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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자재암!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음을 설파한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에 대한 설화가 흐르는 곳이다.
ⓒ 임윤수
사람이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다면 세상에 못 이룰 것이 하나도 없고 안 될 일도 하나 없을 겁니다. 마음대로라면 세상을 호령하는 군주가 못될 것도 없고, 마음에 두고 있는 절색미인과 흥건한 사랑타령 한 번 못 나눌 일도 없습니다.

역시 마음대로라면 요즘 밤잠을 설치게 하는 월드컵대회에서도 그깟 16강이나 4강이 아니라 우승도 문제 될 것이 없을 겁니다. 그러나 실상에선 담배를 끊거나 술을 안 마시는 일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거창하게 의지력이니 뭐니 말들을 하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쉬운 일일수도 있고 어려운 일일수도 있는데 그게 잘 안됩니다. 그냥 마음 편하게 '안 먹고 안 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 어려울 일도 아닐 텐데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 마음이니 마음의 실체가 궁금합니다.

이뿐입니까. 세상에 태어나 자각하는 순간부터 마음대로 되었던 일이 한 번인들 있었을까 싶습니다. 공부는 해야 하는데 졸음이 쏟아지니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고, 잊어야 하는데 잊어지지 않으니 마음 아닌 마음과 육신을 포함한 매사가 마음가는 길에 걸림돌일 뿐입니다.

▲ 일주문을 들어서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원효폭포가 발길을 맞아준다.
ⓒ 임윤수
마음은 유형도 무형도 아닙니다.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게 마음입니다. 딱히 마음의 실체를 설명하라고 하면 궁색한 설명들이 반복되지만 없다고 단정해 버릴 수도 없는 게 마음입니다. 마음이란 것은 냉철한 판단력을 근거로 한 이성(理性)일 수도 있고, 펑펑 눈물 흘리고 박장대소하게 하는 감성(感性)일 수도 있습니다. 살육을 서슴지 않는 잔인함 일수도 있고, 미물의 상처에도 눈물 흘려주는 온정 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은 참 변덕스럽습니다. 상대적이란 표현을 쓸 수도 있지만 변덕스럽다는 게 더 솔직한 표현일 듯싶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나 물결처럼 상황과 감정에 따라 잠시도 멈추지 못하기에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

한국의 고승을 대표하는 한 분이 원효대사입니다. 그 원효대사가 깨달음의 결정체로 남긴 일성(一聲)은 다름 아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어렵게 얘기할 것 없이 '모든 일은 마음이 만들고, 마음에 따라 생긴다', 한마디로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지극히 평범한 말입니다.

▲ 바위와 돌담이 만들어낸 진입로가 절 찾아가는 길을 장식하고 있다.
ⓒ 임윤수
자재암(自在庵)은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 소요산(逍遙山)에 있는 작은 암자로 654년, 신라 무열왕 1년에 원효(元曉)대사가 창건한 절이라고 합니다. 한 때 소요사나 영원사로 불리기도 했지만, 1909년 성파스님과 제암스님이 절을 중창하며 본래의 절 이름이었던 자재암으로 고쳐 불렀다고 합니다.

자재암이 있는 소요산은 그 입구부터가 단풍나무 일색입니다. 한여름 단풍은 그 빛이 푸른색 일색이지만 가을이 되면 일품일 가을단풍이 그려집니다. 설악의 단풍이 좋고 내장산 단풍이 좋다고들 하지만 자재암으로 가는 소요산 자락에서 만나게 되는 단풍 또한 여타의 절경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 한 번 들어가면 깨우치지 않으면 나오지도 않을 듯 출입문이 굳어만 보인다.
ⓒ 임윤수
매표소를 겸한 일주문을 들어서 저만치 시원하게 물줄기 쏟아내는 원효폭포가 보입니다. 움푹 파인 물웅덩이로 물이 내려앉습니다. 어떤 물은 미끄럼 타듯 바위에 기대 흐르고 어떤 물은 내려꽂히듯 곧장 떨어지며 하얀 물방울을 주변에 뿌려 댑니다. 물이 아주 맑습니다. 깊지 않은 웅덩이지만 주변의 산세를 거울처럼 담아 맑게 비추고 있습니다.

쏟아지는 물줄기에 반질반질 다듬어진 작은 돌들이 알몸으로 드러납니다. 잠시 멈춰 옥죈 신발을 풀어놓고 발을 담그니, 그 시원함과 청아함이 온몸으로 전해집니다.

▲ 자재암 안쪽으로 석굴법당 나한전이 보인다.
ⓒ 임윤수
자재암으로 가기 위해서는 속리교(俗離橋)를 건넙니다. 속세를 떠나 피안의 세계로 접어든다는 속리교를 건너면 주변부터가 달라집니다. 지금껏 걸었던 진입로가 평평하고 잘 포장된 길이었다면 피안으로 접어든 속리교 저쪽은 가파른 계단에 울퉁불퉁한 바윗길입니다.

속리교를 건너 조금 올라서면 갈림길이 나옵니다. 이정표를 보니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공주봉으로 올라 소요산 주능선을 타게 됩니다. 자재암으로 가기 위해서는 좌측으로 나 있는 계단으로 올라갑니다. 폭포의 물줄기가 만들어 내는 리듬 없는 타음이 내림목탁소리처럼 들립니다.

자재암은 원효대사와 부부의 연을 맺었던 요석공주의 설화가 전해지는 곳입니다.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에 가 불경을 공부하려던 원효는 잘 알려진 일화처럼,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간밤에 마셨던 물이 아침에 보니 해골(骸骨)에 고인 물이었음을 알고 토악질을 하며 '일체유심조'를 깨닫게 됩니다.

그 일을 계기로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렸고 "자신의 마음밖에 따로 법이 없음"을 알게 된 원효는 유학을 포기하고 평범한 교리로 부처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신분 고하나 귀천에 관계없이 뭇 대중과 어울리며 알기 쉽게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니 오줌싸개에 코흘리개까지도 원효를 통해 부처님을 알게 하였다고 합니다.

원효, 자루 없는 도끼 요석공주를 만나 설총을 낳다

그런 원효가 '누가 자루 없는 도끼 빌려주면 하늘 떠받칠 재목 만들겠노라'고 큰소리치다 만난 사람이 김춘추의 둘째 누이인 요석(瑤石) 공주입니다. 여기서 자루 없는 도끼란 생명의 근원지인 어머니들의 생식기인 자궁을 표현한 말인 듯하니, 부부의 연을 원했다고 생각됩니다. 첫 남편을 백제전투에서 잃어 과부가 되었지만 매력 있고 불심 깊었던 요석공주가 원효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이들의 만남은 인연인지 필연인지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 나한전은 자연동굴에 앞면을 쌓아 조성하였다.
ⓒ 임윤수
원효가 요석공주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으며 하늘처럼 떠받칠 재목을 낳으니, 그가 바로 신라 10현 중 한 명인 '설총'입니다. 그러나 어쩌리, 속가의 연을 끊지 않고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를 수 없는 걸림돌인 걸. 부부의 연을 맺어 여체를 탐욕하며 끈끈한 육신의 정을 나누던 원효는 홀연히 속세와 연을 끊고 수행의 길을 찾아드니, 그 수행의 은둔지가 바로 이 소요산이라 합니다.

졸지에 남편이 속세를 떠남으로 또다시 과부 아닌 과부가 된 요석공주는 원효대사와 사이에 낳은 설총을 데리고 이곳 소요산으로 들어와 공주봉 기슭에 살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흘러간 시대의 여인이지만 지아비에 대한 그리움이 어떠했으며, 홀어미로 자식을 키워야 하는 한탄이 어찌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요석공주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지금의 일주문 근처로 설총을 데려와 아버지인 원효대사가 수도하는 곳을 향해 세 번씩 절을 시키고 학업에 정진토록 하는 인고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 나한전 안으로 들어가면 전면으로 나한상이 봉안되어 있고, 동굴 천장은 연등으로 장엄되어 있다.
ⓒ 임윤수
속리교 건너 이정표가 있던 갈림길, 공주봉으로 올라가는 오른쪽 작은 계곡에 흐르는 물에 잠겨있던 바위가 붉은 색을 띠는 것은 혹시 요석공주의 피눈물이며, 아녀자의 한탄이 피멍으로 남은 흔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논리적으로야 바위가 철광석이거나 점토질 바위라 붉게 보인다고 설명되겠지만, 요석공주가 생활하던 공주봉에서 흘러내리는 물이라 생각하니 그렇게 생각됩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뒤돌아보니 설총이 절을 올렸다는 일주문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계곡 건너 쪽으로 자재암에 또 다른 자취를 남기셨을 스님들의 흔적인 부도와 탑비가 석축으로 단을 높인 작은 텃밭에 좌선이라도 하듯 나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 나한전에서 바라 본 자재암은 조용하기만 하다.
ⓒ 임윤수
자재암은 가파른 비탈에 매달린 산제비집처럼 길쭉한 지형에 전각들이 나란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터가 넉넉하진 않으나 궁색하지도 않습니다. <自在庵> 편액을 달고 있는 ┎ 형태의 전각은 협소한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뒤쪽 지붕을 덧대 그 처마가 바위에 맞닿아 있습니다.

전각 오른쪽으로 대웅전이 있고 그 오른쪽으로 또 한 채의 전각이 있습니다. 대웅전 왼쪽엔 삼성각으로 올라가는 사이길 계단이 있습니다. 이렇게 일렬로 늘어선 듯 나란한 전각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쌍사자가 받치고 있는 석등이 있습니다. 그 안쪽으로 원효대사가 수행하였던 고행의 공간이며 삶의 공간이었던, 바로 그 자연동굴에 조성된 나한전 석굴법당이 있습니다.

▲ 동굴법당 나한전 바로 앞에도 1년 내내 끊이지 않는다는 폭포수가 있다.
ⓒ 임윤수
석굴법당 입구 오른쪽에 있는 감로수에는 자재암에 얽힌 또 하나의 설화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속세에서 부부의 연과 혈육의 연을 모두 끊고 동굴 앞 초가에서 수행을 하던 원효대사는 다시 한 번 파계의 유혹을 받았으나 이를 극복했다는 설화입니다.

원효, 또 한 번 여인의 유혹에 시험받다

몹시도 비가 나리 던 어느 날 원효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참선을 하고 있었답니다. 그때 비를 흠뻑 맞아 여체의 관능적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미모의 여인이 비를 피해 원효가 있는 초가로 들어왔답니다. 그렇게 들어온 여인은 교태스런 미소와 관능적 몸놀림으로 원효를 유혹했지만, 원효는 마음의 미동 없이 수행에만 정진했다고 합니다.

이미 부부의 정을 맺어 애욕의 달콤함을 경험한 원효에게 관능적 여체의 몸놀림은 금욕을 파괴하기에 충분한 유혹이며 충동이었으나 원효는 이를 잘 극복한 것입니다.

원효는 나중에서야 그 교태스런 여인이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 출현한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었음을 알게 되었답니다. 이렇게 관세음보살로부터 수행자로의 의지력을 시험받은 원효대사가 절하나 지으며, '내 마음 하나만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으로 절 이름을 <自在庵>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나한전 오른쪽으로 촛대처럼 뾰족한 기암이 솟아있습니다. 어림잡아 촛대봉이려니 했더니 옥류봉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옥류봉 오른쪽으로는 또 하나의 시원스런 폭포가 물줄기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나한님을 모신 굴법당이 있고, 그 옆이 촛대 형상의 옥류봉이며, 그 옆으로 옥이 흐르는 듯 맑은 물줄기가 끝이지 않는 옥류폭포가 있습니다.

삼라만상이 자재(自在)인데 인간만이 부자재(不自在)로다

쏟아진 물줄기는 내려온 순서 없이 작은 웅덩이에서 얼기설기 섞여 다시 아래로 흐릅니다. 웅덩이 아래로 뻗어 가는 계곡이 워낙 좁다보니 넓지 않은 웅덩이조차 넓게만 보입니다. 넓게 보이고 좁게 보이는 것도 역시 상대적이며 마음먹기에 달린 것임을 알게 됩니다.

▲ 지형을 따라 한일자로 길게 자리하고 있는 자재암이 자재롭게만 보인다.
ⓒ 임윤수
불끈 솟은 바위도 높은 산에 비하니 그 높이가 별 것 아니고, 높게 보이던 폭포수도 그 위에 오르니 발아래 개울물일 뿐입니다. 원효대사가 깨우침으로 설한 그 '일체유심조'가 입술에서만 맴돌 뿐 자신의 것이 되질 않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내려오는 길에 다시 들여다본 물 속 바위는 여전히 붉고, 그 붉은 색이 지아비를 그리워하며 흘린 요석공주의 피눈물로 보이는 건 마음이 그러하기에 그렇게 보였을 겁니다.

흐르는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니 자재(自在)하고, 밝혀진 촛불은 수명 다해 꺼지니 자재(自在)합니다. 삼라만상의 자연은 모두가 자유자재이거늘 별 것 아닌 인간들만이 사소한 것도 마음의 덧에 걸어 그 마음에 갇혀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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