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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에 눈을 이고 있는 조선 소나무
ⓒ 김영조
정말 많은 일이 있었던 을유년도 이제 열흘 남짓 남았다. 올해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용산시대가 새롭게 열렸고, 한글날이 15년 동안의 일반 기념일을 접고 국경일로 승격되는 기쁜 일이 있었던 해였다. 특히 12월 8일 국회 본회의에서 한글날을 국경일로 승격시키는 '국경일에관한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 통과된 날 15년을 한결같이 뛰었단 많은 한글운동가는 만세를 불렀고, 눈물을 흘렸다.

이렇듯 큰일을 치른 한글운동단체 중 중심에 있던 '한글 인터넷주소 추진 총연합회'가 백양사 송년산행을 한다고 하여 동참하기로 했다. 12월 16일 늦은 3시에 서울에서 출발하여 호남고속도로 백양사 나들목을 나온 뒤 눈이 쌓인 구불구불하고 험한 고개를 넘어가는 기분은 그야말로 '아슬아슬'이었다.

이윽고 도착한 전북 순창군 복흥면 해발 600미터 정도의 '산중가든'에서 일행은 야생 멧돼지 고기와 복분자술 그리고 자연주의 채소들로 만든 음식들의 향연을 치른다. 야생 멧돼지는 우리 일행을 위해 관청에 허가를 얻고 사냥을 해온 것이라고 한다. 산 속에서 건강하게 활발한 운동을 하던 멧돼지들의 고기여서인지 비계 없는 정말 부드러운 고기에 모두 감탄한다.

식사 뒤 우린 수련회 장소로 이동했다. 어두운 밤길, 천천히 움직이던 버스가 갑자기 기우뚱하면서 멈춘다. 내려가 보니 버스가 눈 속에 빠졌다. 대형버스였고, 노련한 운전기사였지만 버스는 앞뒤 어느 쪽으로도 조금도 움직일 줄 몰랐다. 삽으로 바퀴 밑을 파헤치고 남자들은 버스를 밀기를 여러 차례, 겨우 버스가 움직일 수 있었다. 한 사람은 내게 말한다. "복분자 술 마시고, 20대의 힘을 낸다." 눈이 쌓여서 환한 한밤중 눈 속에서 치른 한판의 공연이었다.

▲ 토론회를 하고 있는 '한글 인터넷주소 추진 총연합회' 회원들
ⓒ 김영조

▲ '한글 전화번호 실현방안' 팸플릿 표지(왼쪽). 설명하는 고갑천 교수
ⓒ 김영조
이어 펼쳐진 주제발표와 토론시간.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 이대로 공동대표가 '한글누리네(한글인터넷주소)의 어제와 오늘'이란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한다. 그는 한글누리네 개발과 경쟁시기, 통일시기, 혼란시기의 대강을 얘기하고, 혼란시기가 온 까닭을 진단한 다음 한글누리네를 다시 살릴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한글누리네 업체가 여럿으로 갈라져 있으면 특성상 사용자들이 많은 불편과 부담을 안게 된다. 따라서 업체끼리의 타협이나 통일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어렵다면 정부가 맡아야 한다. 그리고 업체는 이용료를 내리고, 국민에게 진정으로 고마워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주제 발표에 이어 '인물코리아' 류호석 대표, 한추회 김슬옹 기획위원의 사례발표와 다양한 토론이 펼쳐졌다. 참석자들은 모두 이대로 대표의 의견에 공감하며, 한글누리네의 보급에도 더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또 호남대 고갑천 교수가 자신이 개발한 '한글 초성자음 활용방법' 즉, '한글 전화번호 실현방안'을 소개했다. 고 교수는 한글 글자의 첫머리인 초성자음만을 사용하여 전화를 쉽게 걸 수 있음을 주장했다. 그 방법의 한 예로 전화기에 초성자음을 숫자와 함께 표기하여 '고갑천' 중 'ㄱ, ㄱ, ㅊ'을 단축 다이얼로 지정하여 쉽게 전화를 걸 수 있다는 것이다.

이후 참석자들은 새벽 늦은 시간까지 갑론을박하며, 내년 한글날 잔치 방안을 논의하고, 더욱 활발한 한글 발전을 도모할 것을 다짐했다.

▲ 백양사로 들어가는 길
ⓒ 김영조

▲ 얼지 않은 백양사 들머리의 개랑
ⓒ 김영조
아침 늦게 일어난 참석자들은 눈 세상이 된 장관을 바라보며 감탄의 연속이다. 무릎까지 빠져가며, 사진도 찍어본다. 그리곤 '산중가든'에서 준비한 꿩국으로 아침을 단단히 한다. 엄청난 눈에 산행은 포기하고, 대신 눈꽃이 장관이라는 백양사를 들러보고 올라가기로 한다.

백양사 들머리 먼 곳에 버스를 세워두고 우린 장장 2킬로미터 정도의 길을 눈과 함께 걷는다. 처음, 버스에서 내렸을 때의 체감온도는 무척 낮았지만 모두 추위를 잊고 눈꽃을 감상하기에 바쁘다. 여기저기 감탄사의 연속이다.

한참을 갔을 때 앞에서 한추회 최기호 회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김 기자 빨리 와 보세요, 여기 좋은 취재 거리가 하나 있는데." 급히 뛰어가 본다. 그곳엔 한 그루의 감나무가 서있었고, 아직 감이 많이 달렸다. 그런데 그 감나무엔 눈이 뒤덮은 까치집이 있고, 그 옆에 까치가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몇 해 전 순천 선암사 주변의 감나무에 감이 그대로 달린 것을 보고 내 아내는 짐승들을 사랑하는 스님들이 감을 일부러 따지 않은 듯하다고 했었는데 역시 이 절 주변도 같은 현상이 아닌가? 이 아름다운 광경에 모두 사진 찍기에 바쁘다. 아, 그런데 까치집에 눈이 쌓여 까치는 어디에서 자나?

▲ 눈이 또 하나의 나무를 그린다.
ⓒ 김영조

▲ 감나무 위의 눈 쌓인 까치집과 까치
ⓒ 김영조
절에 들어가는 길 부근에 개랑(매우 좁고 얕은 개울)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춥고 눈 쌓인 겨울에도 얼지 않았다. 아니 넓은 곳은 얼었는데 개랑만 그렇지 않다. 이것도 작은 고추가 매운 것인가?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정겹다. 일행 중 시인인 짚신문학회 오동춘 회장은 시를 읊는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눈꽃' '메꽃' 따위의 한글 아호를 지어주기도 한다.

명당에 자리 잡음 직한 대웅전 뒤에 바위로 된 웅장한 백암산 봉우리가 감싸 안는다. 절집의 대나무로 한 담이 정겹다. 그뿐만 아니다. 절집의 처마에 달린 길쭉길쭉한 고드름은 우리를 동심 속으로 가둔다. 시원한 약수 한 모금은 속세에 찌든 때를 깨끗이 씻어 주었다. 도대체 사람들은 이 절집을 떠날 줄 모른다.

하지만, 일정은 눈꽃에 취해 몽롱한 사람들을 다시 서울 도심으로 내쫓고 있다. 서울에서 있을 한글학회 부설 한말글문화협회 다시 일으키는 잔치가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미끄러운 고갯길을 시속 5킬로미터의 거북이걸음으로 넘는다. 모두 안전띠를 하고 긴장 속에서 눈길을 넘어 다시 일상의 서울로 돌아왔다. 아! 언제 다시 백양사의 눈꽃을 보러 갈까?

▲ 뒤에 백암산이 백양사 대웅전을 감싸안고 있다.
ⓒ 김영조

▲ 대나무 울타리가 있는 절집 그리고 처마 끝의 고드름
ⓒ 김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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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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