데올로기 집착이 가져오는 사회적 갈등과 민족의 갈등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결국 우리 사회와 민족을 비극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윤혁과 박동건의 삶은 우리에게 정말 슬프게 느껴진다. '떡공이(감옥 안에서 장기수들의 사상을 전향시키기 위해 구성된 폭력배들)'들의 악랄한 폭력과 독방공포증이 주는 비인간성을 이겨내야 하는 비전향 장기수들의 삶은 우리들의 지울 수 없는 양심의 화인이다.

이들의 아픔은 80년대 이념과 사상의 투쟁에 적극적이었던 386세대들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비전향 장기수들의 아픔과 고통과는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386세대들도 사회와 시대의 '반역인'이 아닌 적극적인 '참여자'로서 이념과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폭력이 일상화되어 있는 감옥생활에서 경험해야 하는 절망과 공포는 실제 사회에서 부적응과 부조화의 문제를 야기한다. 이러한 정신적 외상을 사회와 국가가 치유해 주어야 한다. 비전향 장기수나 전향 장기수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인간이 되기 위한 연습을 하도록 만들기보다는 자신이 가지고는 이념과 사상을 가진 인간으로 행복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국가와 사회가 할 일이다.

조정래의 <인간연습>은 시대와 이념의 희생자들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관심을 촉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덧붙이는 글 | 노태영 기자는 익산 남성고등학교 교사입니다.


인간 연습

조정래 지음, 실천문학사(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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