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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가 조각전> 포스터
ⓒ 밀워키 미술관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를 쓴다면 이는 야만이다."
– 테오도르 아도르노


예술가들의 가장 큰 비극은 그들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식의 경계를 넓히는 창의성도, 숭고한 예술적 영감도 한 공기의 밥과 한 덩이의 빵에서 나와야 한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혹은 작품에도 불구하고) 하루를 지탱할 양식을 얻는다.

영화 <피아니스트>는 학살의 야만 못지않게 물질적 존재로서 예술가가 겪는 고뇌도 다루고 있다. 예술이 인간의 가장 고귀한 정신을 드러낸다면, 전쟁은 인간의 가장 추악한 본성을 드러낸다. 전쟁이라는 야만의 터에는 예술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피아니스트>의 주인공은 시종 '예술'과 '빵'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는 전쟁 속에서 푼돈을 위해 피아노를 팔고, 끼니를 위해 음악을 판다. 독일군 장교 앞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피아노 연주를 시작할 때조차, 그의 손은 폐허에서 주운 통조림 하나를 쉽게 놓지 못한다.

드가의 무희, 그리고 '예술과 빵'

▲ "지친 무희" (1882-85) 킴벨미술관, 미국
ⓒ Kimbell AM
에드가 드가(Edgar Degas) 역시 물질적 존재로서의 예술가에 관심을 쏟았다. 그의 작품에 나타난 무희들은 갈채가 쏟아지는 화려한 공연장보다 누추한 연습장에 피곤에 지친 모습으로 나타난다. 공연을 마치고 난 그들은 나머지 빵 반쪽을 마저 얻기 위해 유부남 '스폰서'들의 연인 노릇을 해야 할 것이다.

드가는 왜 무대 앞의 영광보다 무대 뒤의 고뇌를, 여신이나 귀부인보다 가난한 무희나 세탁부에 관심을 가졌을까.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 작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파리가 아닌 21세기 미국의 중서부 도시에서 '드가가 되어보는' 기회를 누릴 수 있을까? 적어도 전람회 포스터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위스콘신의 밀워키에서 지난 5일까지 열렸던 <드가 조각전>에는 현존하는 드가의 모든 조소작품 70여점과 더불어 그림 20여점이 함께 전시되었다. 전람회 가장 뒤쪽에 배치된 <14살의 작은 무희(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를 지나자, 통로는 발레 연습대가 설치된 스튜디오로 이어졌다.

그곳에 들어서자, 벽 한 쪽에 연필과 목탄이 놓인 스케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는 19세기 드가 시대의 무용복을 입은 무희들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관객들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는 동안, 방 한켠에서는 목탄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나도 어느 새 스케치북 위에서 손을 움직이는 21세기 드가가 되어 있었다.

▲ 위스콘신의 밀워키시와 밀워키 미술관(Milwaukee Art Museum)
ⓒ 강인규
드가가 현대에 태어났다면 틀림없이 비디오작가가 되었을 것이다. 다른 인상파 작가들은 빛이 순간순간 그려내는 색의 변화무쌍한 조화에 매료된 반면, 드가는 순간의 움직임을 포착하는데 더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다. 인체의 미묘한 동작표현이 가능하다면 재료나 방법을 따지지 않았던 드가의 열정은 그를 '19세기 앤디 워홀'로 만들었다.

마르고 무릎이 튀어나온 무용수의 다리, 관객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무례한 자세, '여성적 화사함'과는 거리가 먼, 지치고 무관심한 표정 그리고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혼합재료의 사용. 이로 인해 <14살의 작은 무희>는 예술가가 받을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찬사와 모욕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평가와는 무관하게 드가의 작품은 현대조각의 문을 열었다.

▲ 밀워키 발레단 단원들이 관객들이 스케치를 할 수 있도록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에 드가의 조각 <14살의 작은 무희>와 같은 복장을 한 발레리나가 보인다.
ⓒ 강인규
무대 위에서 완벽한 동작을 선보이는 무희들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공연장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들이 구차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가운데 한 명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 역시 한 끼 식사와 한 달 집세를 걱정해야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드가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그가 이런 당연한 사실을 작품 속에서 드러냈다는 점이다.

화폭에 담긴 무희들의 고뇌

▲ "기다림" (1882) 폴 게티 박물관, 미국
ⓒ Paul Getty
드가가 무희들을 처음 그린 작가는 아니다. 그러나 이전의 작가들이 묘사한 무희들은 늘 이상화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삶의 고단함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말끔하고 우아한 자태의 무희들은 당시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드가의 작품이 얻은 "생쥐"라는 별명은 당시 어린 발레리나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했다.

드가가 생존했던 당시 파리의 발레리나들은 대부분 가난한 노동자계층이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오페라 발레학교의 문을 두드렸으며, 직업무용수로 무대에 선 이후에도 작품출연 횟수에 따라 일당을 받아야 했다. 그들은 가난하고 배가 고팠기에, 생활을 위해서 화가의 모델이 되거나 부유층 남자들의 '애인'이 되는 것은 물론, 매춘부로 몸을 파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 왼쪽: "무대 뒤의 무희들" (1876-1883) 국립미술관, 미국/ 오른쪽: "스타" (1876-77) 오르세 미술관, 프랑스. 무대 뒤편에 검은 정장을 입은 '후원자들'이 보인다. 이들은 찬조금을 내는 대가로 뒷무대로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남자들이 무대 뒤에서 반라의 무희들을 훔쳐보는 모습은 19세기 파리에서 흔한 풍경이었다.
ⓒ 국립/오르세 미술관
드가의 작품에는 신발 끈을 매거나 옷을 고쳐 입는 무용수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은 무대 위의 완성된 공연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모습이다. 때로는 하품을 하거나, 몸을 긁거나 피곤에 지쳐 반쯤 쓰러져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것은 무희들 속에 섞여서 등장하는 '신비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연습장 한 편에서 신문을 읽는 노파의 모습으로, 때로는 지친 무용수 곁에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있는 중년 부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딸이나 손녀의 '가격흥정'을 위해 와 있는 사람들로, 그들의 고객은 또 다른 '신비의 인물,' 즉 무대 뒤 으슥한 곳에서 어린 무희들을 탐색하는 정장신사들이었다. 그들은 발레단에 찬조금을 내는 대가로 '무대 뒤 접근권'을 얻었다.

파리 오페라(L'Opera de Paris) 공연장은 당시의 흔적을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다. 무대 뒤편에 대단히 호화롭게 꾸며져 있는 방이 그것이다. 오늘날 연습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곳은 부유한 남자들이 공연 전후에 무희들과 시간을 보내던 일종의 '오락실'이었다.

▲ 19세기 파리 오페라(L'Opera de Paris) 무대 뒤의 모습. 화려하게 꾸며진 이 방에서는 후견인들이 공연 전후에 어린 무희들과 시간을 보냈다.
ⓒ Opera
"예술이 이렇게 타락할 수 있는가?"

▲ "14살의 작은 무희" (1879-81) 사오 파울로 미술관, 브라질
ⓒ 밀워키 미술관
같은 '인상파'로 분류되는 르누아르의 우아한 무희에게는 후한 점수를 주었던 관객과 평론가들은 드가의 무용수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혐오를 드러냈다. 이 반감은 드가 그림에 담긴 '아름답지 않은' 대상, 전통적인 구도를 탈피한 화면배치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극단적인 시선의 각도에 의해 유발되었다. 그리고 이 혐오는 드가가 생애에 유일하게 전시한 조각작품 <14살의 작은 무희>로 극에 달했다.

화가였던 드가가 조각에 손은 댄 것은 현대의 비디오 예술가들이 3차원 그래픽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와 유사했다. 인체의 구조와 동작에 매료된 드가에게 있어 캔버스라는 2차원 공간은 지극히 제한된 표현영역이었기 때문이다. 드가는 내용과 형식 모든 면에서 시대에 앞선 예술가였고, 따라서 이에 합당한 비난을 받았다.

지금은 청동으로 보존되고 있지만, 드가는 피부색과 유사한 톤의 밀랍으로 인형을 빚은 후 가발을 씌우고, 무용복을 입히고 천으로 된 무용화를 신겼다. 인형의 체형과 자세, 그리고 표정은 당시 '이상적'으로 여겨지던 여성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예술이 이보다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는가" 혹은 "우리 딸이 무용수가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가" 등의 평가에 상처를 입은 드가는 두 번 다시 이 작품을 전시하지 않았다.

<14살의 작은 무희>의 모델이 된 마리(Marie Van Goethem)는 가난한 벨기에 이민자의 딸로 태어났다. 재단사였던 아버지를 도와 생계전선에 나선 마리는 두 언니와 함께 무용수가 되었다. 어렵던 생활은 아버지가 죽고 나서 더 어려워졌고, 세 자매는 화가의 모델부터 매춘까지 모든 일을 해야 했다.

끝내 마리는 매춘고객의 지갑을 훔친 죄로 경찰에 체포되었고, 발레단에서 해고된 후 종적을 감추었다. 드가는 죽는 날까지 마리의 조각을 작업실에 가지고 있었다. 한 고객이 그 작품에 관심을 보이자 그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한다.
"제 딸인데 어떻게 그것을 팔 수 있겠습니까."

예술과 현실

▲ 밀워키 미술관의 작은 배려는 관객으로 하여금 한 미술가의 삶과 작품을 '구경꾼'으로서가 아니라 '작가'로서 경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사진은 마리의 포즈를 취한 발레리나의 스케치.
ⓒ 강인규
어떤 이들은 드가가 묘사한 무희의 현실적인 모습에서 '예술의 몰락'을 보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그 속에서 '진정한 예술'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현실은 존재한다. 문제는 예술이 그것을 드러내느냐, 아니면 그것을 감추느냐 일 뿐이다.

현실이 어떻든 '예술은 아름다워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드가의 작품에 분노했다. 반면에 예술이 현실에서 눈을 돌리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보지 못한 현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제공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환호했다.

아도르노의 말이 오늘날까지 유효하다면, 예술이 현실의 비극을 가리는 '서정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술은 아픔을 아픔으로 공유하지 못하게 된 우리의 굳은살을 베어냄으로써 다시 현실을 여린 살로 접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아픔을 아픔으로 느낄 수 있는 눈만이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느낄 수 있는 법이다.

유월의 한 목요일 저녁. 적어도 내가 발견한 드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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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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