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사대부 또는 재지사족이 지배하는 조선 양반사회는 토지를 기반으로 한 관료사회였다. 지배계급이었던 양반들은 땅(토지)을 경제적 기반으로 하여 권세를 누렸는데, 유학(성리학)의 중요한 이념이랄 수 있는 덕(爲民)을 실천하고자 했던 집안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덕(德)이나 적선(積善)은 요즘 말하고 있는 '사회환원', '기부'라는 의미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덕으로 위민하라

경상도 지역에서 대표적인 만석꾼 집안으로 알려진 경주 최씨 집안이 있다. 이 집안은 조선후기 10대에 걸쳐 약 300여년 동안 만석꾼의 부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재산(부)을 유지하고 경영했던 방법이 유교적 덕(위민)을 실천했음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가업(家業)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인데 최부자집에서는 일년동안의 농사(소득)중에 3분의 1을 외부인(손님접대, 적선 등)을 위해 지출했다고 한다. 춘궁기에 쌀을 풀어 나누어 준다든지, 찾아오는 손님을 박대하지 않고 잘 대접하였으며, 사랑채에 머물고 간 손님에게 노자 돈까지 주어 보냈다는 것이다. 양반집의 사랑채는 많은 문인식객들의 교류의 공간이기도 하였는데 이 사랑채 공간이 덕으로 베풀어졌던 것이 최부자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한 부와 재산을 소유할 때만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일종의 나눔(기부)을 통해 인심을 얻고 존경받는 집안으로 경영해 나갔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혼자만 부를 지킨 것이 아니라 더불어 잘 살면서 자신의 부도 지켜 나간 것이다.

조선의 양반관료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를 보살필 줄 알았던 이러한 부분은 제도적인 장치보다는 유교적 덕목으로 실천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기부(위민)정신을 어초은 윤효정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부분은 소학(小學)의 성리학적 실천윤리를 담고 있다.

조선전기 사림파 학자인 조광조(趙光祖)는 유학에서의 이상적인 정치인 '도치(道治)'를 주장한다. 또한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백성을 위해 위민(爲民, 愛民)할 것을 말한다. 이것이 유학에서 말하는 민본위민의 성격이며 이는 곧 유학의 실현이자 소학(小學)에서 주장하는 '실천사상'이라는 것이다.

▲ 어초은 윤효정의 제각인 추원당은 녹우당 동북쪽 숲속에 자리잡고 있다.
ⓒ 정윤섭
해남 윤씨가 족보 첫 머리에는 어초은 윤효정이 어려운 지경에 이른 백성들을 3번이나 구제해 주어 '삼개옥문적선지가(三開獄門積善之家)'라는 칭함을 얻게 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세금(稅米)을 내지 못하여 옥에 갇히는 무리들이 많아 옥안이 가득 찼다. 이에 효정공이 가련하게 여겨 미곡을 내서 관부(官府)에 대신 받쳐 이들을 풀어주었는데 이렇게 하기를 3번이나 하였다.'

이로 인해 녹우당 해남 윤씨가에서는 지금도 후손들이 집안의 제일 덕목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 '삼개옥문적선지가'이다. 26세에 성균관 생원이 되고 후학을 계도하며 없는 자를 구휼하며 살았다는 윤효정이 일찍부터 소학(小學)의 이념을 실천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어초은 윤효정으로부터 시작된 해남 윤씨가의 소학 중시는 사림파적 학맥속에서 고산 윤선도와 윤두서, 윤덕희 등 후대에 이어져 해남 윤씨가 가학의 밑바탕을 이룬다.
이러한 소학을 집안의 학문으로 정립시키고 이를 후대에까지 전하도록 한 이는 고산 윤선도다. 고산 윤선도는 특히 <소학> 교육을 중요시하였는데 이러한 경향은 후손들도 잘 준수하여 하나의 가법(家法)으로 삼았다.

소학 속의 실천윤리

고산 윤선도는 이러한 소학의 중요성을 '충헌공 가훈(忠憲公家訓)'을 통해 자손들이 대대로 이를 따르도록 한다. 충헌공 가훈은 고산이 74세에 함경도 삼수로 유배되어 있을 때 아들 인미(仁美)에게 보낸 편지로 그 속에는 그가 평소 추구했던 사상들이 잘 나타나 있다. 고산은 '적선(積善)'과 '근검(勤儉)'이 집안을 융성하게 하는 최고의 덕목임을 내세우며 이를 꼭 지켜나가도록 당부한다.

이러한 소학정신을 고산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는 그대로 잇고 있다. 공재의 학문적 성취는 증조부인 고산 윤선도대(代)에 의해 형성된 가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고산이 소학을 중시하고 이의 실천을 강조했던 것처럼 윤두서 또한 고산의 뜻을 이어 <소학>을 중요시하고 후손들에게 이를 지켜줄 것을 당부하였다.

해남 윤씨가에서 추구하는 소학의 밑바탕에는 실천적 위민사상이 짙게 깔려있다. 이러한 사상을 공재 윤두서는 충실히 이어가는데 이는 공재의 인간적인 면모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공재는 서울에서 내려와 해남에서 생활할 때 그가 장(庄)을 짓고 머물렀던 현산면 백포에서 이곳 사람들을 위해 자활의 길을 열어 주었다는 기록이 '해남 윤씨문헌(海南尹氏文獻)' 공재공행장에 잘 나타나 있다.

'그해 마침 해일(海溢)이 일어 바닷가 고을은 모두 곡식이 떠내려 가고 텅빈 들판은 벌겋게 황토물로 물들어 있었다. 백포(白浦)는 바다에 닿아 있었기 때문에 그 재하(災害)가 특히 우심(尤甚)하였다. 인심이 매우 흉흉하게 되어 조석(朝夕)간에 어떻게 될지 불안한 지경이었다. 관청에서 비록 구제책을 쓰기는 했으나 역시 실제로는 별다른 혜택이 없었다. 백포의 장에 이르는 사방 산은 사람들의 출입이 없고 또한 나무를 기른지 오래되어 나무가 꽤 무성했다. 공재공은 마을사람들을 시켜 합동으로 그 나무들을 벌채하고 소금을 구워 살길을 찾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한마을 수백호의 주민이 이에 도움을 받아 모두 굶어죽지 않고 살아나 떠돌아다니거나 죽는 일이 없게 되었다.'

이같은 모습은 윤효정과 윤선도가 실천한 소학 속의 위민사상과 공통점을 이루며 왕도정치(王道政治)에서 국가존재의 기본이 민(民)에 있기 때문에 정치의 궁극적인 목적 또한 보민(保民) 즉, 민생의 보장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 실학자 성호 이익의 사상과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민본사상은 고산 윤선도가 후손에게 남긴 충헌공 가훈에서도 엿볼 수 있었던 부분으로 윤효정으로부터 시작된 가학의 전통이 고산 윤선도를 거쳐 공재 윤두서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불천위로 모시고 있는 어초은 사당.
ⓒ 정윤섭
불천위(不遷位) 공간

어초은 윤효정은 녹우당에 입향하여 해남 윤씨가의 기틀을 세우는데 녹우당의 전체적인 공간영역을 보면 어초은 윤효정의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녹우당 고택에서 뒤편으로 100여m 떨어진 덕음산 아래에는 어초은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고택의 담장 밖 바로 뒤에는 어초은 사당이 있다. 이곳에서 다시 북동쪽 100여m쯤 떨어진 곳에는 어초은 제각인 '추원당'이 자리잡고 있다.

어찌보면 녹우당은 입향조인 어초은을 호위하듯 감싸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죽어서도 후손들을 지켜주려는 선조의 뜻이 담긴 것인지 자신들을 지켜주기를 바라는 후손들의 열망이 이러한 형국을 갖추게 한 것인지, 아무튼 조상의 영혼이 떠도는 공간과 살아있는 후손들이 같은 공간 속에 공존하고 있는 느낌을 갖게 한다.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마을공간의 세계를 보여주는 곳이 녹우당이라 할 수 있다.

녹우당에는 불천위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부조묘가 어초은 사당, 고산 사당 두 곳 있다. 불천위 사당 2곳이 한 집안에 있는 곳도 유례가 없을 것 같다. 불천위(不遷位)제사는 '위패가 움직이지 않는 제사' '영원히 제사를 지내는 분'이라는 의미가 있다.

불천위는 학덕이 높은 현조(賢祖)나, 국가 사회에 공이 커서 시호(諡號)를 받았거나 서원에 배향 되었거나 또는 쇠락한 가문을 일으킨 중흥조 등 영세불가망(永世不可亡)의 조상으로 몇 백년까지라도 제향을 끊을 수 없는 현조에게 4대가 지나서도 끊지 않고 계속 제사를 지내게 된다.

그래서 일반 사당은 3대 혹은 4대 조상의 위패를 모시지만 부조묘는 자손 대대로 불천위로 제수된 조상의 위패와 기제사를 모시게 되며, 집안의 대소사(大小事)와 절기마다 사당에서 의례 행사를 하게 된다.

불천위 제사를 위해서는 대개 문중의 위토답이 있는데 해남 윤씨집안은 연동리 일원과 신안리, 고수골에 있으며 이 위토답은 종손도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문중 재산이다.

▲ 입향조 어초은의 묘가 녹우당 뒷편 적송으로 둘러쌓인 숲에 자리잡고 있다.
ⓒ 정윤섭
녹우당은 일반적으로 고산 윤선도의 고택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풍수지리적 공간배치나 여러 의미를 통해 볼 때 이곳은 입향조인 어초은 윤효정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나라의 도읍지나 현치소, 마을터를 얼마나 잘 잡느냐에 따라 흥망성쇠가 결정된다는 것을 볼 때 어초은은 이곳을 거의 완벽한 터로 가꾸어 놓은 셈이다.

덧붙이는 글 | 녹우당 해남 윤씨가의 5백년 역사속으로 떠난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