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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저지 제1차 범국민대회'가 15일 오후 서울 대학로에서 1만여명의 농민, 노동자, 영화인, 학생 등이 참석한 가운데 270여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한·미 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주최로 열렸다. 집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횃불과 각종 상징물을 들고 종각네거리까지 행진을 벌인 뒤 자진해산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동트는 새벽녘 나는 달리고 있어요.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어느 하늘 아래를 말이죠. 태양이여, 부디 나를 들키게 하지 말아다오. 이민국에 신고되지 않도록 말이에요."

목숨을 걸고 거대한 장벽과 막막한 사막에 가로 막힌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탈출하는 멕시코인들의 애절한 탈출기를 노래하는 '돈데보이'(Donde Voy,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의 한 대목이다.

지금까지 이 탈출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은 1만여명으로 추산된다. 나프타(NAFTA 북미자유무역협정) 체결로 미국 거대자본은 멕시코의 농촌과 기업을 완전히 장악했고,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최저생활도 보장되지 않는 '마킬라도라'라는 미국 제조업 공단으로 흡수되거나 노점상으로 전락했거나 아니면 죽음을 각오하고 미국으로 탈출했다.

멕시코로 진출한 미국기업들은 자국 안에서는 엄두도 못내던 일을 저지른다. 미국의 폐기물처리회사는 제대로 된 시스템도 없이 산업폐기물을 멕시코에 묻었고, 그 결과 지하수 오염 등으로 인해 인근 지역주민들은 암 등 질병에 시달리고, 기형아들을 출산하면서 죽어나갔다.

나프타의 잔혹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역주민들의 강력한 항의로 건설허가를 내주지 않자 미국 기업은 멕시코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비공개 분쟁처리절차는 165억원이라는 막대한 배상책임을 멕시코 정부에게 부과했다. 이름하여 '투자자의 정부 제소권'의 위력이다. 결국 멕시코는 2003년 국가파산상태인 모라토리움 선언을 하게 되었다.

현재 미국과의 FTA체결을 위해 2차 협상을 진행 중인 우리 정부는 이러한 멕시코의 사례에 대해 '부정적인 단면일 뿐'이라고 하거나 '멕시코와 우리는 다르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일방적인 양보로 일관된 협상과정의 철저한 비공개, 통계조작을 통한 허위 연구결과발표, 기만적인 공청회, 대대적인 정부정책 홍보물 배포, TV광고 등의 방법으로 나프타를 밀고 나간 살리나스 정부의 행태를 빼다박은 듯 따라하고 있는 노무현정부의 한미FTA 체결과정을 보면서 멕시코의 현재는 우리의 미래라는 참담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대국과의 FTA는 경제소국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게 되므로 통상 후진국들은 강대국과의 FTA를 '낮은 수준'으로 체결한다. 후진국은 그만큼 지킬 게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는 '높은 수준의 FTA'를 체결할 경우, 70%인 대외의존도를 더욱 높여 허약한 국내경제를 파국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높은 수준'만을 고집한다.

정부대표단이 인정한 바와 같이 한미FTA는 미국시장으로의 편입이고, 천문학적 쌍둥이 적자로 위태로운 미국경제체제에 대해 방어막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프타와 같은, 아니 그 이상인 '악마와의 키스'이다.

'동북아의 허브, 균형자'가 되겠다던 야심찬 국가계획을 하루아침에 폐기하고, 미국으로 편입되겠다는 섣부른 정책선회, '양극화 해소'를 주된 공약으로 내세운 대통령이 '양극화의 극심화와 공공성의 파괴'를 예고하는 한미FTA를 강행하는 것을 보면서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다.

실패한 듯한 '대연정'은 한나라당과 보수언론들의 한미FTA 찬사를 받으며 드디어 실현되었다. 정부의 미친듯한 질주를 견제해야 할 국회는 완전히 무기력하다. 미국 의회가 협상 개시부터 과정과 결과에 대한 강력한 감독권을 행사하는 동안, 우리 국회는 헌법상 '조약의 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갖고 있으면서도 본 협상의 내용에 대해서 까막눈이다.

1차 협상의 내용은 미국에서의 언론 보도를 보고 알았단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한미FTA는 최대한 천천히, 모든 가능성을 검토해 공개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문민정부의 다급한 OECD 가입의 결과 국제신인도가 폭락하면서 사상 최대의 경제위기를 초래해 아직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국일보> '아침을 열며' 2006년 7월 11일자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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