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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고야성 박물관 안에 전시된 거북선.
지금까지 많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영화나 드라마에 비해 KBS의 <불멸의 이순신>은 무엇보다 고뇌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원작인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 그려진 이순신의 모습이다.

어느덧 전쟁의 막바지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이순신에게선 비장미가 느껴진다. 용감하게 싸움만 잘하는 장군의 모습보다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하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더 잘 다가가는 듯하다. 시청률이 그걸 보여주고 있다.

임진왜란은 왜 일어났을까. 임진왜란은 이순신이라는 가장 극적이고 독보적인 한 인물을 부각시키게 되는 전란이기도 했지만 이로 인해 조선사회가 대변혁을 겪기도 했다. 독도영유권 주장으로 시끄러웠던 지난 몇 달 전의 모습은 현재 한·일간의 긴 역사의 갈등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사회의 가장 큰 사회적 변혁을 가져오게 한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라는 한 인물의 허황된 야망이 빚어낸 비극이다. 그는 일본에게는 전국시대를 통일한 영웅일 수도 있겠지만 조선의 입장에서는 조선사회를 송두리째 전란의 비극속에 빠뜨린 주범이다.

임진왜란의 일본 지휘사령부, 나고야 성을 가다

▲ 나고야성을 알리는 표지석.
ⓒ 정윤섭
<불멸의 이순신>이 막바지로 향하고 있는 이 때, 필자가 대한해협을 건너 임진왜란을 지휘한 총사령부가 자리 잡고 있었던 규슈(九州) 사가현 나고야(名護屋)성을 찾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일본의 4개 큰 섬 중 가장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는 규슈에 가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의 지휘사령부로 사용하였던 나고야성을 만나게 된다. <불멸의 이순신>의 인기 때문인지 최근 이곳을 찾는 한국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나고야성은 사가현에서도 아주 외진 시골에 있어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철도가 잘 발달되어 있는 일본이지만 나고야성을 가려면 사가현의 사가시를 거쳐 가라츠(唐津)항까지 열차를 이용한 뒤 거기에서 또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가라츠시에서 약 20여분을 가면 바닷가 언덕에 나고야성이 나온다.

▲ 나고야성벽의 일부.
ⓒ 정윤섭
일본에 가려면 배를 이용해야

오래전부터 한·일간의 교류는 대부분 바다를 통해 오갔는데 이러한 고대문화교류의 루트를 따라 그 느낌을 조금이라도 가져보려면 배를 타고 여행을 해보는 것도 좋다. 부산에서 일본의 후쿠오카까지는 최단거리에 최단시간의 배가 운행되고 있다.

지리적으로도 가깝지만 하루에도 수차례의 배들이 부산과 일본의 항구를 연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웃나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부산-후쿠오카 간 3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쾌속선을 탄다면 우리나라 대표섬인 제주도나 홍도를 향해 간다는 느낌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배를 타고 가는 동안 오랜 역사 속에서 한·일간의 교류가 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이루어져 왔음을 생각한다면 이 바다의 각별함을 느끼게 된다.

후쿠오카 항구에 도착하면 멀리 도심 속에 유독 솟아있는 후쿠오카 타워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일본의 거리가 그렇듯 깔끔하게 잘 정비된 도로와 가로수들이 인상적이다. 남단에 위치한 탓인지 높은 야자수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어 이국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

규슈의 나가사키에 네덜란드촌(하우스텐보스)이 있듯이 후쿠오카는 새로운 문화가 일본으로 들어오게 되는 관문이다. 때문에 일본의 고대문화가 가장 먼저 시작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사가현의 요시노가리 유적은 대규모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중인데, 주변에 흩어져 있는 이들 고대유적에서 한반도로부터 건너간 토기 등 다양한 문화의 전형을 찾아 볼 수 있다.
나고야성은 건축물은 없고 당시의 허물어진 성벽만 남아있는데 대규모 발굴 작업을 거쳐 성벽의 일부를 복원하기도 했다. 이곳은 풍광이 아름다워 여름 휴가철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또한 오징어회가 유명해 멀리서도 오징어회를 먹으러 온다고 한다.

나고야 성을 찾는 사람을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1993년 한·일 관계의 우호증진을 위해 나고야성의 입구에 건립했다는 '현립나고야성박물관'이다. 이 나고야성 박물관은 당시 외무성의 지원으로 건립한 것으로 한·일간의 선린우호를 목적으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등 역사 속에서 빚어진 한·일간의 갈등을 의식한 건립물인 셈이다.

이러한 의미를 반영하듯 박물관 입구에는 제주도에서 가져온 돌하르방과 전남 해남에서 제작해 왔다는 천하대장군 목각이 서 있다. 이곳에는 현재 8명의 학예사가 있는데 이중 한국 사람이 2명이다. 한 사람은 국제교류원으로 외무성에서 파견되어 있으며 다른 한사람도 비슷한 성격의 학예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물관에는 고대에서부터 최근까지 한·일 교류의 흔적들을 비교적 잘 정리돼 있다. 역사왜곡의 논란이 되고 있는 현대사도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해 놓은 것이 보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 임진왜란을 일으켰나

나고야성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평정한 뒤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위한 전초기지로 쌓은 성이다. 히데요시는 전국 통일 뒤 조선침략의 야욕을 이루기 위해 전국의 막부들을 불러 모아 나고야 성을 쌓았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 전국의 막부들이 직접 군인들을 거느리고 진을 쳤다고 하는데 이렇게 진을 친 병력이 15만에 이른다. 성 일대에는 각 지역의 막부들이 진을 치고 주둔했는데 그 진지도 발굴 작업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 나고야성 정상부에서 바라보는 바다. 바로 앞에 가당도가 보인다.
ⓒ 정윤섭
날씨가 좋으면 나고야 성 정상에서 대마도까지 보인다고 한다. 나고야성 바로 앞에는 가당도(加唐島)라는 섬이 있는데 가당도에는 백제의 무령왕이 탄생한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동굴이 있다고 한다.

또한 나고야성 바로 앞에는 가부도(加部島)로 이어지는 호자대교(呼子大橋)가 있다. 호자교(呼子橋)라는 이름이 지어진 이유가 재미있다. 일설에 섬에 유곽이 있었는데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비롯하여 장수들이 이곳 유곽에 있는 여자들을 불러 즐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 풍신수길의 모습을 짐작하게 하는 목각상으로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 정윤섭
히데요시는 키가 작고 못생겼다고 알려졌으며, 한쪽 손의 손가락이 여섯 개인 육손이었다고 한다. 본래 그의 어릴 때 이름은 고자루(小猿)였다고 하는데 고자루라는 이름은 그의 모습이 원숭이를 닮았다고 해서 아버지가 붙여준 것이라고 한다. '사가현현립박물관'에 히데요시의 목각이 전시되어 있는데 원숭이를 닮았다는 말처럼 희화적이다.

나고야성에 지휘소를 차린 히데요시는 모든 전쟁을 이곳에서 준비하며 지휘했으며, 1592년 4월 출정군을 9개로 나누어 15만 8천여 명을 선두로 조선을 침략했다.

히데요시는 일본 전국 시대의 무장으로 본래 전국통일을 눈앞에 둔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였다. 그는 기지와 용병에 뛰어나 각 지방을 정벌하여 세력 확장에 공을 세워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았다.

그는 1584년에 동부 일본의 큰 세력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굴복시키고, 1585년에는 간파쿠(일본 천황을 보좌하는 직책)에 임명되어 '도요토미'라는 성을 받았으며, 1590년에는 마지막 남은 여러 영주와 호족을 정복하여 100년간에 걸친 전국 시대를 수습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이후 그는 대륙 진출에 대한 야망을 꿈꾸며 1592년과 1597년에 조선을 침략,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킴으로써 한·일 관계사에 큰 상처를 남겼다.

▲ 나고야성에 남아있는 성벽.
ⓒ 정윤섭
그러나 왜군은 육지에서는 강했으나 해상전에서는 패배를 거듭했다. 섬나라의 왜군이 해상전에서 패배를 거듭했다는 것은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이순신의 지략으로 조선의 바다가 지켜지고 1598년 히데요시가 죽음으로써 7년간 끌어오던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1592년과 1597년에 시작된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우리는 '임진왜란·정유재란'이라고 부르지만 일본역사에서는 '문록(文祿), 경장(慶長)의 역(役)'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인 역사 서술에서는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고 할 일이 없어진 다이묘, 호족, 일반무사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결국 복잡한 국내사정과 그의 과대망상이 조선침략이라는 전란을 일으키게 한 게 아닐까.

일본의 성(城)과 우리나라의 성(城)

▲ 일본의 성은 성벽을 비교적 완만한 경사로 쌓는다.
ⓒ정윤섭

일본의 성(城)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은 순천의 일본왜성과 '울산전투'에 나오는 그림의 성처럼 우리나라 성과 축조법의 차이를 보여준다. 거의 직벽에 가까운 우리의 석성에 비해 약간 경사를 둔 축조법을 볼 수 있다. 적이 더 쉽게 벽을 타고 오를 수 있을 것 같지만 반면 쉽게 무너져 내릴 것 같지 않은 안정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대체적으로 일본의 성은 산성과 도성(읍성)과 같은 성격으로 쌓아지는 우리나라에 비해 마치 중세유럽의 영주들의 성처럼 그 지역을 다스린 막부들이 쌓은 성이 대부분이다. 성에서도 가장 높은 누각형식의 건물을 천수각이라고 부르는데 나고야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의 본거지에 세운 오사카 성을 본떠 그대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덧붙이는 글 | 불멸의 이순신이 인기를 끌고 있는 가운데 임란과 한일관계사를 생각하며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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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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