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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원이 살던 시대에 자격증을 딴 비행사들에게는 고향 방문 비행이 관례였고 목표이기도 했다. 1등 비행기 조종사, 항공선 조종사 등은 19세 이상의 남자여야 한다는 항공기 승무원 규칙 8조에 의해 여성은 2등 비행사 밖에 될 수 없었다. 따라서 여성에게는 여객기나 수송기, 전투기 조종사와 같은 직업인으로서 비행의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그래서 곡예비행이나 당시 수많은 미국과 유럽 비행사들이 한 것과 같은 기록비행, 그리고 고향 방문 같은 이벤트 비행을 주로 했던 것이다.

▲ 영국 비행사 빅터 블루스 환영 행사에서 박경원
ⓒ 時事通信社
여성 비행사의 악조건은 또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이 생산해 내는 '염문설' 때문이다. "소문의 여류 비행사. 조선 여행에서 방황하다.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젊은 청년"이라는 기사 제목 하나로 일본인 여류 비행사 효도 타다시의 비행사 생명은 끝나 버린다.

여성의 능력에 대한 편견도 여류 비행사들을 괴롭혔다. 전문가들은 여성은 폐활량이 적기 때문에 고공을 날 수 없다, 엉덩이가 크기 때문에 조종은 무리라는 등 공공연하게 여성 비행사들을 깎아내렸다. 여성의 비행 부적격론의 신봉자였던 일본 동아비행학교 교장은 여자는 남자보다 감각이 둔하다는 이유로 여성 훈련생의 구두를 벗기고 맨발로 조종 연습을 시켰다. 박경원 또래의 한 훈련생은 연습장 개펄에서 한겨울에 맨발로 훈련을 받다가 발의 감각을 잃기도 했다.

박경원은 항공 잡지 <스피드>에 실으려 했던 글에서 이렇게 썼다.

▲ 당시 비행 대회 이륙 장면
ⓒ 이병희
"지금 그녀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왜 항공계에서 은퇴해야만 했을까?…괴롭고 참담하게 여기까지 온 그녀들에게 일거리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 그 커다란 원인이었다.…나의 생명이 계속되는 한 최후까지 힘차게 살아갈 결심이다.…비탄과 고통의 연옥에서 다시 용기를 불러일으켜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기름옷을 몸에 걸치던 그날그날의 비행장 생활, 이렇게 몇 년, 몇 개월을 반복해 온 자신이 아니었던가!" - 박경원 유고 '우리 여류 비행사들은 왜 성장하지 못하는 것일까?', <건널 수 없었던 해협> 중에서

박경원이 비행사가 되어 고국 방문 비행을 하겠다는 염원을 구체적인 결심으로 굳힌 것은 3·1운동이 일본 군경에 의해 무참하게 진압된 이후 남동생 박상훈의 편지를 받은 뒤였다.

"경관의 발길질에 채여 흩어지면서 사람들은 '윌슨의 비행기'가 도와줄 거라고 말했습니다.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한 미국 대통령입니다. 윌슨 대통령이 비행기를 타고 조선을 도우러 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이런 상태라면 조선의 독립은 아직 멀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 <건널 수 없었던 해협> 중에서


'윌슨의 비행기'란 당시 조선 인민의 열망 중 하나를 집약한 유행어였다. 각국 비행사들의 비행 시범이 불러일으킨 새로운 기술 문명에 대한 관심과 열망에 민족자결주의가 더해진 것이었다. 남동생 상훈은 존재하지도 않는 윌슨의 비행기가 어리석은 희망이라고 한탄했지만 박경원의 생각은 달랐다. 안창남처럼 고국 방문 비행을 해서 동포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민족차별과 남녀차별에 짓밟힌 한 여성의 꿈

박경원의 목표는 오로지 고국 방문 비행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당시의 모든 비행사들, 게다가 안창남을 비롯한 조선인 남자 비행사들이 원하고 또 실현했던 고국 방문 비행을 정혜주 기자는 유독 박경원의 경우에만 이기적인 자기실현, 그리고 친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로 드는 것이 바로 '일만 비행'인데, 그렇다면 과연 일만 비행이란 무엇인가?

박경원에게는 다른 조선 남자 비행사들과 달리 고국 방문 비행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 집안의 딸 기베 시게노는 이미 1927년에 보란 듯이 진남포로 고향 방문 비행을 했다. 1933년에 윤창현은 조선해협을 건너 경성에 도착했다. 윤공흠도 실패하긴 했지만 순조롭게 고국 방문 비행을 시도했다.

▲ <요미우리 신문> 1927년 5월 9일치에 소개된 박경원
ⓒ 讀賣新聞
이런 상황에서 '일만 비행'은 37세의 노처녀 비행사 박경원에게 다시 올 것 같지 않은 기회였다. 그러나 주최 측은 '1등 비행사' 규정을 들어 거절한다. 게다가 일본부인항공협회는 박경원의 비행학교 4년 후배에다 비행 경력도 짧은 스물한 살의 우에다 스즈코의 일만 비행을 추진했다. 그 시점에 자격이 있는 여류 비행사는 최고참 박경원과 우에다 스즈코, 갓 자격증을 딴 신참 합쳐서 셋이었다. 담당자는 아무래도 일만 비행은 청순가련형의 '순수한 일본 여성'이 해야 한다고 했다. 분명한 민족차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결정이 바뀐다. 부인항공협회 이사장이 사기 혐의로 고소당해 우에다 스즈코의 비행이 취소되자 제국비행협회는 부랴부랴 박경원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대륙 침략의 의도를 노골화해 가던 '비상시'여서 조선총독부와 관동군의 승인을 받기 위해 고심 끝에 제국비행협회가 만들어낸 명분이 바로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연락 비행'이다.

이전에 어떤 조선 남자 비행사나 일본인 여류 비행사에게도 붙인 적이 없었던 명분, 아니 조건이었다. 박경원의 입장에서 더 이상 미루거나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을 제물로 삼아 그녀가 꿈에도 그리던 고국 방문 비행을 철저하게 자신들의 목적에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박경원에게 그것은 오로지 고국 방문 비행일 뿐이었다.

"고국 방문 비행을 마치는 날에는 더 바랄 것 없는 몸이니 생명과 육체를 분해시키겠노라"고 했던 박경원은 1933년 8월 7일 추락사했다. 조종간을 잡고 비스듬히 앉은 상태로 거의 상처 없는 충격사였다. 고국 방문을 열망했던 한 여성 비행사의 꿈은 일제의 멍에가 들씌워진 채 그렇게 사라졌다.

일만비행, 고려신사 참배 친일로 볼 수 없어

▲ 박경원 50주기 보도한 <한국일보> 1983년 3월 15일치 기사
ⓒ 한국일보
1973년 한국여성항공협회는 일본부인항공협회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그리고 김경오 회장을 중심으로 박경원의 추락사 지점을 찾아 첫 제사를 지냈다. 1975년 여성항공협회는 앞면에 박경원 얼굴, 뒷면에 '한국여류비행계의 개척자'라고 새긴 메달을 제정했다. 1983년 <한국일보>는 박경원 50주기를 맞아 문제의 일장기 사진까지 게재한 기사로 박경원의 삶과 죽음을 재조명했다. '일만 비행'도 조국의 하늘을 날기 위해 분투한 여류 비행사의 참모습을 가리지 못했다. 그것을 친일로 간주하는 것이 오히려 당시 일제의 장단에 놀아나는 것이 아닐까.

정혜주 기자는 친일과 관련해 '고려 신사 참배'도 거론했다. 일제가 강점기에 비록 내선일체에 이용하긴 했지만 고려 신사는 일본에 정착한 고구려인 시조를 모시는 신사다. 친일파로 공인된 동명이인 '박경원 남작'을 박경원으로 착각하는 것도 모자라 최근의 일부 여론은 고려 신사를 전범을 기리는 야스쿠니로 착각하고 있기도 하다. 성격이 다른 맥락에서 쓰였던 사진을 빌려다 친일의 증거로 쓴 정혜주 기자의 잘못은 김정동 교수에 의해 밝혀진 바 있다(<중앙일보> 12월 26일치 기사 '일장기 들고 비행기 탄 박경원은 친일파?').

'최초' 논란 - 누가 조국의 하늘을 또 찢으려 하는가

이미 박경원과 권기옥은 각각 다른 의의에서 우리 나라 최초 여류 비행사로 일컬어지고 있다. 기준과 수식에 대해 여러 말들이 많지만 두 사람 모두 최초의 여류 비행사라는 데는 어떤 적대도 없다. 권기옥도 독립군 공군 조종사로서 복무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지만 어쩔 수 없이 중국 공군이 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인민 어느 누구도 일본인이고 싶지 않았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불행하게도 일본인이었다. 따라서 그렇게 따진다면 대한민국의 자격증으로 그리고 국적기로 하늘을 난 최초의 여류 비행사는 김경오이다. '최초'는 계속 이어진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비행사 박경원과 중국 국민군 제1비행대 소속의 권기옥에 이어 세 번째로 비행사 자격증을 소지한 이정희가 1949년 1월 10일 입대와 동시에 중위로 임관해 공군 최초의 여군이 되었다." - <국방여군> 창간호, 국방부 여군발전단, 2003년


권기옥이 중국 최초의 여류 비행사?

최초 논란과 관련해 박경원의 폄훼가 아니라, 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는 따로 있다. 중국의 자료가 어떤 부가 설명도 없이 버젓이 중국 항공사 연보에서 권기옥을 ‘중국 최초의 여류 비행사’로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이 오기인지 모르겠으나 우리 쪽 자료와 윈난 항공학교 졸업 연도도 다르다. 더 자세한 연구와 규명이 필요하며, '중국 최초'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해방이 되어 주권을 찾은지 반 세기가 훨씬 넘은 시점에서 권기옥이 한국인이라는 추가 설명이 없다는 것은 유감이다.

“민국15년(1926년) 7월 권기옥이 윈난 항공학교 비행과를 제1기로 졸업하여 중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가 됨(民國15年(1926年) 7月 權基玉在雲南航空學校第一期飛行科畢業, 成為中國第一位女飛行員)”
(<남방도시보(南方都市報)> 2004년 6월 2일치 인터넷판)
/ 홍대욱
위와 같은 자료도 있지만 도무지 최초가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부끄러운 것은 최초 논란이 권기옥과 박경원이 아닌 '지금 우리'의 다툼이라는 점이다. 만약 권기옥과 박경원이 함께 해방을 맞았다면 과연 최초를 다투었을까? 그렇게 상상하고 싶지 않다.

해방된 바로 다음날인 1945년 8월 16일, 장덕창, 서웅성 등 비행사들은 독립투사와 민간 비행사, 출신지와 중국, 일본 등 활동 지역을 막론하고 민족의 이름으로 단결을 결의했다. 1946년 5월 24일 최용덕, 이영무 등 남성 비행사를 비롯하여 권기옥, 이정희 등 200여 명의 항공계 인사들은 한국항공건설협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도 비행사들은 조국의 하늘을 마음놓고 날 수 없었다. 미군정은 남한 전역에서 미군기를 제외한 모든 항공기의 운항을 금지했다. 그리고 해방 공간을 최초로 날아 보려고 대구에서 두 비행사가 수송기를 띄운 일을 빌미로 비행기를 모두 파괴해 식기 재료로 불하했다. 그리고 모진 세월 끝에 같은 민족이라는 울타리를 만든 항공인들의 모임을 '친일' 준군사조직으로 간주해 해산해 버렸다. 그리고 해방된 조국의 하늘은 전쟁과 분단으로 찢어졌다.

최근 우리와 비슷한 분단의 아픔을 지닌 양안의 하늘이 조금이나마 봉합되는 부러운 장면이 눈에 띈다. 영화감독 첸가이거와 국민당 조종사였다가 대만 공군이 된 그의 외삼촌은 눈물의 상봉을 했다. 그리고 대만 공군 출신 조종사 8명이 중국 항공사에서 조종간을 잡게 되었다. 양안의 하늘은 저렇게라도 합쳐지는데 우리의 분단된 하늘이 새삼 또 다시 친일과 최초 논란으로 찢어지는 모습은 정말 씁쓸하다.

권기옥과 박경원, 그리고 영화 <청연>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들을 지켜보며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자. 권기옥도 영화로 만들자. <청연>이 축적한 항공 촬영 역량과 <태극기 휘날리며>가 축적한 전쟁신 연출 역량 등을 바탕으로 중국 대륙과 동북아시아를 무대로 한 여성 투사의 삶을 그린 훌륭한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뜻있는 영화인들의 관심을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한겨레신문의 개인 블로그에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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