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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기회에 <과학 동아> 1월호에 실린 '적록색맹의 경쟁력'이라는 기사를 읽고 몇 가지 바로잡아야 할 것들이 있어 이 글을 쓴다.

나는 흔히 말하는 '적록색맹'이다.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적갈색이나 황갈색 등처럼 적색이 함께 섞여 있을 경우 적색을 구별해 내는 데 어려움을 겪는 '적색각이상'이다.

나는 '색맹'입니다

▲ 색맹검사표.
내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신체 검사 시간이었다. 아마 2학년이나 3학년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순서대로 키, 몸무게, 가슴 둘레 측정 등을 마치고 한 검사대 앞에 섰을 때였다. 내 눈 앞에는 여러 가지 색이 울긋불긋 섞여 있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그림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숫자가 몇이니?"
"네? 숫자가 어디 있어요?"
"여기 펼쳐진 이 페이지에 있는 숫자를 말하라는 거야."

정말 내게는 그저 의미 없는 여러 가지 색깔들의 점이 모인 어지러운 책이었을 뿐이었다. 선생님은 신기하다는 듯 페이지를 앞뒤로 여기저기 넘기시면서 계속 내게 숫자를 물었다. 어떤 페이지는 숫자가 분명히 보였고 또 어떤 페이지에서는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전혀 숫자를 찾아내지 못했다. 당황한 나는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 못했고, 갑자기 느려진 검사 시간 때문에 뒤에 순서를 기다리던 다른 아이들이 쑥떡거리는 소리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날 이후로 나는 색맹 또는 색약이라는 멍에를 짊어지며 살아야 했다. 미술 시간만 되면 혹시나 색을 잘못 칠해 아이들에게 망신을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해야 했고, 일 년 중 신체검사 날은 죽기보다 학교에 가기 싫은 날이 되었다.

특히 고등학교 때 진학 상담 시에는 심한 좌절과 절망을 느껴야만 했다. 다른 '정상적'인 아이들에게는 문과나 이과를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져 있었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거의 선택권이 없었다. 지금은 대부분의 이공계 대학들이나 심지어 의대에서도 색각이상자들에 대한 문호가 개방되어 있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20 여 년 전에 색각이상자에게까지 관대하게 문호를 개방한 이과계열 학과은 거의 없었다. 자연스럽게 나의 진로와 인생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색맹'이 아니라 '색각이상'입니다

'색각이상'이란 사물의 색깔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들이 별다른 인식 없이 흔히 쓰고 있는 색맹이나 색약이란 용어는 당사자나 일반인들에게 일종의 장애나 질병이란 인식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에 이미 의학계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색각이상'이란 말로 부르고 있다. 색맹을 강도(强度) 색각이상, 색약을 중등(中等)도와 약(弱)도로 나누게 되어, 색약을 중등도 색각이상이라고 부르게 됨으로써 과거의 색맹, 색약으로만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

▲ 과학 동아의 '적록색맹의 경쟁력'이라는 기사. 긍정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일부 부적절한 정보를 담아 그 취지를 무색케 했다.
ⓒ 과학동아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된 <과학동아> 1월호의 기사 내용을 살펴보겠다. '적록색맹의 경쟁력'이라는 제목의 붙은 이 기사는 다음과 같이 적녹색각이상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남자의 6%가 적록색맹'이며 '적록색맹인 사람은 운전면허증을 받지 못한다. 신호등에 쓰이는 녹색과 빨강을 구분하지 못해 사고 위험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과연 이 말이 사실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전혀 아니다!'이다.

운전면허시험을 주관하는 운전면허시험관리단 홈페이지에는 운전면허를 받을 수 없는 결격 사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리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이 규정 어느 곳에도 색각이상자가 단지 그 이유만으로 '운전면허를 받지 못한다'는 문구를 발견할 수 없다.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색각이상자들은 법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지극히 정상적으로 신체 검사를 통과하고 운전면허를 취득한 '정상적인 운전자'들이다.

'색맹'도 운전면허 딸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지난 1월 31일자로 '강남 운전면허 시험장' 홈페이지에 게재된 색각이상자의 면허시험 응시가능 여부에 대한 관련 해당 기관의 답변을 살펴 보겠다.

'신체검사 지정병원이나 면허시험장에 상주하고 있는 신체검사실에서 신호등을 이용한 삼색식별을 실시하여 운전이 가능하다는 판정결과를 받으신다면 면허시험에 응시하실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신호등을 이용한 삼색식별' 방법에 대해 생소한 독자들을 위해 내 경험을 기초로 부연 설명을 해본다. 면허 시험을 응시한 사람은 누구나 신체검사를 통과해야 한다. 이 신체 검사 항목에 색각이상에 대한 검사도 당연 포함되어 있다.

일차 검사는 색맹검사표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때 표를 잘 읽지 못하는 색각이상자들은 별도로 마련된 방에 들어가 다른 검사를 거치게 된다. 이를 '3색등화 식별검사'라고 부른다. 실제 신호등을 눈앞에 두고 적색, 황색 그리고 녹색으로 바뀌는 신호등을 보고 색을 맞추면 운전이 가능하다는 판정 결과를 받게 되는 것이다.

본인 역시 이 검사 방법을 통해 신체 검사를 통과하였는데 <과학동아>를 따르면 내 운전면허는 발급되어서는 안 되는 비정상적인 운전면허인 셈이다.

또한 이 기사는 '남성의 6%'가 '적녹색맹'이라고 쓰고 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색맹(色盲)이라는 단어는 '색을 전혀 보지 못하는 맹인'이라는 의미가 있다.

단지 '색각이상'이라는 이유로...

국가인권 위원회가 지난 2005년 2월 발표한 '색각이상자(색맹, 색약)의 고용 등에 대한 연구보고서'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보겠다.

'실제로 남성의 5% 정도가 색각이상자이고 이중 적록색약자가 가장 많은데, 많은 경우 색각이상자 일반을 색을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완전색맹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 완전색맹은 0.01%밖에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 조사에서 실시한 색각이상자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색각이상자로 분류되었으나 검사 이외의 일상생활에서 색 구분 등에 어려움이 거의 없다는 경우가 반 이상을 차지하였습니다.'

동 보고서에 따르면 '남성의 5%와 여성의 0.4% 정도가 색각이상자로 추정되고' 있다고 한다. 이를 인구수로 환산할 경우 '남성의 5%이면 약 121만 명 정도이며, 취업연령대라고 할 수 있는 20대에는 20만 명 정도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국가인권위원회는 추정하고 있다.

나 자신을 포함한 대다수의 색각이상자들은 일상 생활에서 다소의 자그마한 불편을 느낄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고 정상적으로 일상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이 불편함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불편함일 뿐이지 거의 대부분의 경우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끼치는 불편함과 피해를 입히는 '장애'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 싶다.

<과학동아> 1월호의 해당 기사가 비록 전반적인 내용상으로는 색각이상자들이 그 동안 알려졌던 사실과 달리 '일반인보다 색을 '덜'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본다는 연구 결과'를 전하는 긍정적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부적절한 용어의 선택과 잘못된 정보를 담고 있음으로 해서 애초의 뜻이 잘못 전달될 수 있음이 안타깝다.

만일 색각이상자들 중 아직 운전면허를 취득하지 않은 성인이나 머지 않아 운전면허 취득 나이에 도달하는 청소년들이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이 기사를 읽고 미리 운전면허취득 자체를 포기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짊어질 것인가?

끝으로 국가인권위원회 보고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색각이상은 다양한 종류와 정도로 나누어질 수 있으며, 색각이상자를 '비정상집단'으로 간주하고 획일적이고 편의적으로 취업제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신체적 특성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차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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