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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소설 같은 인생

▲ 사할린 귀환 동포 임종구 씨
ⓒ 박도
사람의 팔자가 사납거나 세상살이가 험하거나 어려울 때 ‘기구(崎嶇)하다’고 말한다. 사할린 동포로 영주 귀국하여 인천시 부평에 살고 있는 임종구(68)씨, 그분이 나에게 준 명함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 재단회 회장’이라는 긴 직함이 새겨져 있다.

격동의 현대사에서 살아남은 사람 가운데 기구한 운명이 어찌 그분 한 사람뿐이랴 만은 잠깐 들어본 그분의 인생 유전도 한 편의 소설처럼 드라마틱하다.

당신 아버지의 고향은 충청남도 논산군 상월면 학당리 89번지였다. 1930년대 말, 일제는 태평양 전쟁 도발을 앞두고 전쟁 물자를 조달코자 조선반도에서 수많은 젊은이를 ‘징용’이라는 이름으로 끌고 가서 탄광이나 군수공장에 노무자로 내몰았다.

그 무렵 논산군 상월면 면서기가 학당리 임씨 집 큰아들에게 징용 통지서를 전하고 갔다. 종구씨의 큰아버지에게 날아든 통지서였다. 마음씨 착한 종구씨의 아버지 임달봉씨는 형님은 장손으로 집안을 지켜야한다면서 대신 자기가 형의 징용서를 받아가지고 집을 나섰다.

그때가 1939년으로, 임달봉 씨는 결혼한 지 몇 해 안 된 아내와 젖먹이 아들(임종구)을 고향 땅에 두고 일제에 끌려 낯설고 물선 사할린으로 갔다. 지아비를 기다리다가 지친 종구씨 어머니는 1942년 젖먹이 아들을 등에 업고서 남편을 찾아 사할린으로 갔다.

파렴치한 일제

일제는 애초의 약속대로 징용자가 탄광에서 2년만 고생하면 노임으로 모은 목돈을 쥐어주면서 고향으로 돌려 보내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귀국은커녕 노임은 강제 저금을 해야만 했고, 오히려 조선반도에서 붙들려온 강제 징용자는 날로 늘어나기만 했다.

수십만 명의 조선인 강제동원 징용자들은 힘들고 험한 탄광 갱내 작업이나 철도나 도로 건설에 동원돼서 현장 사고로 불치의 장애인이 되거나 사망한 사람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자 사할린에 징용 온 조선인들은 너나없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사할린 남쪽 코르사코브 항에 몰려들었다. 일제는 자기네 일본인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본국으로 데려갔지만, 대부분 조선인 징용자들은 사할린 땅에서 붉은 새 주인(구 러시아)을 맞이하여야만 했다.

그 당시 여덟 살이었던 소년 임종구는 조선인 징용자들이 항구에서 발발 동동 굴리며 울부짖었던 그때를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귀국하는 첫 배에는 조선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저희 일본사람만 가득 태우고 떠났다는데, 그 배를 미국이 폭탄으로 침몰시켜버렸다고 했다.

그러자 다음 배부터는 일본인들이 강제로 조선 사람을 가에다가 태우고 저희 일본인들은 안에 타고서 귀국하더니, 곧 무사하자 그 다음부터는 다시 저희들만 철저하게 단 한 사람도 사할린 땅에 남기지 않고 쓸어가고는 저희가 강제로 데려다 놓은 조선 사람은 그대로 팽개쳐 버린 채 도망간 파렴치한 집단이라고 했다.

철저한 조선인으로 살다

▲ 이영기 변호사와 악수하는 임종구 씨(오른쪽)
ⓒ 박도
임종구씨는 사할린 땅에서 철저한 조선인으로 살았다. 필자가 그 영문을 묻자 부모, 특히 어머니가 꽤 유식한 식자로 자기 형제들을 그렇게 교육시켰다고 했다. 임종구씨는 1989년 유지노사할린스크에 한국어학교도 세웠다.

그런 가운데 일본의 양심 있는 지식인 다카기 겐이치(高木健一) 변호사가 1975년부터 동경지방재판소에 ‘사할린 억류 한국인귀환 청구 소송’을 제기하여 내외에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며 대한변협에서도 지익표, 김창욱, 함정호, 최덕빈, 강철선, 한승헌, 이영기, 강신옥 변호사 등이 나서서 ‘사할린 동포 법률구조회’를 구성하여 팔을 걷고 나섰다.

오랜 소송 끝에 마침내 원고 측이 승소하여 일본정부가 32억여 엔을 제공하고 한국정부는 한국인 1세대들이 영주 귀국 입주할 아파트 500세대와 100명을 수용할 요양원 부지를 부담케 하여 1997년부터 사할린 동포 1세대 일부가 안산시 고잔동에 영주귀국하게 되었다.

임종구씨는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이 일편단심으로 조국에 돌아가고자하는 망향의 한을 끝내 풀어드리지 못한 채 사할린 땅에 묻고서, 당신 자식들도 사할린 땅에 남겨둔 채 부인과 지난 2001년에 영주 귀국했다.

지난 6월 하순, 임종구씨는 사할린 동포 법률구조회 이사로 참여, 사할린을 방문하여 한국어학교에 교과서를 보내주고 사할린 동포들의 귀국에 적극 도와준 이영기(76) 변호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자 사무실로 찾았다. 두 분은 반가운 악수를 나누고 지난날의 감회를 회고했다.

마지막 소망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시에 있는 안중근 의사 추모비
ⓒ 임종구
요즘 임종구씨는 자신의 영주 귀국에 만족치 않고, 중국 하얼빈 구이지정 공원에 안중근 동상을 세우고 기념관을 건립하는 일에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분은 어려서부터 안중근 의사를 흠모한 나머지 2002년 9월 17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시에 안중근 의사 추모비를 여러 뜻있는 동포들과 세운 바 있다고 한다.

당신이 눈을 감기 전인, 가능한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의거 100주년인 2009년에 하얼빈 땅 역사의 현장에다가 안 의사 동상과 기념관을 세워서 후세에 귀감이 되는 교육장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이미 하얼빈 시 도시 관리국의 허가까지 받았다고 하면서 건립비 약 450만여 위안(중국돈) 모금에 한국 중국 양국을 분주하게 오가며 정성을 쏟고 있다. 한 귀환 동포의 마지막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빈다.

덧붙이는 글 | (임종구 씨 연락처: 032-515-6347)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올랐던 인터뷰 기사를 모아 도서출판 '새로운사람들'에서 "박도가 만난 사람들 <길 위에서 길을 묻다>"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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