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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연같았던 조연, 모든 여자들이 꿈꾸던 남자 '재희'
ⓒ SBS
"내 생애 최고의 영화!"

이 말은 각 영화사이트의 네티즌 20자 평점란을 보면 자주 보게 되는 말이다. 개인적인 기억에 그다지 와닿지 못하던 영화들에 대해 저런 평을 남겨놓은 네티즌들을 보면서 개개인의 감성이 얼마나 다르고, 시각 또한 얼마나 다른 것인지 다시 한번 느끼게 되는데, 한편으로 일부 네티즌들이 자신의 '삶'까지 걸어야 할 정도로 신중하게 써야 할 저 말을 다소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저런 표현을 보게 되면 필자가 가장 감동 깊게 본 '내 생애 최고의 영화'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새삼스레 생각해본다. 굳이 그런 영화들을 언급하자면 필자가 충무로에서 가장 존경하는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브라더스>가 제일 먼저 생각나는 편이다. 그 외에도 어느 액션키드의 범상치 않은 등장을 예고했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그리고 필자를 단숨에 험프리 보가트의 열성팬으로 만든 <카사블랑카>, 어린 시절 성냥개비를 물고 다니게 했던 존 우와 저우룬파 콤비의 <첩혈쌍웅> 정도가 생각난다.

하지만 저런 명작 중의 명작들도 이 작품에 비하면 그 감동의 깊이가 모자란 것은 사실이다. 드라마를 그다지 깊게 보지 않는 편인 필자가 어린 시절에 본 드라마임에도 결코 잊지 못하고 있고, 얼마 전, 이 드라마가 방영된 방송국 홈페이지를 열심히 방문해 다시 이 드라마를 본 뒤, 그 감동을 회상했던 적도 있다. 이 드라마는 바로 64.5%라는 시청률로 우리나라 역사상 TV시청률 3위까지 기록한 최고의 드라마 중 하나인 <모래시계>다. 필자의 나이 불과 13세였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빼먹지 않고 열심히 봤던 드라마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모래시계>는 그 이전까지 드라마는 물론이고,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영상미학의 극치를 보여준 드라마로 기억된다. 극중 태수가 아버지의 빨치산 경력으로 인해 육사 시험에서 낙방하자, 자책감에 괴로워하던 어머니가 기차역 플랫폼 앞에서 떨어진 흰 스카프를 줍기 위해 몸을 굽히다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의 죽음을 흰 스카프가 하롱하롱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장면으로 간접적으로 처리했던 것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 "나 떨고 있냐?" 이 대사는 그 당시 장안의 화제였다.
ⓒ SBS
당시로선 상상할 수 없었던 영상 미학

뿐만 아니다.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는 우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방망이를 내려놓은 태수가 흠씬 두들겨 맞는 장면이 천천히 흘러가던 순간으로부터 시작해서 태수와 종도의 학생 시절에서 어른이 된 모습으로 넘어가는 장면에서 힘껏 던진 야구방망이가 날아가는 순간 그들이 어른이 되었음을 보여주던 테크닉 넘치던 그 장면에는 진심으로 깊이 감탄했다.

또한 종도의 일당으로부터 혜린을 지키기 위해 혈투를 벌이다 죽음을 맞는 재희의 죽음에 관한 10분간의 애틋한 카메라 워크와 검사가 된 우석이 친구인 태수의 사형을 구형하면서 태수의 미소나 그 괴로움에 서류를 떨어뜨리며 눈물을 떨구던 우석의 모습, 이 모든 장면들은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이 TV드라마에서는 처음 보던 장면들이었다. 사형을 집행하기 전의 태수가 했던 명대사, "나 떨고 있냐?"는 장안의 화제였다는 후일담도 있다. 사형집행 직전의 그 정적, 아마 대한민국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였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박진감 넘치던 액션신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액션신은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에서나 볼 수 있었던 액션신이었다. 한마디로 주말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거나 아니면 명절연휴 저녁에 방영하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런 화려한 액션이 월요일, 화요일 저녁에 TV 드라마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종도와 태수가 목숨을 걸고 달리는 트럭 위에서 주먹을 휘두르던 장면은 가히 압권이었다.

물론 이 드라마의 감동에는 스토리 역시 절대 빼놓을 수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의 드라마라면 <질투>나 <우리들의 천국>과 같이 우리의 소소한 일상에 관한 재치있는 해석이나 최수종이나 홍학표같은 당대의 청춘스타들의 아기자기한 사랑 이야기가 주류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모래시계>는 그런 일상적인 주제와는 180도 달랐다.

실제로 있었던 슬롯머신계의 사건을 바탕으로 일그러진 우리의 현대사를 태수와 우석이라는 두 친구의 인생살이에 모두 주입시켜 대단히 큰 스케일을 자랑했으며, 태수와 우석, 그리고 혜린이라는 세 남녀의 엇갈리는 사랑이야기는 그런 큰 스케일로부터 오는 무거움을 전환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거기에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혜린에게 지고지순한 사랑과 함께 목숨까지 희생한 재희의 이야기는 대단한 화젯거리였다. 오죽하면 극중에서 검도를 하는 재희 덕분에 당시에 검도가 크게 유행했을 정도라고 한다.

또 하나, 모든 이들의 염원을 거부한 '새드 엔딩' 역시 거의 강박관념과도 같이 보였던 당시의 모든 드라마들의 '해피 엔딩'과 차별화된 요소라 할만 하다. 대한민국 드라마 역사상 시청률 1위를 기록했던 <첫사랑>의 재미는 원래 죽는 설정이었던 주인공인 최수종의 '찬혁'이 시청자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살아나면서 다소 식상해졌음을 생각하면, <모래시계>의 그러한 '고집'은 특별했다. 사실 <모래시계>의 그러한 '고집'이 스토리에 흠을 남기지 않은 것이다.

▲ 음악 제목처럼 이들은 '서로 다른 연인'이었다.
ⓒ SBS
중년 연기자의 열연이 완성도 높여

하지만 저 많은 요소들이 받쳐준다 하더라도 배우들의 연기가 엉성했다면 <모래시계>는 그런 명작 반열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각각 태수, 우석, 혜린으로 등장했던 최민수, 박상원, 고현정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중년의 중후한 멋이란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었던 윤회장 역의 박근형씨나 장도식 역의 작고한 남성훈씨의 연기, 또한 태수의 정신적인 스승이던 보스로 등장한 이희도씨의 연기는 일품이라 할만했다.

"용서도 힘이 있어야 돼. 넌 그걸 배워야 한다"라는 윤 회장의 명언과 "이런 일에는 기본이 있어. 밟을 때는 철저히 밟아야 한다는 거지"라던 남성훈씨 특유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빛을 발하던 그 순간, 또한 교도소로 면회 온 태수에게 "잘못 배웠구나"라며 일침을 가하던 이희도씨의 날카로운 눈빛 등 <모래시계>의 품위를 끌어올린 것은 오히려 조연으로 등장하는 중년 연기자들이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개인적으로 이희도씨의 팬이다. 비록 또 하나의 야누스의 얼굴인 김갑수씨에 비해 다소 가려지긴 했지만, 코미디면 코미디, 카리스마면 카리스마, 때로는 이웃집 아저씨, 거기에 <제5공화국>에서처럼 냉철한 이론가, 도대체 이희도씨가 못하는 연기란 무엇인지 궁금할 정도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종도' 역의 정성모씨다. 고등학생 종도로 등장했던 김정학의 리얼한 전라도 사투리도 '종도'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살리는데 처음부터 큰 공헌을 했지만, 푸근한 이웃집 아저씨 정도로 연상되던 정성모씨의 그런 비열하기 이를데없는 악역 연기는 할리우드의 존 말코비치나 게리 올드만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진정한 악역의 표본이었다. 특히 탈옥까지 감행하며 종도를 죽이려 했던 태수가 엄마를 애타게 찾는 종도를 보며 마음이 악해져 살려줬지만, 결국 종도가 얼떨결에 자신의 본능이 시키는 대로 칼을 빼들어 태수를 찔렀을 때를 생각해 보라. 아마도 대한민국의 모든 이들이 분노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모래시계>에서의 '태수'가 최민수에게 있어서 가장 기억될만한 배역이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최민수에게 있어 '태수'는 딜레마가 되었다는 점이 대단히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그 이후의 최민수는 늘 '태수'처럼 카리스마있는 '폼나는' 배역으로만 등장했다. 개인적으로 <사랑이 뭐길래>의 장난꾸러기 '대발이'를 최민수 최고의 연기로 생각하는 필자로서는 '태수'가 오히려 독이 되었다는 생각에 안타깝기도 하다.

<모래시계>는 드라마던, 영화던 이제 필수적인 요소가 된 배경음악에 있어서도 선구자로 불릴만 하다. 이시오프 꼬브존의 <백학>은 특유의 장중하고 남성적인 분위기가 드라마의 분위기와 환상적으로 결합하며,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 중 하나가 되었고, 혜린의 테마 '서로 다른 연인' 역시 감미로움이 오래 남는 좋은 음악이다. 도대체 단점을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을 정도로 모든 요소가 완벽했을 정도로 <모래시계>는 대단한 드라마였다.

그런 의미에서 모 포털사이트의 영화코너에 소개된 <모래시계>의 네티즌 리뷰란에서 인상적으로 보았던 'yjhlkj'라는 네티즌의 짧은 리뷰를 소개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모래시계>가 지금 시대에 나왔다면 <다모>폐인보다 몇 배 더 큰 반향이 일지 않았을까? TV 역사상 가장 훌륭한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10년이 넘도록 <모래시계>의 감동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 이후로 명성에 맞는 훌륭한 재미를 보였던 드라마는 조재현씨의 열연이 돋보였던 <피아노> 외에는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편으로는 <모래시계>가 인터넷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절에 방영했다는 것이 때로는 유감이다.

<모래시계>는 여러 가지를 종합해볼 때, 시대를 앞서간 작품이라고 할만하다. 하지만 <모래시계>는 때때로 영화 <시민 케인>처럼 시대를 앞서간 작품들이 겪어야 했던 불운을 전혀 겪지 않은 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살아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행운아다.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모든 장르를 망론하고, 진정한 '명작'이라는 것은 과거와 미래의 구분 없이 모든 이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서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모래시계>처럼 모든 것이 갖춰졌던 드라마, 그런 드라마가 다시 나올 수 있을까? 물론 앞으로도 쉽지는 않을 것 같다.

▲ 최민수의 눈빛 연기는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 SBS
<모래시계>에서 찾은 '옥의 티'

<모래시계>를 수없이 봤던 필자는 그런 덕분인지 약간의 옥의 티를 찾을 수가 있었다.

'종도'의 성은 이씨인데, 고등학생 시절이나 '배신'을 하기 전의 '종도'는 스스로 '오씨'라고 소개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또한 실베스타 스텔론을 '약간' 닮은 어느 단역연기자가 등장하는 장면을 7장면이나 볼 수 있었다. 이 분의 마스크가 다소 튀는 탓에 찾아보기 쉽기 때문인 듯하다. 때로는 윤 회장의 부하로, 때로는 태수의 부하로, 때로는 삼청교육대를 탈출한 태수를 체포하는 군 장교로, 이렇게 여러 번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분은 <제5공화국>에서도 5·18 당시의 시민군으로도 모습을 비추었다.

덧붙이는 글 | 브레이크뉴스, e-조은뉴스에도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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