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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싫어져서 더 이상 함께 살고 싶지 않다. 법적 절차가 마무리 될 때까지 집을 나가있겠다.'

호주 퀸즐랜드 주 T시의 평범한 40대 직장인 A씨는 며칠 전 점심을 함께 먹던 동료 앞에서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사연인즉 "아내가 느닷없이 편지를 보내 이혼을 요구해 왔다"는 것. 그런데 A씨가 울음을 터뜨린 이유는 아내에 대한 사랑 때문만이 아니다.

호주에서 아내로부터 이혼을 요구받는 남성은 아내와의 못다 한 사랑에 대한 미련보다 이혼 뒤 짊어져야 할 경제적 부담 때문에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다.

이혼 후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자포자기 끝에 자살을 택하는 남성들도 연 1천명에 달하며 이 숫자는 해마다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차마 죽지는 못하고 마지못해 살아간다는 이혼남들도 부지기수이다.

때문에 흔히들 호주는 '이혼녀의 천국'이라고 한다. 바꿔 말하자면 '이혼남은 구제불능인 사회'라는 말도 된다. 왜 그럴까.

이혼남의 평생 족쇄(?), 자녀양육비관리국

▲ 이혼 여성들에게 재정적 도움을 제공하기 위해 정부가 발간한 각종 안내책자들.
ⓒ 신아연
부부가 이혼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자녀양육이다. 호주의 이혼율은 초혼파경 40%, 재혼파경 60%에 달한다. 그 결과 한부모 가정의 자녀수가 1백만 명을 웃돈다. 통계국에 따르면 호주 태생 어린이의 3분의 1은 성년이 되는 만 18세 이전에 부모의 이혼으로 양측 부모 중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할 운명에 놓이는 것으로 조사됐다.

부부가 헤어질 경우, 둘 사이의 자녀양육에 관한 문제는 이혼 판결 결과에 따라 자녀를 양육하는 쪽과 양육비를 대는 쪽으로 나뉜다. 호주에서는 대부분 아이의 정서적 안정, '직장남-전업주부' 구조 등의 이유로 여성에게 자녀양육을, 남성에게 자녀양육비 지급의 부담을 지운다.

호주정부는 이를 위해 가정복지부 산하에 이혼 자녀들의 양육비를 총괄하여 관장하는 관리국(Child Support Agency, CSA)을 두고 있다.

CSA는 이혼 후 혼자 아이를 키우는 홀부모들을 위해 상대로부터 양육비 명목의 돈을 받아 자녀를 양육하는 사람의 은행계좌로 전달해 주는 기관이다. 아이를 키우는 쪽이 대부분 여성임을 감안할 때 경제적 자립능력이 없는 이혼여성들에게 CSA는 구원과도 같은 존재다.

전국의 CSA 소속 3천 명의 공무원들은 매년 20억 호주달러(1조6천억원)를 전 남편들로부터 받아 자녀 양육권을 가진 전처들에게 전달하며, 이들이 이혼 후 겪게 되는 재정적 어려움에 대한 지원과 정보제공, 장기적 재정관리 등을 돕고 있다.

1988년에 정착된 CSA는 이혼 후 남성들에 비해 열악한 상황에 처하기 마련인 여성들의 재정적 안정과 보호차원에서 마련됐지만, 남성의 입장에서 보면 이혼에 따른 삶의 파산과 침몰을 예고하는 거대한 괴물로 인식되고 있다.

수입의 절반은 전처에게로, 이혼 후 사실상 두 집 살림

이혼한 남성 상당수는 수입의 절반가량을 CSA에 자동압류 당하게 돼 "자식들이 성인이 되기 전에는 이 족쇄에서 풀려날 길이 없다"며 분개한다.

전처가 데리고 있는 자녀들에 대한 양육비 부담률은 자녀가 1명일 때는 소득의 18%, 둘일 경우 27%, 다섯 이상이면 36%다. 그러나 이혼당시 당사자들의 합의 사항이나 법원의 판결 등에 따라 실직기간 중의 양육비를 빚으로 떠안게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실제 부담률은 정해진 비율보다 높아지는 경우가 많다.

또 양육비 비율을 계산할 때는 세금을 떼기 전 소득을 기준으로 하지만 실제 지급액은 세금 공제 후의 실질소득에서 나가기 때문에 세금 부담이 매우 높은 호주의 상황(최고 45% 세율적용)을 감안한다면 이혼 남성들은 평균적으로 수입의 절반을 내놓게 되는 셈이다.

재혼을 할 경우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수입의 반을 전처에게 떼어주고 나면 새로 꾸린 가정의 생활비가 절대 부족해지고 여기에 만약 자식이 생기게 되면 법적인 재정보호를 받는 전처와의 사이에 난 자식들보다 훨씬 적은 돈으로 키울 수밖에 없다. '가정'이 깨진 자리에 '가난'이 대신 자리 잡는 것이다.

매달 전처에게 1천 호주 달러(약 80만원)를 보내는 한 재혼남성의 경우, 새로 맞아들인 아내가 맞벌이를 하는 동안은 그럭저럭 '두 집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었지만 아내가 출산을 앞두고 직장을 그만 두게 되자 생활의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CSA가 있는 한 전처에게 송금을 끊을 수는 없는 일. 뾰족한 대안 없이 생활은 궁핍과 쪼들림 속으로 또 한 단계 내려앉았다.

이혼남들은 전처에게 보내야 하는 자녀양육비도 부담스럽지만, 그렇게 꼬박꼬박 보내지는 돈이 과연 자녀에게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의문스럽다는 것에 더 분개한다.

CSA를 통해 양육비를 대는 이상 아버지로서 아이들을 정기적으로 만날 엄연한 권리가 있음에도 실상 아이들을 자주 만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 이혼남들의 공통된 하소연이다. 전처의 이런저런 핑계와 이유로 이혼법정의 자녀 접근 규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CSA를 통해 양육비 지급은 철저하게 관리하는 반면 양육을 맡고 있는 전처 쪽의 태만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경고나 중재를 책임지는 물리적 장치가 허술하다는 것.

50대 이혼남의 항변 "버는 족족 CSA로...죽지 못해 산다"

▲ 시드니 서부에 사는 50대 이혼남의 사연을 소개한 ABC-TV 시사 토론 <4 코너스>. 방송은 "CSA가 이혼남들에게 과도한 경제적 부담을 지우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달 중순 경 방영된 ABC-TV 시사 토론 <4 코너스(4 corners)>에서는 자녀양육비 부담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시드니 서부에 사는 50대 이혼남의 '극단적인' 사연을 소개해 이혼남들의 불만에 힘을 보태줬다.

"제 현재 수입은 국내 평균 임금을 웃돌지만 저는 제 한 몸 누일 방 한 칸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처지입니다. 차도 없고, 집도 없고, 모아놓은 돈도 한 푼 없는 알거지와 다를 바 없는 신세지요. 버는 족족 CSA로 돈이 다 빠져나가면 입에 풀칠하기에도 부족합니다. 하도 기가 막혀서 따지러 갔더니 자기들은 법대로 하는 것뿐이니 그렇게 형편이 어려우면 노숙자 시설에 가서 도움을 청하라고 합디다."

이 남자의 아내는 첫 아이가 태어난 후 집을 나갔다. 그 후 잠시 들어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가출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그는 CSA로부터 "당신은 두 아이의 아버지이니 자녀 양육비를 지급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 남자는 "나도 모르는 사이 태어난 둘째가 내 아이라는 확신이 없으니 아내를 만나게 해 달라"고 CSA측에 요청했으나 아내가 만나기를 원치 않아 주선해 줄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사는 곳도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 이후 그는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고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 '자식'을 위해 18년간 양육비를 대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남자는 파국에 이른 결혼생활의 충격으로 실직한 데다 파경당시 아내 몫의 재산 부분이 빚으로 남아 밀린 양육비(1만5천 호주달러)를 대느라 CSA에 수입대부분을 압류당하고 있는 상태다. 그에 따르면, CSA는 그의 잔업수당은 물론, 자투리 돈까지 철저하게 가져갔다.

<4 코너스>는 이 상황을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어느 날, 어느 여인이 CSA로 걸어 들어와 한 남자를 지목하며 '이 사람이 애들의 아버지'라고 선언한 순간, 한 남자의 비극은 시작되고 그 비극은 '20년 형'이 끝날 때까지 지속됩니다."

"CSA가 무소불위라고? 양육비 떼먹는 남자들도 많다"

이혼 여성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무소불위의 CSA'라는 남성들의 주장과는 달리 CSA는 당사자들의 자진 정보제공에 의존하여 운영되는 수동적인 기관에 불과하다는 것. 예를 들어 실직상태에 있던 이혼 남성이 재취업을 하고도 양육비를 주지 않기 위해 CSA에 보고를 하지 않으면 CSA 데이터에는 여전히 실업자로 분류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아내들은 버젓이 직장이 있는 전 남편에게서 한 푼도 받지 못하게 되지만 CSA의 역할 한계로 인해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전 배우자가 수입이 없는 경우 CSA의 지급액은 자녀수에 관계없이 가구당 겨우 5달러에 불과하며, 이런저런 이유로 이혼녀의 40% 정도는 전남편으로부터 자녀양육비를 전혀 받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아이를 맡고 있는 여자 쪽에서는 돈을 제때 받기 위해서 자식들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무기(?)'로 쓰게 되고, 남자들은 더욱 화가 나 어떻게든 돈을 안 주려고 하는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론과 정치권은 CSA를 개혁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쪽으로 모아지고 있다.

자녀를 양육하지 않는 이혼남성들이 자녀양육비를 부담하는 건 당연하지만, CSA가 이혼남들에게 과도하게 경제적 부담을 지운다는 것이다. 또 이혼한 여성들은 전배우자들로부터 받는 자녀양육비 외에도 홀부모 수당을 비롯, 교육비 및 주택임대보조금 등의 정부지원금을 별도로 받기 때문에 남성들보다 이혼 후 재정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놓인다는 것도 그 이유다.

일부에서는 "CSA는 남성들의 기본적인 삶의 권리를 박탈하고 남성 차별을 고착화하는 수치스런 제도"라는 신랄한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 갈라선 부부 사이라도 자녀 양육비 부담문제로 둘 사이의 갈등은 계속된다.(사진은 본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신아연
"이혼자녀 양육비를 공평하게 적용하자"

현재 호주 정치권은 이혼 자녀의 양육비를 양측 부모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할 것을 골자로 하는 세부안을 검토 중이다. 즉 남편과 아내 중 수입이 더 많은 쪽에게 보다 많은 비용을 지우고, 양측이 같은 액수를 번다면 반반을 부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양측 부모가 자녀와 보내는 시간수도 비용 적용의 한 요인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자녀가 한 주에 하룻밤 이상, 1년에 14~34%를 다른 한쪽 부모와 보낼 경우 그 시간 만큼에 해당하는 양육비용을 삭감하자는 것. 예를 들어 어머니와 살고 있는 자녀가 1년 중 아버지 집에서 자고 온 날짜가 51~124일에 해당할 경우 아버지가 부담하는 양육비 가운데 24%를 면제하는 식이다.

양육비를 산출할 때 자녀들의 연령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비용을 일률 적용하는 현행 방침을 수정해 12세를 기준으로 차등적용 하자는 것. 자녀가 커갈수록 교육비 등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가는 현실을 고려해 청소년 자녀들에게는 12세 미만보다 2~3배 높은 양육비를 지급토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자녀를 키우고자 하는 의지가 보다 적극적인 남성과 그렇지 않은 남성을 구분, 자녀에 대한 애정도와 관심에 따라 양육비 부담책정 기준을 세분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자녀 양육비제도의 개혁을 주장하는 전문가들은 "현대사회에서의 이혼이란 결코 결혼생활의 끝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이혼은 함께 살아가던 결혼 형태를 두 가구로 개편한 상태를 의미하며, 자녀양육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개편된 기초구조를 바탕으로 어떻게 재건축을 할까에 집중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부부관계가 깨어지더라도 그들에게 남겨진 자녀에게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를 다할 수 있는 합리적 해결책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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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 이민, 호주동아일보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지냈다.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를 꾸리며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부산일보 등에 글을 쓰고 있다. 이민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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