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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의장석을 에워싸고 있는 반면에, 한나라당 의원들은 우리당 의원들의 투표를 막기 위해 우리당 의석에 앉아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진짜 승리자는 민주노동당"이라고 했다. <경향신문>의 평가다.

거대 정당의 틈바구니에서 캐스팅 보트권을 무기로 주민소환법과 국제조세조정법을 관철시킨 데 따른 평가다. 이재오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민주노동당을 향해 "타락한 진보정당"이라고 비난했지만 화풀이에 불과하다. <한겨레>도 민주노동당이 '다윗의 힘'을 보여줬다고 평했다.

버전을 바꾸자. 그럼 노무현 대통령은? 문제의식은 이런 것이다. 다른 야당의 협조를 구할 길이 있었는데도 노 대통령은 왜 사학법 양보를 권고했을까? 안정적 국정운영에 꼭 필요한 민생·개혁 법안이고 마침 다른 야당도 처리를 원했는데 노 대통령은 왜 그들과의 공조를 우선시하지 않았을까?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다. 지난해 말에 한나라당이 사학법 장외투쟁에 나섰을 때 열린우리당은 다른 야당과 공조해 새해 예산안 등을 처리한 바 있다.

결과론적인 질문일 수 있다. 강행처리보다는 합의처리를, 턱걸이 찬성보다는 압도적 찬성을 바랐을 수 있다. 그래야 노 대통령이나 열린우리당 모두 국정을 원만하게 운영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이 '당의 정체성'이라고 자평한 사학법을 뜯어고치자고 했다. 여당으로서 원만한 합의처리를 추진할 여지를 애초부터 앗아버렸다. 그런데도 노 대통령은 양보를 권고했다. 또 다른 결과, 즉 애초부터 안 될 타협에 매달렸다는 얘기다.

노 대통령이 불가능한 공조에 매달린 이유

이 질문에 답을 내놓은 곳은 <한겨레>다. "국정을 총체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큰 틀에서 보면, 여권으로선 한나라당과의 관계 악화가 장기적으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게 <한겨레>의 진단이다. 노 대통령이 향후 국정 운영의 주요 과제로 설정하고 있는 양극화 해소와 한·미FTA 체결 등에는 제1야당의 이해와 협조가 무엇보다 필요하고, 그래서 파국을 피하려 했다는 것이다.

설득력 있는 분석이다. 한·미FTA와 양극화 해소는 어제 통과된 법률안보다 더 큰 파괴력을 지닌 사안이다. 민생의 틀과 질을 총체적으로 규정하는 거대사안이다. 이런 사안을 처리하는 데 제1야당의 협조를 얻지 못하면 큰 후유증을 남길 수 있다. 한·미FTA와 양극화 해소책에 노출될 당사자들의 거센 반발을 누르기 위해선 국회의 압도적 찬성이 필수불가결하다.

이렇게 보면 가치의 층위를 분명히 나눌 수 있다. 한나라당과의 연대는 전략적 가치를 갖지만 다른 야당과의 협조는 전술적 효용성을 얻는 데 그친다. 더구나 민노당은 한·미FTA 등을 처리할 때 같이 하기 힘든 당이다.

작은 것을 내주더라도 큰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게 노 대통령의 판단이었을 수 있다. 그래서 큰 것을 얻기 위한 사전정지 작업이 필요했을 수 있다.

되돌아보면 그런 흔적을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한나라당의 이해찬 총리 경질 요구를 순순히 받아준 것은 물론 후임 총리를 고르는 데도 한나라당의 호감도를 반영했다. 로스쿨법과 국방개혁안, 독도 문제 등을 처리하려 할 때도 여당은 물론 한나라당의 해당 상임위원 또는 원내대표와 함께 하려 했다.

노 대통령의 국정 기조는 '한나라당과 함께'다. 행정수도특별법을 '한나라당과 함께' 처리했다가 뒤통수를 맞았는데도 노 대통령은 여전하다. '한나라당과 함께' 해야 국정이 안정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럴 수 있다. 국정 전체를 총괄하는 대통령이 여야를 아우르겠다는 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원칙은 맞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선 많은 문제를 낳는다.

노 대통령이 '작은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 이게 문제다. 노 대통령은 사학법 양보를 권고했지만 열린우리당은 죽기살기로 매달렸다. 선거를 앞두고 '당의 정체성'을 내팽개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큰 것'도 문제다. 정부는 한·미FTA 협상을 내년 3월까지 완료할 계획이지만 열린우리당의 정동영 의장은 "시간에 쫓겨서는 안 된다"고 했다.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동상이몽'

▲ 노무현 대통령이 29일 청와대 관저에서 열린 여야 원내대표 조찬회동에서 한나라당 이재오 원내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박창기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이렇게 다른 스텝을 밟고 있다. 각기 다른 리듬에 몸을 맡겼기 때문에 나오는 현상이다. 노 대통령은 '업적'에, 열린우리당은 '승리'에 맞춰 스텝을 밟고 있다. 이 점은 이미 노 대통령도 인정한 바다. 올해 초 당은 선거를, 자신은 국정을 우선시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했다.

두 가지 점이 확인된다. 첫째, 노 대통령이 밟는 스텝이 '업적'에 맞춰졌다면 정책노선은 보수화할 것이다. '한나라당과 함께'를 중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둘째, 시간이 갈수록 당·청간 엇박자는 커질 수 있다. 노 대통령에겐 시간이 없다. 길어야 내년 3월이다. 반면 열린우리당은 그 때가 시작점 내지 변곡점일 수 있다. 대선을 고려하면 그렇다. 시간이 갈수록 일정에 쫓겨 상대 처지를 고려할 여유가 줄어든다.

이 두 가지 점을 종합하면 어떤 결론이 나올까? 어느 지점에 가면 정리될 것이다. 지금이야 열린우리당이 선거와 국정을 두루 살펴야 하지만 어느 시점에 가면 하나에 몰입할 것이다. 이런 경우다.

열린우리당의 강행처리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소속 의원 7명이 기습적으로 동참한 이유에 대해 민주당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과 공조하는 듯한 모습이 지지층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본회의에 참여했다."

열린우리당 버전으로 바꾸면 이런 말도 성립할 수 있다.

"대선을 앞두고 노대통령과 함께 하는 듯한 모습이 지지층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갈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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