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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구야 대표팀 형들도 투표했다, 너도 투표하면 안되겠니' 독일월드컵 출전을 앞둔 축구대표팀 선수들이 25일 오전 서울 월드컵경기장에 마련된 5·31 지방선거 부재자투표소에서 투표를 마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일구야! 형이야. 지금부터 형이 하는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 올해 첫 선거권을 행사하게 된 만 열아홉, 일구 너에게 이제껏 열 번도 넘게 투표를 해 본 형이 몇 마디만 할게. 말 편하게 해도 되겠니?

너 요즘 월드컵에 관심 많지? 아직 개막식도 하지 않았지만 텔레비전에서도, 신문에서도, 거리에서도 온통 월드컵 이야기뿐이잖아. 그 때문인지 국민들 모두 축구 전문가가 다 됐어. 너 역시 국가 대표팀 23명의 이름은 기본이고, 예비 엔트리 다섯 명까지 다 알고 있지?

각 선수별 위치와 개인별 특징, 그 동안의 성적도 어느 정도 파악이 될 거야.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고 있는 우리 선수들 덕분에 외국 명문구단의 역사와 지역별 리그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는지 정도는 이제 상식에 속하지.

지난번에 형이 월드컵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일구 네가 프랑스 선수들의 이름을 줄줄 꿰고 있는 걸 보고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어. 특히 토고나 스위스의 선수들 이름이 네 입에서 나올 때는 '학교 다닐 때 공부는 저렇게 열심히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

형은 토고와의 첫 경기가 열리는 날 정도만 알고 있는데, 넌 우리 대표팀이 결승까지 간다고 생각하는지 경기 일정을 다 알고 있더라. 하긴 네 친구 중에는 경기 일정뿐만 아니라 경기가 열리는 운동장의 이름까지 외고 있는 경우도 있으니 네가 특별한 경우는 아닌 것 같아.

지난 2002년 월드컵을 개최하고, 거기서 4강 신화까지 이뤄낸 경험이 이번 월드컵에 대한 기대로 이어지면서 다들 그렇게 관심을 보이는 거겠지. 형도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 대표팀이 좋은 성적 거뒀으면 좋겠어. 시간이 맞으면 맥주에 통닭을 시켜 먹으면서 함께 응원하면 안 되겠니?

그런데 일구야. 형이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올해엔 월드컵 말고 4년마다 돌아오는 또 다른 축제가 하나 있는데 그게 뭔지 알고 있니? 이건 국제행사는 아니고, 우리나라에서만 하는 거야. 요즘 월드컵만큼은 아니더라도 뉴스에서도 소개가 되고, 거리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다니며, 서로 관심을 끌려고 갖가지 행사를 벌이고 있잖아.

모르겠다고? 월드컵을 앞두고 벌어지는 국가대표 평가전 아니냐고? 어쩔 수 없이 형이 가르쳐 줘야겠구나. 바로 '지방자치선거'야.

1930년에 시작된 월드컵만큼은 아니지만 지방자치제도 역시 그 시작이 1952년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해. 그 이후 9년 만에 박정희의 5·16 군사 쿠데타로 30년 동안 중단되기도 했지만, 지난 1991년 다시 빛을 보게 되었지. 지금과 같은 4대 지방선거(기초의회, 광역의회, 기초단체장, 광역단체장)가 동시에 치러진 것은 1995년부터야.

그 때부터 4년에 한 번씩 선거를 치렀으면 월드컵과 겹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선거 주기를 조절하기 위해 첫 번째 임기를 3년으로 정한 까닭에 지금처럼 지방자치선거와 월드컵이 매번 같은 해에 열리게 된 거야.

▲ 투표함에 투표용지를 넣고 있는 축구대표팀 선수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정치인들이 하는 것을 보니까 맨날 싸우기만 하고, 내 삶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지? 게다가 선거라고는 하지만 맨날 텔레비전에서 보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뽑는 것도 아니고, 뽑아야 하는 사람이 넷이나 된다고 하니 누굴 뽑는 선거인지도 헷갈리기도 할 거야.

반면에 월드컵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괜히 흥분되잖아. 세계 유명 선수들의 경기도 즐길 수 있고, 그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라도 한다면 그 짜릿한 기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지.

그러니 선거보다는 월드컵 경기에 관심이 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야. 언론에서는 월드컵 때문에 선거가 외면당한다고 하지만, 축구팬 입장에서는 선거 때문에 월드컵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는 게 더 불만일 수도 있을 거야.

그런데 일구야. 지방자치선가가 그렇게 우습게 볼 것만은 아니야. 너나 형 같은 서민에게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보다 지방선거에서 선출된 자치단체장이나 의원들의 활동이 더 큰 영향을 끼칠 수도 있어.

지방 정부는 중앙 정부로부터 업무를 위임받아 주민생활과 복지, 환경에 관련된 일을 주로 맡아서 처리하지. 지방세를 비롯한 각종 세금과 공공시설의 사용료도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정부가 걷는 거야. 도서관이나 박물관처럼 편의시설을 짓는 것도 지방정부가 결정해. 각종 인허가 업무를 맡고 있는 지방정부의 결정에 따라 일구네 집 옆 공터에 화장장이 들어 설 수도, 체육공원이 들어 설 수도 있어.

지방선거제도가 복잡하다고 말들 많이 하지만 피파(FIFA)에서 매번 새로 고치는 축구 규칙보다는 간단해.

이번 지방선거는 6개 선거(1차로 기초단체장·지역구기초의원·비례대표기초의원, 2차로 광역단체장·지역구광역의원·비례대표광역의원 선거)를 실시해 6명을 선출하는 바람에 후보자가 많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국가대표 선수 숫자보다 많지는 않잖아.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후보자별 경력이나 공약도 검색해 볼 수 있고, 요즘은 병역, 납세, 전과 등 후보자의 세밀한 부분까지 살펴볼 수 있어. 꼭 인터넷 검색이 아니더라도 집 근처에 붙어있는 벽보만 찬찬히 봐도 선택에 도움이 될 거야.

지난 선거까지만 해도 만 19살의 청년들은 술을 먹어도 되고, 성인 영화도 볼 수 있었는데 투표할 권리만 주어지지 않았어. 이번에 19살로 선거연령이 낮아지면서 비로소 일구 너도 투표를 할 수 있게 되었지. 선거연령을 한 살 낮추기 위해 참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어. 그 노력을 기억할 것까진 없지만, 네게 주어진 선거권의 가치에 대한 고민은 있어야 하지 않겠니?

선거에 관심을 갖고 투표를 한다고 해서 월드컵이나 축구국가 대표들이 서운해 하지는 않아. 오히려 국가대표 선수들은 독일로 가기 전에 부재자 투표제도를 이용해 투표에 참여했어. 독도에서도 투표하고,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들의 등에 업혀 나오면서까지 투표에 참여하는데 네가 빠지면 되겠니?

선거제도를 바꾸거나, 월드컵 개최 주기를 바꾸지 않는 한 아주 오랫동안 월드컵과 지방선거는 같은 해, 같은 시기에 함께 열리게 될 거야. 아무래도 지방선거가 월드컵의 열기를 누르기는 힘들지 않겠어? 그렇다고 지금처럼 지방선거를 외면하거나 거부한다면 우린 민주주의 역사의 큰 성과물 하나를 버리는 꼴이 되는 거야.

내 손으로 시장도 정하고, 도시사도 정할 수 있다는 게 신나지 않니? 조금만 더 관심을 갖자. 그리고 투표도 하자. 지방선거를 월드컵과 함께 4년마다 돌아오는 또 하나의 축제로 만들어보는 거야. 일구 네가 나서면 가능한 일이야. 국민이 주권자가 되는 대한민국에서 안 되는 게 어디 있겠니?

덧붙이는 글 | '일구'는 올 해 첫 선거권을 가지게 된 열아홉 청년 모두를 '19'라는 숫자를 응용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이 기사는 KBS2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였던 '현대생활백수'의 유행어를 빌어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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