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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폭의 처참함을 사실 그대로 전해 주는 <맨발의 겐>. 우리나라 뿐 아니라 미국, 독일, 프랑스 등 많은 나라에서 번역 출간되었고, 오페라, 애니메이션 등으로 만들어졌다.
ⓒ 아름드리미디어
2차대전 종전 후 일본이 하나같이 "일본은 원폭 피해자"라고만 외칠 때 "아니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반전반핵평화 만화 <맨발의 겐>의 저자 일본인 나카자와 케이지(67)가 바로 그 주인공.

나카자와 선생은 '겐'이라는 소년의 눈을 통해 전쟁과 군국주의, 인종차별로 일그러진 1945년 일본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맨발의 겐>은 전쟁에 반대하는 가족이 겪는 슬픔과 한국인에 대한 차별을 빼고 더하는 것 없이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무엇보다 가해자인 일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45년 원폭 투하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카자와 선생은 히로시마에서 그 일을 직접 겪은 당사자다. 그도 당시 원폭으로 부친과 동생들을 잃었다. <맨발의 겐>에는 원폭 이후 나카자와 선생이 겪고, 느낀 것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특히 일본으로 건너와 온갖 수모와 멸시를 받았던 조선인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 것도 눈길을 끈다. 사실 필자가 이 책의 번역에 발 벗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선생에겐 동갑내기 조선인 친구가 있었는데, 작품 속에서 겐의 가족을 돕는 '박씨'는 바로 그를 모델로 한 것이라고.

하지만 역사에 대한 솔직한 시선을 가지려했던 <맨발의 겐>이 독자들에게 선보여지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나카자와 선생이 이 작품을 시작할 당시, 연재를 받아주는 곳이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책을 내줄 출판사를 찾아 전전한 끝에 1973년부터 주간 <소년점프>에 연재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번역본이 나온 지 5년, 그리고 이 책이 나온 지 32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나카자와 선생은 일본 내 우익의 협박을 많이 받고 있다고 한다. 60년이 지났건만, 그들의 폐부가 드러나는 건 여전히 꺼림칙한 일인 걸까. 광복 60주년을 맞아 지난 1일 일본 사이따마에 살고 있는 나카자와씨와 전화 인터뷰한 내용을 옮긴다.

"원폭투하 없었으면 내 삶도 달랐을 것"

▲ <맨발의 겐> 저자 나카자와 케이지 선생
ⓒ 조경국
- <맨발의 겐>은 선생의 자전적인 일을 기록한 작품으로 알고 있다. 만약,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선생의 삶도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당연하다. 내 삶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며 원폭에 대해 이렇게 큰 원한도 갖지 않았을 것이다."

- <맨발의 겐>을 그릴 당시만 해도 천황이나 전쟁을 반대하는 글, 또는 원폭을 다룬 글이 세상에 나오기 힘들었을 텐데.
"나는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1학년 때 원폭을 당했다. 원폭이 떨어진 날, 부친이랑 누님, 동생들은 다 타서 죽고, 그때 살아남은 모친은 그 뒤 소화 41년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을 치른 뒤 재장에 뼈를 받으러 갔더니, 몽땅 타버려 뼈 조각 하나 남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원폭의 무서움을 깨달았다.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원폭의 위험성을 온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 곧 원폭 이후 낙진으로 검은 비가 내렸던 히로시마에 대한 기억을 담은 첫 작품 <검은 비를 맞아서>(1968)를 썼다. 큰 출판사에서 출판을 거부당한 뒤 책을 내줄 출판사를 찾을 때까지 반년이나 걸렸지만, 좋은 편집장을 만나 출판하게 됐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이 출판사는 당시 주로 에로틱한 내용의 책을 내고 있었다."

- 모든 출판사에서 거절할 경우, 어떻게 할 생각이었나
"자비를 들여서라도 출판할 생각으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소년점프> 편집장이 <맨발의 겐> 연재를 약속했을 때 심정을 소회하면?
"<소년점프>의 나가노 다다스씨는 '네가 쓰고 싶은 대로 페이지 수를 줄 거고, 또 쓰고 싶은 대로 연수를 줄 테니 마음 놓고 써봐라'고 했다. 그는 '<맨발의 겐>은 <소년점프>의 양심을 걸고 연재하겠다'고 했다. 주마다 작품을 써나간다는 게 쉽지 않았지만 연재 후 <소년점프> 애독자 수가 훨씬 불어나, 결과적으로 소년잡지 가운데 제일 많은 부수를 자랑하게 됐다. 보람 있게 일한 날들이었다."

한국어판 가장 먼저 내고 싶었다

▲ 원폭의 열기를 피해 강으로 뛰어든 사람들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었다. 강에서 그대로 썩어가는 시신들이 처참하다. 이 장면들도 나카자와 선생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 나카자와 케이지
- 여러 나라에서 번역본이 출간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해외의 반응은 어땠나.
"미국의 달라스 지역에서 <맨발의 겐> 애니메이션을 상영했을 때다. 어떤 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고 '너무너무 미안합니다. 우리가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절대 이런 폭탄을 만들지 않게 했을 텐데, 우리 몰래들 펜타곤이 한 일이라 우리 죄가 너무 큽니다. 용서해주십시오'라며 하염없이 울었다. 또 한번은 영국에서 만든 연극 <맨발의 겐>을 보게 됐다. 이 연극은 남자배우가 소년기에 영어판 <맨발의 겐>을 읽고 감명을 받아 만들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어린 시절 며칠 밤을 침대 속에서 울면서 지냈다. 읽다가 울고, 눈물 닦고 또 읽다가 다시 한참을 울고... 그래서 어른이 되면 꼭 연극으로 만들리라 다짐했고, 이제야 연극으로 완성했다'고 소회했다."

- 2000년에 한국어판을 낼 때는 기분이 어땠는가.
<맨발의 겐>은 어떤 만화?

<맨발의 겐>은 저자 나카자와 케이지가 1945년 8월 초등학교 1학년 때 겪었던 히로시마 원폭의 참상을 만화로 옮긴 것이다. 열과 폭풍으로 살이 녹아 버린 사람들, 유리파편이 온몸에 박혀 고통스러워하는 소녀, 파리가 온몸을 뒤덮고 있는 아들의 시신을 지키는 어머니, 길거리 마다 쌓여 있는 시체. 만화지만 원폭의 피해를 너무나 생생하게 전해준다.

특히 전쟁을 반대했던 자신의 가족이 군국주의 일본 사회에서 겪었던 불행했던 경험과 당시 일본에 거주했던 조선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어 2000년 8월 10일 한국 출간 당시에도 많은 화제를 낳았다.

1973년부터 <주간 소년 점프>에 연재돼 반전반핵 만화로 명성을 얻은 <맨발의 겐>은 한국 뿐 아니라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었고, 영화와 오페라, 애니메이션, 뮤지컬로 만들어졌다. 그 외 <평화 만화 시리즈>와 <맨발의 겐은 비카동(원폭)을 잊지않는다>등 반전반핵을 주제로 한 다양한 작품을 출간했다. / 조경국
"한국어판은 어느 번역본보다 먼저 내고 싶었다. 스태프를 시켜 한국어를 아는 사람들을 수소문해서 번역을 의뢰하고자 했으나 맡아 주는 이가 없었다. '포기해야겠구나' 싶었을 때, 번역을 하겠다는 재일 한국인이 찾아와 너무 기뻤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일본대중문화 개방이 이뤄져 있지 않은 때라, 한국에서의 출판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게다가 주제가 원폭이었으니. 도중에 책을 출판하지 못하게 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비핵반전자들이 적극적으로 출판사의 등을 떠밀어 나올 수 있었다.

10권이 완역되던 이듬해 서울에서 뮤지컬 공연이 있어 방문했는데, 현장에서 만난 학생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만화책은 학교에 가져가면 안 되는데 계속 읽고 싶어서 가져갔어요. 그러다가 선생님에게 들켰거든요. 그런데 몰수는커녕 좋은 책 읽고 있다고 칭찬해 주시고 책도 그냥 돌려주셨어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라는. 학생 중에는 그 책을 3번이나 읽은 아이들도 있다고 했다."

"일본정부가 내 만화를 지원했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 일본 정부에서 해외 번역을 가장 많이 지원한 만화라고 들었다
"처음 듣는 얘기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책은 전쟁 책임과 관련해서 천황을 비판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실제로 일본 내 우익들의 공갈을 이겨내고 신변을 조심하면서 진행한 창작 작업이었다. 이를 일본 정부가 지원해줄 리 만무하다."

▲ 아트 슈피겔만의 <쥐>
ⓒ 조경국
- 혹자는 아트 슈피겔만의 <쥐>라는 작품과 <맨발의 겐>을 비교하기도 하고, 노사카 아키유키의 <반딧불이의 무덤>을 다카하타 이사오가 만화영화로 옮긴 <반딧불의 묘(火垂るの墓)>와 비교하기도 한다.
"<쥐>는 저자 아트 슈피겔이 <맨발의 겐>을 읽고 쓴 책이라고 들었다. 너무 자극적이어서 자신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집필하게 됐다고 했다. 내가 쓴 책이 그렇게 해서 역사의 진실을 토로하게 한 데 기쁨을 느낀다. <반딧불의 묘>도 잘 된 작품이다. 작품마다 비교한다는 건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본다. 맛이 서로 다르고 느끼는 감도 서로 다른 게 문학이나 예술 등 작품이지 않나."

- 피폭 60년이 지났다. 소감이 있다면?
"원한은 한때라도 풀리지 않았다. 60년이란 세월이 흐른 오늘도 늘 그 원한에 얽매여 살고 있다. 죽어서도 이 원한을 저승까지 가져갈 거다. 죽음에 대한 불안은 늘 우릴 따라 다닌다. 이미 많은 피폭 1세들이 하나 둘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나로서는 피폭의 기억이 없는 2세들 역시 불안한 요소들이다. 그 참담하던 히로시마의 피폭을 다양한 형태로 보존하는데 보다 큰 힘을 써야 한다."

- 요즘의 근황, 그리고 이후의 계획이 있다면.
"요새는 눈이 멀어서 가는 선을 긋지 못한다. 선은 그림의 생명이니, 이제 만화는 그리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영화를 만드는데 힘쓰고 있다. 과거의 히로시마를 무대로 한 <오꼬노미 핫짱>을 만들어 히로시마를 중심으로 상영했다."

"가해자 일본 그대로 보여줘 번역 결심"
[인터뷰]<맨발의 겐> 번역자 재일동포 조선어 강사 김송이씨

▲ <맨발의 겐> 번역자 재일동포 조선어 강사 김송이씨
ⓒ조경국
<맨발의 겐>을 번역한 김송이씨는 1946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다. 그러나 자신은 부모님이 태어난 제주도를 고향으로 생각한다. 중학교까지는 일본 학교에서 배웠으나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민족교육을 받고, 졸업 후 모교인 오사카 조선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1995년부터 <맨발의 겐> 번역을 시작했으며, 현재 일본어 통역과 번역을 하며, 오사카 긴키대학에서 한국어 강사로 일하고 있다. 지난 4일, 글쓰기 교육 연구회 연수(8월1일~11일) 참가차 귀국한 김씨를 만났다.

- 한국은 무슨 일로 오셨나?
“글쓰기 교육 연구회 연수 때문에 지난 4일 들어왔다. 이오덕 선생께서 주축이 되어 만든 모임인데 이오덕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전인 2003년 여름 연수부터 참여했다. <맨발의 겐>을 번역하고 있을 때 일본에서 선생님의 저서 <우리말 바로쓰기>을 우연히 읽고 꼭 만나 뵙고 싶었는데 2003년에서야 한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 <맨발의 겐> 번역 과정에서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다. 어떻게 번역을 맡게 된 건가?
"한국에 출간된 것은 2000년이지만 번역은 1995년부터 시작했다. 꼭 한글로 번역해 학생들이 읽도록 하고 싶었다. 제대로 작업을 하고 싶어 습자기술에, 인쇄기까지 다 구입했었다. 일본에서 출간된 원폭에 관한 작품들은 대부분 '일본은 피해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맨발의 겐>은 그렇지 않았다. 가해자였던 일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만화다. 번역을 하리라 마음을 먹은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 번역판이 나온 지 5년 정도 지났다. 그간 있었던 일 중에 기억나는 일이 있는지.
"처음 한국에서 출간하려고 했을 때 반대하는 분들이 많았다. 하지만 <맨발의 겐>이 담고 있는 뜻을 공감해 주었고, 출간 이후 많은 언론에서 관심을 가져주었다. 신영복 선생이 추천사를 써주기도 했다. 그리고 2002년 한국에서 <맨발의 겐>이 뮤지컬로도 만들어졌을 때는 나카자와 선생과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 광복 60주년을 맞아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부모님은 제주도가 고향이지만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랐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조선인이라고 놀리는 일본아이들과 싸우는 것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오사카 조선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달랐다. 그때만 해도 조선말, 조선고등학교에 대한 동경심이 있었다. 식민지 사람이라 억압을 받았지만, 내겐 우리말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우리말이 갈수록 영어나 외래어에 오염되고 남과 북의 말이 너무 많은 차이가 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 조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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