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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혜경/그림 김수자 기자

저 안에서 세상을 그리워한 적이 있었다
누군가에겐 유유자적 부러울 생이
무거워 들끓는 대낮의 포도를
그리워한 적이 있었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고단한 하루
음악이 온 몸을 적시며 위로가 되던 날,
윈튼 마샬리스의 트럼펫이
노을을 검게 물들이던 날,
버스는 오지 않고 그대도
더는 오지 않던 날,
그날부터 생이 저녁처럼 서서히 저물었다.

이 밖에서 저 안을 그리는 지금
윈튼 마샬리스의 트럼펫이
하늘의 천장을 칠 때
천사들은 이 아래를 그리워하리라.


▲ 그 안에선 어항 속의 물고기만 같았다.
ⓒ 김수자
밖에 서 있는 이에게는 한없이 한가로워 부럽게만 보이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윽한 불빛 아래서 홀로 커피를 마시는 찻집 주인을 보면, 저 이는 참 좋겠다 싶습니다.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는 막막한 심사가 바깥까지 전해질 리 없으니, 영원히 풍경이 될 수밖에는 없는 일상입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얼마간 한 평 남짓한 레코드 가게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MP3는 고사하고 CD도 나오기 전이니 퍽 오래 전 일입니다. 대학교 앞에 자리한 그 가게는 대형 수족관 같았습니다. 진열된 레코드들이 잘 보이도록 전면이 다 유리였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이 분주하게 학교를 향해 걸음을 재촉할 때, 나는 종로5가 도매상에서 떼어온 물건 보따리를 들고 낑낑대며 가게로 향했습니다. 가방을 메고, 옆구리에 책을 끼고, 씩씩하게 학교로 가는 학생들 무리에 섞여 오르막길을 걷다보면 여름이 아니어도 땀이 흠씬 나곤 했지요.

교문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가게에 도착해 자물통을 열고 셔터를 올리고 수족관 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왜 매일 반복되는 일상임에도 그때마다 새삼스레 목이 뜨거웠는지요. 어떤 일들은 아무리 되풀이해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음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아주 가끔은 경험으로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그게 그랬습니다.

레코드를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커피 한 잔을 마십니다. 손님들마다 말합니다.
"정말 좋으시겠어요. 좋아하는 음악 들으면서 일하니까."

좋았습니다. 겨울 아침 같은 비탈리의 샤콘느, 가을 벌판처럼 막막한 브람스 현악 6중주, 저녁 어스름 골목길을 걷는 듯한 키스 자렛의 마이송을 다 거기서 처음 들었으니까요. 그뿐만이 아니었지요. 가게 앞 거리가 온통 돌멩이와 매캐한 최루탄 연기로 가득할 때면, 꽃을 던지듯 세상을 향해 모차르트를 있는 힘껏 틀어놓는 그 기분, 아마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겁니다.

그래요, 좋았어요. 무엇보다 좋았던 건 기다리는 얼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유리창의 성에처럼 내 마음에 피어 있는 그 얼굴이 있었기에, 모든 수치를 견딜 수 있을 만큼 좋았습니다. 그의 얼굴이 수족관 밖에 무지개처럼 떠오를 때면, 음악조차 귀에 닿지 않았습니다. 허나 돌아보면, 그 얼굴 때문에 더는 견딜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지켜보는 시선을 피할 수 없는 수족관의 금붕어는, 그래서 잠을 잘 때도 차마 눈 감지 못하는가 봅니다.

밖에 있는 사람은, 안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밖을 그리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게 경계가 생기고 한숨이 안개처럼 피어 오릅니다. 하지만 새가 가시덤불에 둥지를 틀 듯, 날 선 가슴에도 기다림은 깃들어, 눈 뜨고 자는 나를 가엽게 보는 눈길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안은 밖 그리고, 밖은 안에 머뭅니다. 그 어긋남이 실은 어긋남이 아니라 그리움임을, 그 그리움이 사람을 살게 하는 힘임을 사랑을 보내고 알았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경계에서 꽃을 피웁니다.

▲ 추억을 불러온 작은 레코드점.
ⓒ 김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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