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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독일의 분단과 통일 문제를 공부하는 역사가입니다. 대략 4년전 베를린의 연방정부문서보관소에서 우연히 동독시절 조선(북한)유학생과 동독 여학생들 사이의 사랑과 이에 대한 양국의 통제에 대한 여러 자료들을 보았습니다. 관련된 10여 명의 동독여성들 중, 남편과 함께 조선(북한)으로 갔다가 혼자 다시 돌아온 경우,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에 함께 서독으로 넘어간 경우, 하루아침에 생이별을 한 경우 등이 있습니다. 아래에 소개하는 레나테 홍 할머니는 특히 지금까지 남편을 기억하며 기다리는 극히 드문 경우입니다.

홍 할머니는 2년전 독일 친구의 소개로 예나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할머니의 생애를 20세기 후반 냉전과 국제 정치 갈등과 관련된 현대사적 맥락 속에서 재구성하여 이 비극적 삶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도록 하는 것이야 역사가로서 제가 추후 본격적으로 매달릴 일이지만, 일단 개략적인 내용을 편지 형식을 빌어 소개합니다. 사람찾는 수소문을 기간에 몇 차례 해보았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레나테 홍 할머니 뿐 아니라 <오마이뉴스>를 통해 많은 이들이 함께 오작교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기자주>


▲ 1961년 3월 첫째 아들 홍현철과 찍은 가족 사진. 홍옥근씨가 북한으로 돌아가기 바로 한달 전 찍은 사진이다.
ⓒ 이동기

홍옥근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여긴 독일입니다. 독일 사람으로 홍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상상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곳 예나(Jena) 시에는 홍씨 성을 가진 한 독일 가족이 있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나 홍씨'의 시조인 조선 땅 함흥에 살고 있을 1934년생 홍옥근,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지난 주말은 독일의 구동독지역 이 곳 예나 시에 사는 홍 할머니의 생일이었습니다.

당신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홀로 키운 독일인 부인 레나테 홍(Renate Hong)은 며칠 전(7월 29일) 69세의 생일을 맞아 당신의 아들, 손자들과 함께 이 곳 예나에서 식사 모임을 가졌습니다. 남편 없이 맞는 45번째의 쓸쓸한 생일상이었습니다. 남편인 당신은 1961년 4월, 한살배기 큰 아들과 이제 갓 모태에서 자라고 있던 둘째를 두고,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과 6년을 함께 보낸 사랑하는 부인 레나테를 두고 당신의 조국 '조선'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 뒤 지금까지 레나테는 여전히 당신을 기다립니다.

수십 년의 기다림과 외로움, 무력감의 세월은, 행복했고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기억하며 달래기에는 참으로 길고 속절없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홍 할머니는 여전히 단정하고 화사하며 친절하고 맑은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할머니가 자주 말하는 ‘실낱같은 희망’이 할머니를 지켜주는 버팀목입니다. 남편을 다시 만나는 기적 같은 일에 대한 희망 말입니다. 할아버지, 살아계심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소설과 영화보다 더 극적인 이 할머니와의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에 다시 등장해 주세요!

▲ 1956년경 예나 대학 기숙사에서 촬영한 사진이다.(사진 왼쪽) 당시 동독에는 350명의 북한 유학생이있었다. 홍옥근씨는 예나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다. 오른 쪽은 동독에 도착해 처음 촬영한 증명사진.
ⓒ 이동기
홍옥근과 레나테의 만남, 사랑 그리고 결혼

조선 청년 홍옥근과 게르만 아가씨 레나테 클라이넬레(Renate Kleinele)는 1955년 가을 신학기 개강과 동시에 예나 대학에서 처음으로 만난다. 이제 막 20살을 넘긴 청년은 평안북도 운전군 동창리 출신으로 1954년 조선(북한) 정부에 의해 제3차 동독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그는 10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대륙을 가로지는 십수 일동안의 기차여행을 거쳐 1954년 9월 동독의 라이프치히 시에 도착한다.

이미 동독은 한국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사회주의 국제주의 연대'를 표방하며 1952~1953년 겨울 1차로 103명, 1953년 9월 130명 등 조선(북한)학생들을 받아들였다. 한국전쟁과 그 직후에 온 이들 조선(북한) 유학생들과 전쟁고아들은 또 다른 동서 냉전의 대결장이자 민족 분단국인 동독에서 '반미투쟁의 모범'으로 대대적으로 환영받았다.

홍옥근은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독일어를 배운 뒤 1955년 9월 예나로 옮긴다. 이 곳에서 그는 1960년 3월까지 화학을 공부해 석사 과정 학업을 마친다. 구 동독 외무부 자료에 의하면 1957년 말 현재 동독 전역에 350명의 조선(북한) 유학생이 있었다(동독에 수용된 북한 고아 숫자는 대략 600명 정도). 상당수의 학생들이 드레스덴 공대에서 공부를 한 반면, 그 중 약 10명 정도가 예나에서 주로 화학과 물리학을 공부했다.

1955년 9월 초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홍옥근은 이미 첫 강의에서 같은 화학과의 동료 새내기 레나테를 만난다. 레나테와 거의 매일 같은 수업을 받던 홍옥근은 곧 레나테에게 자신의 호감과 관심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솔직하게 밝힌다. 미남 청년 홍옥근은 드디어 9월 중순의 어느 날 신입생 환영 춤 파티에서 특유의 적극성으로 수줍어하고 소극적이었던 레나테의 마음을 갖는데 성공한다.

물론 레나테에게 이미 그는 다른 무엇보다 "똑똑하고 활달하고 재미있고 멋있는 남자"였다. 홍옥근은 성실하여 학업성적도 단연 우수했고, 1960년 졸업 시에는 최고 학점을 받는다. 독일어도 완벽하게 구사했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단연 신망이 높았다. 레나테와 홍옥근이 같이 만드는 시간은 아름다웠다.

▲ 1956년경 홍옥근씨와 레나테 홍의 연애시절. 당시 친구가 촬영한 것을 최근에야 받았다.
ⓒ 이동기
하지만 모든 것이 항상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외국인에 대한 적대행위와 인종주의 때문이었다. 1950년대 동독의 작은 대학도시에서 극히 보기 드문 커플(아시아 남자와 독일 여자)이었던 그들은 거리나 공공장소에서 심심치 않게 외국인 적대행위를 겪게 된다. 레나테의 부모들도 그들의 연애와 결혼을 결코 환영하지 않았다. 다만 홍옥근의 사교성과 됨됨이가 어느 정도 문제를 중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1960년 4월 20일 둘은 결혼하고, 그 해 10월 첫째 아들이 태어난다. 아비 홍옥근은 아이의 이름을 홍현철(독일 이름 페터 홍, Peter Hyon Zol Hong)이라고 짓는다. 일찍이 본 적 없던 동아시아인과 유럽인 사이의 혼혈아는 작은 도시에서 그 자체로 센세이션이었고, 주변 친구들의 큰 사랑을 받는다. 물론 두 부부에게는 거리나 공공장소에서 인종주의적 편견을 견뎌야하는 힘든 과제가 여전히 놓여 있었다. 그래도 아이는 너무 예뻤고 둘은 행복했다.

그런데 또 다른 파고가 이 가정에 닥쳐오고 있었다. 1960~1961년 극으로 치닫는 동서냉전과 국제정치적 갈등, 그리고 독일 분단의 파고는 이 조(한)-독 가정에 그대로 밀어 닥친다.

1961년 4월 15일 그리고 그 후

1961년 4월 15일이다. 그 날, 홍옥근은 졸업 후 실습생활을 하고 있던 비텐베르크시에서 급히 예나로 내려온다. 그 다음날로 곧장 조선(북한)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1960년을 정후하여 냉전이 위기로 치닫고 독일 분단이 고착화 될 조짐을 보이자 당시 많은 수의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빠져나간다. 이에 대응해 동독 정부는 소련의 재가를 얻어 베를린 장벽을 세운다. 이런 간단치 않은 상황에서 조선(북한) 정부도 일시적으로 동독 유학생들을 전원 소환한다. 홍옥근은 레나테와 아이를 데리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레나테는 갈 수 없었다. 한 살짜리 첫아들에 이어 다시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의 레나테는 당시 몸이 약해 도저히 최소 2주일이나 걸리는 그 먼 기차 여행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아울러 남편이 당연히 다시 동독으로 돌아오거나 자신이 나중에 아이들을 데리고 북한으로 갈 수 있음을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그 곳은 '사회주의 형제국'이니까! 어쨌든 그렇게 밤을 밝히다 홍옥근은 레나테와 아이들을 두고 다음 날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동독을 떠난다.

조선(북한)으로 돌아온 홍옥근은 함흥에서 일자리를 얻는다. 당시 그의 주소는 '함흥시 본궁구역 이동 2.8 비날론 합성직장 서구 합숙'이었다. 함흥의 홍옥근과 예나의 레나테 부부는 1961년 4월부터 1963년 2월까지 편지를 통해 거듭 사랑을 확인하고 가정의 미래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한다.

그러나 홍옥근은 다시 동독으로 오지 못하고 그 후 몇 년간 레나테가 조선(북한)으로 입국하려는 시도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로 모두 좌절된다. 1963년 2월 미묘한 암시가 깔린 편지를 마지막으로 함흥에서는 더 이상 편지가 오지 않았다. 레나테는 거듭 편지를 보내보지만 불어로 '수신자 불명'이란 딱지를 달고 되돌아올 뿐이었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레나테는 남자 아이 둘을 홀로 키우며 고등학교 화학선생을 거쳐 예나의 예나 팜(Jenaer Pharm)이라는 제약회사에서 1993년까지 직장생활을 이어간다. 경제적으로 레나테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아울러 동독은 탁아시설이 훌륭했고 직업여성들에게 큰 불편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레나테는 남편 없이 남편의 성을(홍씨 부인 Frau Hong이라 불림) 갖고 두 혼혈아들을 기르며 동독 사회의 인종주의적인 편견의 벽에 심심찮게 부딪혀야 했다. 레나테는 재혼을 하지 않았다. "두 아들에게 또 다른 아버지를 갖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다. 아이들은 자라 저마다 가정을 일구었다. 특히 둘째 아들은 부모와 마찬가지로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인근도시 바이마르에서 살고 있다. 손자들의 얼굴에서 홍옥근의 흔적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들은 모두 '예나 홍씨'가족이니까.

20평 남짓한 아파트에 고양이와 사는 홍 할머니의 주요 일과 중 하나는 저녁 뉴스를 보는 것이다. 할머니는 방송과 신문에서 한국(북한)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어떤 것이든 빠트리지 않고 챙겨보고 있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과 만나는 일은 할머니의 일과 중 가장 가슴 설레는 일이다. 그렇게 홍 할머니는 한국(북한)과 얽힌 자신의 삶을 홀로 이어가고 있다. 홍옥근을 기다리면서!

▲ 2005년 겨울 기자가 촬영한 레나테 홍. 남편과 헤어진지 45년, 하지만 한시도 그를 잊은 적이 없다.
ⓒ 이동기
이제 평양으로 선생님을 만나러 가겠습니다

함흥의 홍옥근 선생님! 당신의 부인 홍 할머니는 이제 그냥 기다리고만 있지 않기로 했습니다. 지난 주 생일모임에서 할머니는 당신을 만나러 조선(북한)으로 여행을 떠날 생각임을 밝혔습니다. 나이와 건강을 고려하면 이제 더 이상 늦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준비가 되는대로 할머니는 "꼭 한번 가보고 싶은 땅" 그 곳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부터 할머니는 제게 거듭 확인 차 물었습니다.

"그가 설사 거기서 재혼을 했다고 하더라도 분명 이 곳에 있는 가족들을 보고 싶어 하겠지요?"

홍 선생님이 직접 답하셔야 합니다. 이미 비슷한 사연의 또 다른 이야기도 소개된 바 있고, 분단이 빚은 슬픈 사연들이 국내에서만도 한 둘이 아닙니다. 홍 할머니 이야기를 접한 많은 이들이 안타까움에 가슴을 내리지만 누구도 할머니를 도울 방법을 선뜻 내지 못합니다. 홍 선생님이 직접 나서야 합니다. 올 가을이나 내년 봄 할머니가 그 곳으로 먼 걸음을 나서면 할아버지가 한 발짝이라도 더 나와 맞으셔야할 것입니다. 레나테가 45년 세월을 가로질러 당신을 만나러 그 곳으로 간단 말입니다. 그 때까지 건강하세요, 제발!

평양의 박시옥 선생님! 선생님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얼마 전에 예나 대학에 물리학 관련 학술 교류 차 왔다가 홍 할머니를 직접 만나고 돌아가셨습니다. 선생님은 예나 유학시절 두 분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고 들었습니다. 할머니는 조선(북한)에 가면 선생님이 도와주실 것이라 믿고 계십니다.

아울러 1950년대 후반 예나에서 같이 공부하신 리(이)호열, 김동성 선생님! 특히 리호열 선생님도 89년 예나에서 홍 할머니가 어떻게 살고 계신지 알고 돌아가셨습니다. 누구라도 나서 까치가 되어 오작교를 만들어야겠습니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다른 조선(북한) 분들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레나테의 나라 독일이 통일된 지 16년, 이제 홍옥근의 땅 한반도에서도 평화와 통일의 세계사적 물줄기가 도래했다면 그 흐름을 타고 그들이 다시 만나야하는 것은 그들이 누릴 당연한 권리이자 운명일 것입니다. 냉전체제 아래 두 개의 민족 분단이 빚은 한 조(한)-독 가정의 사랑과 이별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재회라는 마지막 장이 남아있습니다. 예나의 홍 할머니는 오늘도 저녁이면 텔레비전을 켜고 뉴스에서 한반도발 평화와 화해, 만남과 통일의 새 소식들이 들려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홍 할머니는 이미 조선(북한)과 한국 관련 여행 책자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45년만의 재회를 위하여!

독일 예나에서 이동기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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