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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조문기)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위원장 윤경로)는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홀에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명단' 3090명을 발표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국치일에 때맞춰 지난달 29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할 친일인사 3090명의 1차 예비 명단을 발표하자 여론이 분분하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이 명단에 들어있는 것에 대해서는 일각에서 적잖은 반발이 있는 것 같다.

"단지 일본육사를 나왔다는 것이 왜 친일이냐"며 오히려 박정희는 민족주의자요 애국자라고 항변한다. 특히 일부 언론들은 자신들의 친일행적을 부정하고, 이번 친일인사발표가 편협한 사관에 기인한 것이며 박 전 대통령의 경우는 정치적 의도가 포함된 자의적 판단이라는 일부의 주장을 크게 부각, 이 역사적인 민족적 역사청산작업에 흠집을 내려 한 의도가 역력하다.

박정희를 살려 자신들의 친일행위를 정당화 내지 묻어버리려는, 아직도 이 땅에 시퍼렇게 살아있는 친일파들과 그 부류들의 뻔뻔함에 가슴이 시려온다. 이 세상에 이토록 반민족적인 행위에 부끄럼을 모르는 염치없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 '그래 박 대통령이 우리를 먹여살려줬는데 그까짓 일본장교 전력이 별거냐!'라는 이 속물들 앞에 이성, 정의, 역사, 그리고 사람의 설 자리는 없다.

오늘도 '박정희'만을 외마디로 부르며 역사를 비웃는 이들에게 비록 시공의 차이는 있지만 망국의 땅에서 박정희와 다른 길을 택하고 걸은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의 삶은 어떻게 비칠까?

독립운동자금 치마 속에 숨기고 압록강 건너는 20세 여인

▲ 독립투사들에게 '자동이 엄마'로 불리워진 5척 단신의 여성 정정화
"압록강 하류의 강변에 도착한 우리는 신발을 벗어들고 진흙과 자갈이 섞여 넓게 펼쳐진 강변을 따라 맨발로 삼십리 길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사방이 깜깜하고 바닥이 고르지 않은 밤길이어서 이세창씨의 바로 한 걸음 뒤에서 바싹 뒤꽁무니를 따라가자니 여간 벅차고 힘든 길이 아니었다. 거의 세 시간을 걸어 북하동에 이르렀을 때 어둠 저편에서 쪽배 하나가 기다고 있었다. …(중략)… 우리는 압록강을 가로질러 쪽배를 띄웠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어디선가 왜경들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장강일기> 중에서)

국내에서 비밀리에 모금한 상해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을 치마 속 전대에 숨기고 경비 삼엄한 압록강을 가슴 조이며 건너가는 저 가냘프고도 당찬 여인은 당년 20세의 망국조선의 딸 정정화다. 이미 상해로 망명가 있던 망국대신 김가진의 며느리이기도 한 그녀는 임정의 어려운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자진해서 5번이나 압록강을 넘나든다.

보다 못한 친정아버지가 일본유학을 권유하자 그녀는 왜 하필 적국 일본이냐는 명분과 임정에 대한 그녀의 막중한 책임감을 이유로 망설임 없이 제의를 거절한다. 그녀는 그 후 26년이라는 세월을 중국에서 임정요인들과 함께 풍찬노숙하며 조국독립활동을 하다 일본패망과 함께 고단한 망명생활을 접고 귀국한다.

하지만 그녀가 감격스럽게 밟은 광복 조국 땅은 친일파의 세상이 되었고, 남편의 납북, 보따리장수, 감옥생활, 그리고 '요시찰인'이라는 감시대상까지 험난한 인생여정이 이어진다. 그러나 그녀는 조국을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삶이 담긴 <장강일기>가 이 땅의 젊은이들의 귀감이 되길 바란다.

또다른 20대 조선 청년들

▲ 청산리 전투로 잘 알려진 김좌진 장군(왼쪽)은 22세 때 군자금 모금혐의로 체포되어 2년6개월의 옥살이를 했다.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던 나석주(가운데)는 23세 때 북간도로 망명,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25세 때 일본 육사를 졸업했던 지청전(오른쪽)은 박정희와는 다른 길을 걸었던 '떳떳한 일본 육사 출신 군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독립운동가 김익상은 한때 기독교계 학교 교직에 있었고 잘나가는 연초회사 중국지점에서 근무했었으나, 나라독립이 먼저라는 생각으로 뛰쳐나와 서울로 잠입,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졌다(26세). 다시 그 이듬해 1922년 3월 상해 세관 부두에서 시찰 나온 일본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향해 폭탄을 던졌으나 살해에 실패, 체포돼 복역 중 감형 석방되었으나 미행하던 일경에게 피살된다. 그의 나이 30세였다.

홍범도와 함께 청산리전투로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김좌진은 도산과 함께 세운 서북학회의 오성학교 교감을 역임했지만, 군자금 모금혐의로 체포되어 2년6개월의 옥살이를 할 때 그의 나이는 22살이었다.

부유한 명망대가 출신인 그는 조국독립이라는 대의를 안고 이후 만주로 망명, 독립군 사령관이 되어 1920년 10월 청산리 80리 계곡에서 1주일동안 일본군 5000여명을 맞아 10여 차례의 대공방전 끝에 3300여명의 일본군 살상이라는 쾌거를 식민지 조국에 안겨주었지만, 그의 나이 40세가 되던 1930년 추운 겨울 한 밀정의 흉탄에 이국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1926년 12월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이어서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철도회사를 찾아가 권총을 난사, 일인들을 사살한 후 추격하는 일경에 맞서다 지녔던 총으로 자결한 나석주는 이미 23세 때 북간도로 망명,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의열단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독립운동가였다.

우리에게 독립운동가 이청천으로 더 잘 알려진 지청천은 그의 나이 25세 때 일본 육사를 졸업, 후에 보병중위로 복무했으나 곧 1919년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에서 우리 독립군 양성에 힘썼으며, 1940년대 중경 임정 시절에는 광복군 총사령관으로 항일전을 수행한 '떳떳한 일본 육사 출신 군인' 중 한 사람이다.

장준하는 박정희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인물 중 하나다. 정주신안소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다 일본 유학 중 1944년 1월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된다. 그러나 그는 일본제국군인임을 거부하고 같은 해 7월 동료 3명과 함께 배속돼 있던 쓰가다 부대를 탈출한다. 그리고 이들이 임천의 중국군관학교를 거쳐 50명이 함께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향해 걷는 6000리의 대장정은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그러나 광복군 중위 장준하도 해방조국에서 여생이 순탄치 못했다. 박정희로부터 세번씩이나 구속되어 옥살이를 했고, 결국은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 (왼쪽) 26세 때의 장준하 모습. (오른쪽)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중국 산동성 유현의 어느 사진관에 노능서와 김준엽, 장준하가 차례로 섰다(왼쪽부터). 이들 셋은 학도병으로 참가한 후 일본군 병영을 탈출, 중경 임시정부까지의 긴 여정에 올랐다.
ⓒ 장준하기념사업회

그런데 박정희는?

망국조선의 딸 정정화는 20세 꽃다운 나이에 독립운동자금을 치마 속 전대에 숨기고 압록강을 건넜지만, 20세 청년 박정희는 안락한 생활과 미래가 보장되는 문경보통학교 교사였다.

22세 김좌진이 군자금 모금혐의로 체포되어 2년6개월의 옥살이를 했지만, 박정희는 22살 되던 해에 일본 제국군인이 되어 천황에게 충성하겠다며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이라는 충성혈서를 스스로 쓰고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다카키 마사오'는 일본육사를 졸업, 견습 사관생활을 거쳐 1944년 7월 열하성에 주둔하고 있던 만주군 제8단에 배속되어 일본 패망 때까지 일본장교로 복무한다.

만주군 '예비 소위' 박정희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졸업 후 2개월 간의 사관 견습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하기 직전인 1944년 6월말 일본군 소조(曹長, 상사에 해당) 복장으로 찍은 모습.
박정희는 일본이 패망하자 자랑스럽게 입었던 제국군복을 벗어던지고 광복군복으로 갈아입고 귀국 어엿한 대한민국 장교가 된다. 적국인 일본장교, 남로당 군책임자, 국군장성, 군사반란, 대통령, 유신독재, 은밀한 곳에서의 피살…. 아, 우리의 역사를 이보다 더 농락한 지도자가 또 있을까?

역사에 대한 도전

일제식민지배는 우리의 자원약탈, 국토유린뿐 아니라 아예 우리 민족을 일본 민족으로 동화시켜 우리 역사를 지워버리려는 무서운 민족말살정책이었다. 동화주의, 일선융화론, 내선일체, 황국신민 따위의 정치구호는 그 수단이자 목표였다. 그런데 당시 일부 지도층이나 식자들이 이런 구호를 앞장서서 부르짖고 몸소 실천했음에도 불구하고, 반성은 커녕 왜 친일이냐고 항변하는 것은 민족의 역사에 대한 도전이다.

일제 식민지배시 민족의 최우선 당면과제는 빼앗긴 주권과 국토를 되찾아 우리 한민족의 생존권을 보전하기 위한 독립국가 건설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국내외에서 온 민족이 나섰고, 특히 젊은이들은 귀중한 목숨을 조국광복을 위해 앞장서 내던졌다. 그런데 청년 박정희는 당시 한민족 구성원들의 합의에서 일탈하고 민족지상목표에 도전한 친일반민족자다.

역사적 심판 없는 박정희 찬가는, 이름도 남김없이 말없이 흔적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애국선열들에 대한 모독이며 문명에 대한 조롱이다.

조국이 있고 그 다음에 근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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