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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의 목릉은 임진왜란의 병살을 누르기 위한 병풍석이 둘러있다.
ⓒ 한성희
동구릉에서 가장 깊은 안쪽에 자리잡은 왕릉이 선조(1552∼1608)의 목릉(穆陵)이다. 목릉은 건원릉 왼쪽 두 번째 산줄기에 있고 건원릉에서 내려와 옆에 있는 목릉 가는 길로 들어서서 조금 걸어들어가면 나타난다.

홍살문에 이르기까지 앞에 있는 꺾어진 참도 때문에 목릉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홍살문을 들어서야 비공개 왕릉인 목릉의 모습이 나타나지만 현재 보수중이라 정자각과 비각 공사가 한창이다.

▲ 정자각과 비각을 해체보수 중인 목릉.
ⓒ 한성희
동원이강릉인 목릉은 왼쪽에 선조가, 중간에 의인왕후, 오른쪽에 인목대비가 잠들어 있다. 의인왕후(1555~1600)는 선조33년 6월27일 병으로 죽어 목릉에 가장 먼저 안장됐다. 의인왕후가 동구릉으로 오기까지 죽고 나서 7개월 동안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동구릉에 태조의 건원릉과 문종의 현릉이 들어온 1452년 이후 이곳에 온 왕릉은 의인왕후의 능이 108년만에 처음이다. 이것은 선조가 겪은 임진왜란과 왜란 이후 신권이 강해진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전해오는 얘기처럼 동구릉이 정말 천하의 명당이라면 그동안 조선의 제왕들은 왜 이곳으로 오지 않았던 것일까? 조선왕릉을 연재하다 보니 이런 의구심이 드는 것을 지울 수 없었다. 문종 이후 선조 이전까지 왕들의 능으로 이곳을 쓰지 않았다면, 천하의 명당이라거나 이성계가 후손들을 위해 터를 마련했다는 전설은 그야말로 전설에 불과한 셈이다.

실상 태조 이성계가 1394년 무학대사와 함께 찾은 동구릉이 대대로 왕릉을 쓸 수 있다고 기뻐했다는 말을 한 사람은 의인왕후의 택지 과정에서 백사 이항복이 한 말이다. 200년 전에 그런 얘기가 오갔다는 것도 몰랐던 선조는 그대로 믿을 수밖에.

이항복이 주장했던 1394년이면 태조가 한양천도를 단행했던 해였는데 그 바쁜 와중에 후손을 위한 왕릉 터까지 물색하고 다녔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이긴 하다. 실제로 동구릉은 태종이 잡은 자리이지 태조가 후손을 위해 물색한 왕릉 자리는 아니다.

조선은 선조를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임진왜란 이전의 전기가 왕권이 막강했다고 본다면 후기는 왕권이 상대적으로 약해진 시기였다. 왕릉 택지로 선택되면 제 아무리 공신집안의 묘지나 왕의 할아버지라도 파헤쳐지고 이장 당해야 했다.

선조는 조선 최초로 왕비가 출생하지 않은 방계 출신의 왕이었고, 의인왕후의 국상을 당했을 때는 임란 이후라 왕의 권위가 추락한 시기였다. 의인왕후가 죽자 7월1일 택지를 의논했지만 11월이 돼도 결정되지 못했다.

결정될 듯하면 어느 사대부의 문중 묘지가 있는 지역이라 이 핑계 저 핑계로 질질 끌어온 것이다. 능으로 결정되면 서슴지 않고 다 내쫓아버리던 초기와 달리 신권의 문중 묘가 있으면 다른 핑계를 대서 왕릉택지가 되는 것을 피할 정도로 왕권이 미약해진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 선조의 능에서 바라본 원비 의인왕후 능상.
ⓒ 한성희
결국 11월 초순 경기 포천의 신평으로 정하고 6230명이 산릉부역에 동원돼 절반쯤 공사를 했는데 술관(術官) 박제동이 그곳은 불길하다고 상소했고 이를 들은 선조는 할 수 없이 그동안 대신들이 주장하던 건원릉 내로 택지를 정하라고 명한다.

이때 영의정 이항복과 좌의정 이헌국이 현지 답사하여 정한 곳이 지금의 목릉이다. 7개월이나 끌었던 의인왕후 국장은 12월22일 이곳에 묻힘으로써 겨우 끝이 나게 된다. 이후 선조도 대신들에 의해 건원릉 내에 떠밀리다시피 왔고 지금의 경릉 자리에 묻혔다가 풍수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다시 현재 목릉으로 천장했다.

선조 이후 동구릉에 왕릉이 몰려와 왕실공동묘지 형태로 바뀌며 동오릉에서 동칠릉, 동구릉으로 바뀐 연유는 왕권의 실추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면 된다. 이는 조선 전기 왕릉 택지 과정과 후기의 왕릉 택지과정을 비교해보면 이해가 간다.

경릉 자리에 있던 선조의 목릉은 임진왜란 이후 왕릉 장인을 구하기 힘들어 부실한 산릉공사를 했기에 병풍석이 기울자 인조8년(1630) 심명세가 광중에 물이 찼다고 천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장하려고 막상 파보니 보송보송한 흙이 나와 지켜보던 사람들이 분개했다고 한다.

광해군과 영창대군의 비극

선조는 훈구파를 누르려고 사림을 등용했고 조광조를 증직하며 유학을 장려했으나 이 사림들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며 세자책봉 문제로 당쟁이 더 격렬해졌다. 광해군을 둘러싸고 벌어진 당쟁은 더욱 극심해졌고 이때부터 조선후기 고질적인 당쟁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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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선조가 세자책봉을 두고 갈팡질팡 하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과 후에 인목대비가 낳은 영창대군을 두고 대신들에게 '잘 돌봐달라'고 공공연히 부탁한 것은 소북파와 대북파로 나뉘어 당쟁을 더욱 부추긴 격이 됐다. 이런 선조의 갈팡질팡은 광해군에게 전위하라는 교지를 감춘 소북파의 유영경에 의해 더욱 확산되었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에 오히려 영창대군을 일찍 죽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보수공사 중인 선조의 목릉에 올라 왼편에 있는 의인왕후와 인목대비의 무덤을 바라봤다. 신권이 왕릉의 천장을 주장할 때는 반드시 정치적인 목적과 실리 때문이었다. 풍수타령으로 발목을 잡으면 꼼짝하지 못하는 것이 조선왕실의 약점이기도 했지만 그 약점을 이용한 것은 신권들이었다.

▲ 무인석
ⓒ 한성희
목릉은 임란 후 약해진 왕권을 나타내며 부실하고 격이 떨어지는 석물이 남아 있어 전쟁 이후 당시의 피폐한 상황을 보여주기도 한다.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1584~1632)는 의인왕후가 죽자 1602년 19세에 왕비로 책봉된다. 선조와 32년 차이가 났던 인목왕후는 1606년 영창대군을 낳았고 왕비가 낳은 왕자가 처음이라 방계출신으로 열등감을 갖던 선조에게 갈등을 불러오게 했다.

인목대비가 광해군에게 원한을 갖는 건 이해가 간다. 친정아버지 김제남과 아들을 죽인 장본인이었으니 원한이 극에 사무치고도 남을 일이다. 인목대비의 원한이 얼마나 컸던지 후에 능양군(인조)가 군사를 몰고 들어와 반정에 성공하자 광해군이 선조를 독살했다는 누명까지 씌웠다. 반정 세력들은 인목대비의 터무니없는 말에 지금까지 그런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어이 없어한다.

인목대비는 인조10년 6월28일 인경궁에서 49세로 세상을 떠났고 7월10일 건원릉 왼쪽 5번째 줄기에 산릉지로 정한다.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고 반정공신들이 조정을 메우고 있었으니 왕권은 더욱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선조의 멀쩡한 능을 파헤쳐 이곳 의인왕후 곁으로 옮긴 것만 해도 전통 왕릉장법은 이미 망가진 것이다. 인목대비가 또 다시 이곳으로 오자 목릉은 왕비 둘에 왕이 하나라는 전례 없는 이상한 왕릉이 됐다. 그래도 훗날 등장하는 삼연릉(경릉)이라는 해괴한 왕릉에 대면 양반이긴 하지만.

그 이전까지 왕릉장법으로 본다면 인목대비의 능호는 따로 쓰고 새로운 능을 만들어야 정석이다. 임란 이후 급속한 사회변화, 고갈된 재정과 왕권의 미미함이 이런 왕릉도 탄생하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 인목대비 능상.
ⓒ 한성희
외따로 멀리 떨어진 인목대비의 능을 바라보며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갈등과 인과관계를 생각해본다. 선조가 갈팡질팡하지 않고 광해군에게 힘을 몰아주었다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을. 옹립된 중종반정과는 달리 능양군이 직접 앞장서서 군사를 일으켰다는 것은 온갖 명분을 내세워도 왕위 빼앗기 반란에 불과하다. 이런 명분 없는 쿠데타는 정통성을 잃었기에 왕권은 더욱 힘을 잃었고 병자호란을 불러왔다.

현재 사학계에서 광해군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고, 실제로 광해군의 진면모가 곳곳에서 밝혀지고 있어 조만간 광해군이 '폭군'이라는 누명을 벗게 될 것이 기대되고 있다.

"아무리 수백 년이 지나도 (광해군의 재평가는) 곧 그렇게 될 거예요. 지금 분위기가 그렇지 않습니까?"

조종(祖宗)의 왜곡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광해군의 재평가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자 어느 사학자가 한 말이다.

한 시대를 이끌었던 왕이 묻힌 능마다 들어 있는 이야기들을 보면 행복했다고 단정지을 왕은 한 명도 없다. 그래도 왕위에 집착했던 역사를 보면 권력을 향한 욕망은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영원한 취약점일까. 인생은 공수래공수거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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