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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역사
모든 비극은 알고 보면 사소한 갈등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9% 정도는 완벽하게 궁합이 일치하던 부부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1% 정도의 어긋남으로 인해, 절대 함께하지 못할 사이가 될 수도 있다.

구한말 개화파의 영수였던 김옥균(1851~1894)과 그를 암살했던 홍종우(1850~1913), 그 두 사람의 기묘한 악연도 어쩌면 불과 '1%의 차이'가 불러온 비극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조재곤/푸른역사)는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사건 속에서 사회적 통념 때문에 가려진 한 토막의 진실을 파헤친다.

상생과 공존에 실패한 당대 지식인들의 비극

우리에게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알려졌던 김옥균은 정변 실패이후 10년간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보낸다. 이후 1894년 3월28일 청나라 상하이의 한 호텔에서 암살자의 총탄 세 발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진다. 그를 죽인 사람은 홍종우. 우리나라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으로서 <심청전>과 <춘향전>같은 전통 고전을 직접 불어로 번역해 유럽에 알렸다.

서구 사회의 사상과 문화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접했던 그의 이력을 살펴볼 때, 홍종우는 국제 감각에선 김옥균보다도 앞서있는 선구적인 지식인이었다. 이처럼 사상적으로 개화파쪽에 더 가까울 것 같은 홍종우가 정치적 우군이 될 수도 있었던 김옥균을 죽여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과연 수구파의 사주를 받은 단순한 자객일 뿐인가?

저자는 여기서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른 1%의 비극을 들춰낸다. 김옥균과 홍종우, 두 사람 모두 '조선의 근대화'라는 비전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방법론에서 차이가 났다.

김옥균의 시선으로 봤을 때 수구파의 득세와 열강의 위협으로 자주적 역량이 부족한 조선을 근대화시키기 위해서는 일본의 힘이 필요했다. 반면, 홍종우는 황제(고종)를 중심으로 한 자주적 근대화를 기대하고 있었다.

홍종우가 보기에 김옥균의 방식은 개화를 빌미로 외세의 힘을 끌어들였다간 국가 체제를 위협하고 동양 삼국의 세력 균형까지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한 생각이었다. 이 점은 암살 이후 현지의 청나라 경찰에게 붙잡힌 홍종우의 자백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나 홍종우가 꿈꾸던 '자주적 근대화'는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홍종우는 암살 이후 고국으로 돌아와서 고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한때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실세로 등극한 뒤에도 외세에 의존한 개화사상에 대하여 극심한 거부감을 드러내면서도 정작 이를 대체할만한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저자는 일단 홍종우가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기득권 수호에만 집착하는 당대의 단순한 수구파와는 다르다는 점에서 복권을 시도한다. 그러나 결국 문제는 결국 '공존의 실패'에 있다고 지적한다.

김옥균이 급진적 개화파라면, 홍종우는 주체적 개화파로 정의 내려진다. 망명시절 김옥균이 일본식 개명과 단발도 마다하지 않으며 일본식 개화를 조선이 나아가야할 모델로 인식했다면, 홍종우는 파리 체류시절에도 한복을 고수하는 등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면서도 주체성을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김옥균은 외세의 영향에 심취된 성급한 이상론에 머물렀고, 홍종우는 '반대를 위한 반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방향은 달랐지만 당대의 선구적 지식인이라 할만한 세력들이 상생과 공존을 통해 '제3의 길'을 모색하기보다 결국 극단적 대립으로 파국을 맞고 말았다는 점은 우리 근대사의 비극이다.

구한말로부터 어언 1백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개방과 자주, 진보와 보수의 대립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슈다. 특히 저마다 민족과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끊임없는 갈등과 대립을 부추기는 현대의 정치가와 지식인들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 조선의 운명을 바꾼 김옥균 암살사건

조재곤 지음, 푸른역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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