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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3년째, 하지(夏至)를 전후한 이맘때가 되면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표지물)의 하나인 도쿄타워가 밤 8시 정각에 어둠 속으로 사라지곤 한다. 불야성 속에 꼿꼿이 서서 '여기가 도쿄다!'라고 외치고 서 있어야 할 붉은 불기둥이 맥없이 어둠 속 저편으로 내몰리는 것이다. 도쿄타워뿐만이 아니다. 일본 전국의 각종 랜드마크가 그렇게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인공의 빛을 몰아낸 그 아래에서는 겨우 2시간 동안일지라도 자연의 빛들이 모여 향연을 벌인다.

▲ 불꺼진 도쿄타워와 增上寺에서의 '100만명 촛불의 밤' 행사, 2003년 하지
ⓒ 대지를 지키는 모임
올해에도 6월 19일 밤 8시 정각이 되면 도쿄타워가 어둠 속으로 밀려날 것이다. 2003년 하지에 시작되어 올해로 3년째, 하지 및 동지를 합쳐 총 5회째 이어지고 있는 '100만 명 촛불의 밤' 행사는 이렇게 절정에 다다른다.

지난 2004년 6월 20일 밤에는 도쿄타워, 오사카 성, 레인보우 브리지 등 일본 전국에 있는 랜드마크 6000여 개가 꺼졌다. 첫 해의 2300여 개 였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증가다. '100만명 촛불의 밤' 사무국에 의하면 6월19일로 예정된 올해 소등행사에는 지난해의 4배에 달하는 2만4천여개의 시설이 소등에 동참할 예정이라고 한다.

도쿄타워 대신 100만개의 촛불을!

'100만 명 촛불의 밤'은 일본의 환경관련 NGO인 '나마케모노 클럽'과 '대지를 지키는 모임' 등이 주축이 돼 2003년 여름 시작됐다. '전기를 끄고, 느림의 밤을'이란 슬로건 아래 환경과 느림의 철학을 접목시킨 자발적 환경·문화운동이다.

운동이라고 하기엔 뚜렷한 목표나 정해진 방식, 지정된 공간도 없다. 일정 시간 동안 자발적으로 참가하며, 다양한 형태로 즐긴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축제에 더 가깝다. 행사기간에 밤 8시부터 2시간 동안 일제히 전기를 끄고 대신에 촛불을 켜서 평상시와 다른 시간을 보내는 것만이 유일한 규칙이라면 규칙이다.

▲ 2005년 '100만명 촛불의 밤' 홍보 포스터
일단 전기를 끄고 나면 거기에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전기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오히려 전기를 끄고 난 후 할 수 있는 일들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100만 명 촛불의 밤' 홈페이지에는 주최 측이 제안하는 어둠 속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몇 가지 적혀있다.

△ 전기를 끄고 촛불을 비춰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자 △ 둘러앉아 촛불 아래에서 식사를 하자 △ 촛불 아래에서 음악을 듣자 △ 촛불 아래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자 △ 촛불을 켜고 욕조에 몸을 담그자 △ 촛불을 비춰 편지를 쓰자 △ 촛불 아래에서 파티를 하자 △ 촛불 아래에서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갖자

어떤 이는 소등운동으로, 다른 이는 환경운동으로, 또 어떤 이는 평화운동으로 이 행사에 참여한다. 에너지절약, 자연보호, 느린 생활, 라이프 스타일의 재고, 지구온난화 방지, CO2삭감, 대량소비 재고 등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다양한 의미를 담아 이 운동에 동참하면서 매년 그 규모를 늘려가고 있다.

미국에서 호주로, 호주에서 일본으로

이 운동의 계기가 된 것은 2001년 미국에서 일어난 '자발적 정전운동'이다. 자발적 정전운동은 대통령으로 당선된 부시가 에너지 정책으로 내놓은 원자력발전소 건설계획에 반대해 일어났다. 이것이 호주를 거쳐 일본에 알려졌고, '나마케모노 클럽'이 이에 동참했다. 다음해인 2002년 10월 26일 원자력의 날에는 '대지를 지키는 모임'이 합세해 2시간 동안 전기를 끄고 촛불을 켜자면서 6만 명의 회원들에게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참가자들에게 받은 감상문을 통해 이 운동의 가능성을 확인한 이들은 2003년 6월 22일 '제 1회 100만 명 촛불의 밤'을 정식 출범시키기에 이르렀다. 민간에서 시작된 운동은 급물살을 탔다. 시민단체, 작가, 예술가, 환경성, 기업, 지자체, 공공시설 등이 참가해 2300여 개의 시설물이 소등에 동참하게 된 것.

정부나 기업이 NGO와 파트너십을 형성하게 된 배경에는 그 해의 수도권 대정전 위기론이 자리하고 있다. 2003년 도쿄 등 수도권 지역에는 '한여름 대정전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이 지역에 전력을 공급하는 도쿄전력이 원자로 노심격벽의 균열을 감추어 온 게 발각돼 도쿄전력 소유의 전 원자로 가동이 중지됐던 것.

전기를 끄고도 즐길 수 있는 게 이리 많다고?

개인적으로 집에서 조용히 참가하는 방법 외에 적극적으로 밖으로 나가 촛불의 밤을 즐길 수 있는 이벤트들도 다양하게 펼쳐진다. 주최 측의 이벤트 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소등행사, 콘서트, 촛불축제, 전시회, 초 만들기, 영화상영회 등 크고 작은 이벤트가 열린다.

이중 도쿄타워 근처의 조죠지(增上寺)에서 열리는 도쿄타워 소등행사 및 콘서트, 시낭송회, 촛불축제는 대표적인 행사로 꼽힌다. 올 행사에서도 6월 15일 현재 전국적으로 269건의 이벤트가 등록된 상태다.

▲ 增上寺 계단에서의 촛불축제, 2003년 하지
ⓒ 대지를 지키는 모임
▲ 하라주쿠 캣스트리트에서 열린 촛불디자인전, 2004년 동지
ⓒ 대지를 지키는 모임
주최측의 홈페이지 또한 흥미롭다. 소등행사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동참이 어떤 결과를 이뤄내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해 '캔들스케이프(candlescape)'를 준비한 것.

캔들스케이프는 소등행사 참가자가 일본 지도위에 자신을 하나의 불빛으로 그려 넣을 수 있는 장치로, 등록란에 자신의 우편번호를 넣고 메시지를 입력하면 지도 위에 그 지역의 불이 켜진다. 등록하는 참가자가 많을수록 지도위의 불빛은 더욱 환해진다. 전기를 끄는 사람이 많을수록 실제로는 더욱 어두워지는 것과는 정반대다.

▲ 캔들스케이프 - 참가등록을 하고 자신의 우편번호를 입력하면 그 지역에 밝은 불이 켜진다. 참가자가 많을 수록 더욱 밝게 빛난다. ('100만명 촛불의 밤' 제공)
또 한가지는 '칼레이드스코프(kaleidscope)'라는 것이다. 이것은 행사 직후에 자신만의 촛불의 밤 풍경을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 첨부파일로 보내면 등록된 사진들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도록 한 장치이다. 참가자들에게 연대의식을 갖게 해 줄 수 있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 칼레이드스코프 - 자신만의 촛불의 밤 풍경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아 보내면 실시간으로 참가자들의 촛불행사를 볼 수 있다. ('100만명 촛불의 밤' 제공)
이밖에도 게시판을 통해 참가자들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곧 태어날 아기와 남편과 느긋하게 보내겠다는 어느 부인, 카페를 빌려 재즈연주를 들으며 생각할 기회를 갖겠다는 사람, 하나뿐인 지구를 위해 소등 횟수를 늘려가자는 사람, 작년에는 촛불아래 광석 라디오를 들었는데 올해에는 수동발전 라디오를 켜겠다는 다짐, 손수 만든 촛불을 켜겠다는 얘기, 산에서 바라보는 야경이 휘황한 불빛이 아니라 은은한 불빛이길 바란다는 사람, 시간에 쫓겨 지내고 있는데 촛불의 밤을 계기로 느린 생활과 여유를 다시 찾고 싶다는 얘기 등은 촛불의 밤 행사가 얼마나 다양하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이제 지구적인 운동으로

'100만명'이란 숫자는 '많은 사람들'이라는 상징일 뿐이다. 이미 첫해 행사에서 일본 환경성 추산으로 500만 명 이상이 참가했고, 2004년 여름에는 600만 명 이상이 참가한 것으로 보고됐다. 올해에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참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런데 500만, 600만 명이 참가했다고 해서 전기사용량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등 의미있는 결과가 나왔다는 보고는 없다. 에너지절약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환경과 평화를 위해 어떤 기여를 했는지 확인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100만명 촛불의 밤' 주최 측은 이미 2004년부터 해외 각국에도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100만명 촛불의 밤' 운동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때 비로소 의미있는 결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출발해 일본을 경유한 이 운동이 과연 지구를 전부 어우르는 전 지구적 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덧붙이는 글 | 2005년 100만 명 촛불의 밤 2005년 6월18일~6월21일 20:00-22:00

100만 명 촛불의 밤 http://www.candle-night.org/
대지를 지키는 모임 http://www.daichi.or.jp/pc/main.html
나마케모노 클럽 http://www.sloth.gr.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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