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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벽 밑 남강풍경과 의암 사적비각
ⓒ 이승철
진주를 지나는 여행객이 진주성을 찾지 않는다면 그의 여행은 아무런 보람도 가치도 없을 것이다. 남강이 도심을 흐르는 우리나라 남쪽에 위치한 아름다운 도시 진주, 그러나 무엇보다 그 남강변에 진주성이 있어 더 빛나는 도시가 진주다.

수많은 외침에 시달려온 우리역사 가운데서도 가장 오랫동안 많은 인명피해와 국력의 손실을 입었던 전쟁이 임진왜란이다. 그 전쟁의 와중에서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월등한 전력의 적과 싸워 이긴 승전의 기쁜 장소이자 그렇게 싸워 장렬하게 산화한 아픔과 슬픔이 배어 있는 현장이 진주성이 아니던가.

우리들이 탄 승용차가 진주로 접어들어 남강변을 달리기 시작할 때부터 마음은 벌써 진주성에 먼저 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워 크게 이긴 3대 대첩 중의 하나요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나라를 사랑하는 우국충정과 뛰어난 전략, 그리고 헌신적인 노력으로 왜군의 서진을 막아 전세에 크게 영향을 미친 진주대첩의 현장은 강을 건너자 바로 왼편 강변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남강 다리를 건너 성문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성문 안으로 들어서니 바로 촉석루다. 남원의 광한루,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남한의 3대 누각 중의 하나라는 촉석루는 유명한 이름만큼이나 크고 아름다운 누각이었다.

▲ 강변에서 찍은 촉석루
ⓒ 이승철
고려 공민왕 14년에 세워져 그 사이 몇 번의 중수를 거쳤다는 촉석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웅장한 규모에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놓여 있는 화반이 다른 누각에서는 볼 수 없는 이채로운 모습이었다.

촉석루을 지나니 논개의 영정이 세워져 있는 논개사당 의기사다. 이 용모가 아름다운 모습의 영정 그림이 바로 친일화가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것이어서 다른 화가의 그림으로 교체가 결정된 상태인데 아직은 그대로 세워져 있었다. 우리나라를 침략한 왜군의 장수를 끌어안고 강물로 뛰어들어 그들에게 죽임당한 성민들의 복수를 한 의로운 여인의 영정은 그동안 어이없게도 친일화가가 그린 그림으로 봉안되어 있었던 것이다.

의기사를 나와 성 밖 강변으로 통하는 쪽문을 통과하니 바로 남강변이다. 돌층계 저 아래로 가을빛에 젖은 강물은 유유히 흐르는데 넓은 바위 한쪽에 의암 사적비와 비각이 세워져 있다. 큰 바위에서 약간 떨어진 물속에 직경 3m 정도의 평평한 모양의 바위가 하나 있으니 바로 의암이다. '의암' 바로 의기 논개가 진주성을 함락시킨 후 자축연을 벌이던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든 바위다. 강가에는 나뭇잎이 붉은 빛으로 단풍들어 논개의 분노를 말없이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강물에 뛰어든 의암
ⓒ 이승철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열정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변영로의 시 <논개>-


'의기 논개'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싸움에서 크게 이긴 대첩의 일등공신은 두말할 것 없이 충무공 김시민 장군이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진주성을 떠올리면 맨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논개인 것은 왜일까? 그리고 그가 껴안고 강물에 뛰어든 왜장은 과연 누굴까?

이곳 진주와 함양지방에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논개는 전북 장수에서 주달문의 딸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는 열네 살 때 아버지가 죽자 시정잡배였던 숙부가 지방 토호였던 김풍헌이라는 사람에게 민며느리로 팔아버리고 행방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 논개사당 의기사
ⓒ 이승철
이 사실을 뒤 늦게 안 논개 모녀는 외가인 안의의 봉정마을로 피신하였다, 그러자 그녀를 산 김풍헌이 당시 장수현감인 최경회에게 고소를 하여 문초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논개 모녀로부터 그들의 딱한 사실을 알게 된 최경회는 이들을 무죄로 인정하고 관아에 머물며 병들어 고생하고 있던 최씨 부인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고 한다.

그 뒤 논개의 미모와 착한 행실에 감탄한 최씨 부인이 최경회 현감에게 논개를 소실로 맞이할 것을 권유한 뒤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이런 여유로 논개는 18세가 되던 1591년 봄에 최경회 현감의 부인이 되어 무장현감으로 부임하는 부군을 따라 장수를 떠나게 되었다.

그 최경회가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진주성싸움에 참가하게 되자 논개도 따랐는데 진주성이 함락될 때 남편인 최경회도 전사하고 논개도 그 후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로 뛰어들어 함께 순절하였다. 당시 논개는 왜장을 물가로 유인하여 강물로 함께 뛰어들 때 열 손가락에 반지를 끼어 껴안은 손이 풀어지지 않도록 치밀하게 계획하여 실행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논개가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든 왜장은 누굴까?" 동행한 친구가 궁금한 듯 묻는다.
"어느 기록에도 그 왜장에 대한 기록은 없다는데 말이야."
"이름은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그의 지위는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지만...에야무라 로쿠스케라고 했던가?"
"그런데 그 이름이 그렇게 유명하지 않은 걸로 보아서 지위가 높거나 대단한 장수는 아니었던 모양이야."
"좀, 아쉽기는 하지. 고니시나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같은 대장급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야...그래도 얼마나 대단한 여인이야?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을 한 여인임에는 틀림이 없을 거야."

▲ 조선시대의 대포 총통
ⓒ 이승철
그렇다. 관원이나 군인이야 싸우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신분이 기녀였던 한 여인이 조국을 위하여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사람들의 복수와 나라를 위하여 한 몸을 던져 적장과 함께 죽음을 택한 장하고 의로운 행동을 어떤 찬사로 다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당시 그녀의 신분이 기녀여서였을까, 그런 장하고 아름다운 순국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사대부들의 편견으로 임진왜란 중의 충신, 효자, 열녀를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서는 논개의 충절을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진주 사람들은 해마다 진주성이 함락된 날이 되면 의암이 있는 강변에 제단을 차려 그녀의 의로운 죽음을 위로하는 추모제전을 벌여 조정의 관심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논개가 공식적으로 의기로 호칭이 된 것은 1721년인 경종 1년 경상우병마절도사 최진한이 의기논개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품의하여 그녀의 순국 사실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 이후부터였다고 한다. 무려 120여년이 지난 후였다.

그래서 진주성은 그 누구보다도 연약하지만 아름답고 용감했던 한 여인의 이름이 더 찬란한 이름으로 기억되고 빛이 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의기사를 둘러보고 뒤쪽으로 내려가노라니 또 다른 사적비가 눈길을 끈다.

바로 쌍충사적비다. 이 쌍충사적비는 임진왜란 때 바로 이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순국한 제말 장군과 그의 조카 제홍록을 기린 비이다. 제말 장군과 그의 조카 제홍록은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그들에 의해 비각이 헐리고 방치되었던 것을 1961년 현재 자리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제말장군의 비 밑에 있는 거북의 표정이 상당히 익살스런 표정이다.

▲ 쌍충사적비
ⓒ 이승철
오른 편 언덕 위로 오르니 임진대첩계사순의단이 자리 잡고 그 앞쪽 마당에 두 개의 위령비가 나란히 서 있다. 하나는 제 1차 진주성싸움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의 전적비이고, 또 하나는 3장사라고 일컫는 김천일, 황진, 최경회 및 그들과 함께 민관군이 함께 똘똘 뭉쳐 싸워 장렬하게 순국한 사람들의 영령을 기리는 촉석정충단비다.

또 성벽 옆에는 조선시대에 시용하였던 대포인 세 개의 총통이 전시되어 있어 어린이들의 좋은 구경거리가 되고 있었다. 진주성은 국내에 있는 어느 옛 성보다 크고 잘 보존되어 있었다. 성벽도 무너진 곳이 한 군데도 없이 말끔하고 성내의 조경이며 유적들도 잘 보존되어 있다.

북장대를 돌아 내려오니 언덕 아래 오른편으로 호국사와 창렬사가 보인다. 창렬사는 김시민장군과 김천일, 황진, 최경회의 위폐가 모셔진 사당이고 호국사는 당시 승병들의 본거지가 되었던 절이라고 한다.

유명한 건축가인 김수근의 설계로 지어진 임진왜란과 진주성싸움에서 장렬히 전사한 이들을 기리는 기념물과 가야문화, 석곽묘, 이형 토기, 갑옷, 투구, 말 장신구 등 가야 시대의 문화양식을 엿볼 수 있는 독특한 모양의 국립진주박물관을 들러 내려오니 잔디밭 길가에 김시민 장군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 김시민장군 전공비와 촉석정충단비
ⓒ 이승철



▲ 당시 승병들의 본거지였던 호국사
ⓒ 이승철
김시민 장군은 1554년 음력 8월 27일 충청도 목천현 백전촌(지금의 충남 천안 병천면 백전마을)에서 지평 김충갑 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조 충렬공 김방경 장군의 13세손이라고 한다. 그의 뛰어난 지략과 헌신적인 노력이 백성들과 군관이 함께 뭉쳐 진주대첩을 이끌어 냈으나 전투가 끝날 무렵 순시를 하다가 적의 저격으로 이마에 총탄을 맞고 며칠 만에 순국하였으니 후에 영의정으로 추존되고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은 진주대첩의 영웅인 것이다.

2차 전투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창의사 김천일은, "진주는 호남 지방으로 가는 통로에 있어서 순치지간(脣齒之間)(입술과 이빨의 관계)이다. 만일 진주성이 떨어진다면 곧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으로 쳐들어 올 것이다. 우리는 결단코 진주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김천일의 주장에 동조한 많은 의병장들이 진주성으로 입성하였다. 진주성으로 모인 이들은 장수와 무장 현감을 지냈고 많은 전공으로 절제사가 되었던 최경회, 유명한 의병장 고경명 장군의 아들인 복수장군 고종후, 나주의 양산숙, 동복현감 황진, 보성에서 의병을 일으킨 임계영의 부장이었던 장윤 등 대부분 전라도 출신의 의병장들이었다.

임진왜란이라는 어려운 국란을 맞아 목숨을 버려 성을 지키고, 성을 지키다가 전사한 사람들, 그리고 적장을 껴안고 강물에 투신하여 조선여인의 의로운 기개를 보여준 한 여인의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와 유적들을 간직한 진주성은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의 현장이다.

▲ 진주성 남강변에도 가을은 깊어가고
ⓒ 이승철
언제 둘러보아도 잔잔하지만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진주성과 논개의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것 같다. 진주를 떠나 함양 쪽으로 향하는 눈길 멀리 지리산의 연봉들은 붉고 노란 단풍이 불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10월 여행이벤트 응모>기사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시인이승철 을 검색하시면 홈페이지 "시가있는오두막집"에서 다른 글과 시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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