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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는 것만 빼고 모두 거짓이다."
"이건희 삼성 회장보다 더 존경할 만한 인물이다."


사기·비자금 조성·공금횡령·주가조작 의혹을 받고 있는 주수도 제이유그룹 회장(50, 구속중)에 대한 평가는 이처럼 극과 극을 달린다. 일부 제이유 다단계 사업자들에겐 그는 여전히 '신' 같은 존재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그를 '희대의 사기꾼'이라고 일축한다.

그렇다면 주 회장은 최악의 사기꾼인가, 다단계 마케팅의 귀재인가? 그의 인생유전에 그 해답의 실마리가 들어 있다.

'가난'-'고학'으로 만들어진 '주수도 신화'

▲ 주수도 제이유그룹 회장.
ⓒ 제이유피닉스 홈페이지
주수도 회장이 걸어온 길은 '신화 만들기'에 적합한 토양을 갖추고 있다. 성공신화의 주인공들이 대개 그렇듯, '가난'은 '주수도 신화'의 첫 번째 배경이 되었다.

주 회장은 1956년 울산 앞바다 조개섬에서 염전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언론들과 인터뷰할 때마다 '지독히 가난한 유년시절'을 강조해왔다. 그는 "염전이라고는 하지만 고모님댁과 두 집이 하는 조그만 염전이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환경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주 회장은 이러한 가난이 자신의 독립심을 극대화시켰다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는 시장으로, 형은 학교에, 누나는 밭으로, 그러니까 어렸을 때부터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며 "어머니가 학교에 와 본 적이 전혀 없으니까 어린시절부터 늘 스스로 돌파하고 극복해내는 훈련이 되었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주수도 신화'의 두 번째 배경은 '고학'이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단돈 170원을 들고 혈혈단신 서울로 올라왔다고 주장했다. 주변 인사들은 그가 서울 학원가에서 '칠판닦이 고학생'으로 생계와 학업을 겸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달변가였던 주 회장은 75년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대학 합격과 함께 서울 학원가로 진출해 영어강사로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그가 주로 고위층 자녀들을 대상으로 고액과외를 했다는 증언도 있다.

제이유그룹에 근무했던 한 인사는 "그는 '낙원동 주 선생'으로 유명했다"며 "주로 고관대작 자녀들이 그에게 고액과외를 받았다"고 귀뜸했다.

'20대 학원장'에 정계입문까지... "이건희 삼성 회장보다 존경스러워"

주 회장은 이러한 고액과외를 통해 적지 않은 명성과 부를 쌓은 것으로 보인다. 이를 밑천삼아 83년에는 강남에 영재학원을 차리고 학원경영에도 나섰다. 당시 그의 나이 27살에 불과했다. 지독한 가난을 극복하고 고학을 통해 '20대 학원장'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삼성생명에서 근무했다는 한 사업자는 이러한 이력들을 들어 "이런 경영자는 1세기에 나올까 말까 한다"며 "칠판닦이 등 열악한 환경에서 성공한 주 회장이 이건희 삼성 회장보다 더 존경스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 회장의 입지전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는 대목도 있다. 그는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86년 콜롬비아 퍼시픽대 영문학과를 어렵사리 졸업했다'고 주장했지만, 주변인사들은 이에 강한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 "주 회장은 1년 이상 해외에 나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퍼시픽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딸림기사 참조).

여기에다 주 회장이 밝힌 고향(울산 앞바다 조개섬)도 미스터리다. 기자가 조개섬의 존재여부를 문의하자, 울산시청 관광과에서는 "그런 섬도 없고, 울산 앞바다에서 염전을 하는 곳도 없다"고 말했다. 주요 염전지대가 서해안이라는 점에서도 '울산 앞바다 염전집 출생'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한편 주 회장이 30대 초반 정계에 입문했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는 87년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와 인연을 맺고 부총재와 강남지구당위원장을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정계입문 이후 총선에 출마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것도 거짓으로 확인됐다.

일각에서는 주 회장이 학원경영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점을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신민주공화당에 거액의 홍보비를 부담하기로 하고 정계에 입문했다는 주장도 있다. 여하튼 이후 그의 학원사업도 점차 기울어 갔다.

암웨이 제치고 시장 1위...'주수도 마케팅'의 빛과 그림자

▲ 제이유네트워크는 2004년부터 연매출 1∼2조원대를 기록하며 다단계 시장의 강자로 자리를 굳히기 시작했다. 사진은 2004년 전진대회 현장을 전하는 소식지의 일부.
ⓒ 제이유피닉스 홈페이지
하지만 주 회장에게 '사업성공'이 없었다면 '주수도신화'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는 두세 차례의 사업실패와 구속을 반복하면서도 한국암웨이를 제치고 제이유네트워크(현 제이유피닉스)를 국내 다단계 시장 1위에 올려놓았다.

주 회장은 90년대 중반 다단계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SMK 다단계 사업자로 활동했던 그는 일영인터내셔날을 설립해 컴퓨터 관련 다단계사업에 나섰다. 하지만 1년 6개월 만에 사업을 접고, 감옥에도 갔다 와야 했다.

주 회장은 "기존의 네트워크 마케팅 플랜은 근본적으로 피해자가 생길 수밖에 없는 마케팅이었다"며 이후 '소비생활 공유마케팅'이라는 독특한 마케팅기법을 내놓았다. 이것은 '소비=판매'라는 개념을 도입해 소비하는 것만으로도 소득(수당)이 생긴다는 마케팅이었다. '소비생활을 통해 250%까지 수당을 지급받을 수 있다'는 이 마케팅은 수많은 자영업자·퇴직자 등을 끌어들였다.

2002년 4월 '방문판매 등에 관한 법률'(방판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지만, 감옥은 주 회장에게 훈장이 되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제이유네트워크는 2003년 중반기부터 13년간 시장 1위를 차지해온 한국암웨이를 제치기 시작했다.

2004년부터는 연매출 1∼2조원대를 기록하며 다단계 시장의 강자로 자리를 굳히기 시작했다. 심지어 다단계 시장 점유율을 50%까지 높이기도 했다.

하지만 2005년 상반기부터 경영수지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전년 대비 매출은 1조1641억원 늘었지만 영업이익과 순이익이 각각 909억원과 920억원 줄어드는 기형적인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회계감사를 맡은 회계법인조차 "회사의 존속능력에 중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이러한 위기는 '주수도 마케팅'으로 불리는 '소비생활 공유마케팅'의 근본적 한계에서 왔다는 것이 업계의 시각이다. 기존의 재벌처럼 문어발식 사업확장도 문제였지만 과다한 수당을 지급할 수밖에 없는 마케팅 자체가 주 회장의 발목을 잡았다는 분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주수도파' 사업자들은 제이유그룹의 위기를 외부세력의 음모로 돌렸다. 외국계 다단계기업인 한국암웨이가 검찰·공정거래위 등과 짜고 토종 다단계기업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다.

한 사업자는 주 회장이 구속중인 상황을 헤아린 듯 "이순신 장군은 12척의 배로 왜군을 무찔렀다"며 "하지만 주 회장을 이순신 장군의 최후처럼 만들지는 않겠다"고 비장한 결의를 밝히기도 했다.

"주수도 신화는 디지털과 샤머니즘의 결합"

주 회장이 검찰에 구속된 후에도 그를 추종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 데는 그의 독특한 카리스마가 크게 작용했다.

주 회장이 출중한 달변가라는 점에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는 학원강사 시절 다져진 달변을 밑천으로 제이유그룹 회장 시절에도 월평균 20회 이상 강연을 해왔다. 특히 그의 달변은 디지털기술과 결합되면서 시너지효과를 나타냈다. 매일 오전 8시 40분에 열리는 전국 화상운영회의가 그것이다.

주 회장은 한국통신으로부터 무궁화 3호 위성채널을 임대해 최첨단 화상회의를 시작했다. 그는 이 화상회의를 통해 전국의 사업자들과 대화하고 이들에게 판매교육을 실시했다. 특히 그는 이를 '투명경영'으로 연결시키면서 사업자들을 매료시켰다.

제이유그룹의 한 전직 간부는 화상회의는 주 회장의 위험관리장치 중 하나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위성화상회의를 통해 자신과 회사에게 불리한 소문 등을 반박하는 등 사업자들의 불안감을 해소시켰다"며 "그 현장감에 압도돼 설사 거짓말이라도 안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 간부는 "그는 영업분야에서도 천재지만 미디어를 활용해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분야에서도 천재"라며 "디지털과 샤머니즘의 만남이야말로 주수도 신화의 총체"라고 분석했다.

주수도 회장을 둘러싼 '거짓말 의혹들'

▲ 주수도 제이유그룹 회장.
ⓒ 제이유피닉스 홈페이지
주수도 제이유그룹 회장(50·구속중)이 언론 등을 통해 밝힌 이력 중 일부가 허위라는 의혹이 일고 있다.

먼저 그가 울산 앞바다 조개섬의 염전집에서 태어났다는 주장부터 미스터리다. 기자가 울산시청 관광과에 확인한 결과, 조개섬은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 주요 염전지대가 서해안이라는 점에서 '울산 앞바다 염전집 출생' 주장도 신빙성이 떨어진다.

또 그가 주장하는 학력들도 의문투성이다. 그는 지난 2004년 경제주간지 <이코노믹리뷰>와의 인터뷰에서 "고등학교는 학비가 면제되는 국립 부산공전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후 검정고시로 방향을 바꿔 1년 6개월 만인 75년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며 "그 후 대학 입학과 동시에 잠시 방황하다가 학원에서 영어강사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그는 대입 검정고시를 통과한 뒤 어느 대학에 합격했는지를 전혀 밝히지 않아 의혹은 더욱 커져가고 있다. 일각에서는 그가 영어강사 시절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고 홍보했다는 주장도 있다.

한때 주 회장과 사업을 함께 했던 한 인사는 "과거 90년대 중반 일영인터내셔널이라는 다단계 회사를 경영할 때에는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하고 1년 뒤에 (미국으로) 유학갔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의 학력을 둘러싼 의혹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86년 미국 컬럼비아 퍼시픽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주변인사들은 "그는 1년 이상 해외에 나가 본 적이 없다"며 그의 '미국 유학 주장'에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

물론 퍼시픽대는 통신강의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경로를 통해 학위를 취득했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는 언론 등과의 인터뷰에서 "미국 유학을 갔다 왔다"고 분명히 밝힌 바 있어 여전히 의혹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또 그는 주변사람들에게 87년 신민주공화당에 입당한 뒤 강남구 지구당위원장을 맡아 총선(13대)에 출마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한 결과, '주수도'라는 이름으로 총선에 출마한 후보는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87년 김종필 공화당 총재의 눈에 띄어 잠깐 정치에 몸을 담았다가 학원사업까지 함께 망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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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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