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김민수
시월의 마지막 날이다.

여느 해처럼 오늘도 라디오 어디에선가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하는 노래가 흘러나올지도 모르겠다. 아직 가을빛이 한라산 아래까지 온전히 내려오지 않아 시월이 한참 남았나 했는데 벌써 시월의 마지막 날이라니 실감이 나질 않는다.

제주시에 나갔다오는 길 삼나무가 아름다운 비자림로에 들어서니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 어느새 단풍 행렬이 숲 언저리를 타고 급속하게 내려왔다. 밤 사이 불던 바람을 타고 불길같이 타올랐는지도 모르겠다.

ⓒ 김민수
나목도 있고 아직 푸른 이파리를 간직하고 있는 것도 있고 온통 활활 타오르는 것들도 있다. 어떤 것이면 어떠랴? 저들이 어울려 아름다운 가을 숲을 만들어 가는 것을. 숲이 단 한 가지색이라면 얼마나 단조로울까? 여러 가지 나무와 여러 가지 색이 어우러져 숲은 아름다운 숲이다.

숲길을 걷는다. 대낮인데도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나온다. 계절이 실감난다.

ⓒ 김민수
이파리들마다 서로 경쟁을 하며 "내가 숨겨놓았던 빛깔은 이런 것이었어, 내 속내는 이런 것이었다"고 바람을 타고 소리를 지르는 듯하다. 바람이 한번 숲을 훑고 지나가면 우수수 낙엽이 떨어진다.

어느 낙엽이라도 직선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공중에 머물 듯 선회를 하다 이제 편히 쉴 곳을 찾아 낙하하는 우아한 낙엽.

ⓒ 김민수
그들이 하나 둘 떨어진 곳마다 울긋불긋 물들어 가는데 건천(乾川)이 많은 제주의 계곡에 작은 소(沼)들이 맑은 물을 담고 있다. 신기하기도 해라. 그런데 맑은 가을하늘 담고, 낙엽 담고, 단풍 화사한 나무들의 그림자까지 담아 화사하게 자신들을 물들였다. 마치 붓을 찍어 그림을 그리면 울긋불긋 단풍색과 푸른 하늘색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 김민수
바람이 불면서 하늘의 구름이 햇살을 가리면 이내 또 다른 색으로 변하고, 내가 한 걸음 다가가면 또 다른 색으로 변한다. 참으로 신비하다.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물감, 그것은 가을빛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 김민수

ⓒ 김민수
이미 오래 전 떨어진 것들은 깊은 물 속에서 흙의 빛깔로 썩어져가고 이제 막 가을 바람, 시월의 마지막 날 부는 바람에 떨어진 것들은 물 위에서 더욱 아름답다. 내일이면 11월인데, 어쩌면 그들에게는 시월까지만 나무와 더불어 지낼 수 있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11월에 대한 소망이 있었더라도 이제 전혀 새로운 곳에서, 늘 위에서 바라보기만 하던 그 곳에서 새 달을 맞이하는 그런 시간이 되었다.

ⓒ 김민수

ⓒ 김민수
이래서 사람들이 가을 산을 좋아하는가 보다. 툭툭 튀어나오는 새싹의 소리가 싱그러운 봄도, 무성한 청록의 이파리 가득한 여름도, 앙상한 나뭇가지로 자기의 본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겨울도 좋지만 가을은 또 이렇게 떨어짐에 대해서 그 떨어진 것들의 새로워짐에 대해서 가슴 깊이 사색을 할 수 있어서 좋나 보다.

중년, 아니면 노년으로 갈수록 가을 산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지난 해보다 올해 가을 산이 더 깊게 다가오는 듯하다. 천천히 숲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가며 나의 남은 삶, 어떻게 이들처럼 아름답게 마감할 수 있을 것인지 깊이 관조해야겠다.

ⓒ 김민수
작은 소(沼)마다 담고 있는 것이 다르다. 맑은 물은 같은데 그 맑은 물에 각기 다른 풍경들을 새겨놓았다. 바람이 불면 그 작은 물도 파르르 떨고, 떠는 만큼 그 안에 들어 있는 풍경들도 떤다.

시월의 가을빛을 마감하는 날, 맑은 물 알록달록 물들인 가을단풍이 아름답다.

 

덧붙이는 글 | <비자림로 가는 길>

제주시나 서귀포시에서는 5·16도로에서 교래방향으로, 성산이나 봉개방향에서는 절물휴양림 지나 우회전해서 올라가면 비자림로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제주공항에서 30여분 거리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