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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1일(수요일). 새로운 한 달이 시작되는 날이자 200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모의 평가가 있는 날이기도 하였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주관으로 치러진 이 시험은 재수생을 포함한 전국의 고등학교 3학년 약 60만 명이 응시할 정도로 비중 있는 시험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교실로 들어가 아이들에게 시험을 볼 수 있도록 자리 배치를 하라고 지시를 내리고 난 뒤, 시험에 대한 유의 사항과 지시 사항 등을 칠판에 적어놓고 아이들에게 교육을 시켰다. 아이들 또한 이번 모의고사가 자신의 점수를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는지 다소 긴장된 표정이 얼굴에 역력히 나타나 보였다.

주의 사항을 간략하게 말하고 난 다음, 예년과 달라진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기 위해 샘플용 답안지 한 장을 봉투에서 꺼냈다. 그리고 O.M.R 카드 답안지 앞면을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하고 시선을 집중시켰다.

"자, 너희들도 알다시피 예년에 비해 많이 달라진 것은 없다. 그런데 왼쪽 상단을 잘 보면 성명란 밑에 무언가를 쓰도록 되어 있다."

내 말이 끝나자 아이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숨은그림찾기'라도 하듯 아이들의 시선은 답안지를 들고 있는 나의 오른손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성격이 급한 한 남학생이 질문을 했다.

"선생님, 그것이 무엇입니까? 저희들이 기본적으로 써야 할 내용(수험번호, 성명, 학교명 등)외에 또 무엇이 있습니까? 말씀해 주세요. 궁금해요."

"너희들, '윤동주'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이지? 그리고…."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윤동주의 <서시>를 읊조리기 시작하였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그래, 맞다. 좌측 상단 아래 윤동주의 서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라는 시구를 자필로 매 교시마다 답안지에 기재를 해야 해. 알았지?"

아이들은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는지 계속 질문했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하나요? 만약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너희들도 알다시피 2005학년도 대학입시 때 핸드폰 입시부정으로 인해 곤욕을 치른 교육부가 혹시라도 수험생의 필적을 대조해야 하는 상황이 있을 경우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니 지침에 따라주길 바란다."

필적을 대조해야 한다는 말에 자신들이 마치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취급받는 것에 기분이 상했는지 교실 여기 저기서 불쾌감을 나타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몇 몇 아이들은 낄낄거리며 웃기까지 하였다. 잠시 후 1교시 시험 예종이 울리자 아이들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으며 시험 치를 준비를 하였다.

"자, 그럼 오늘 시험이 중요한 만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 이상."

교실 밖으로 빠져나오자 내 등줄기에는 식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평가원과 교육부가 수능부정종합대책으로 내놓은 시책이 아이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우스갯소리로 들린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씁쓸함이 감돌았다. 한편으로는 소수의 아이들이 저지른 입시부정으로 인해 그렇지 않은 순수한 아이들의 마음을 멍들게 하는 우리 교육시책이 안타깝기만 하였다.

200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 입시 부정을 막기 위해 좀더 강력한 조치가 취해질 것이라는 교육부 발표가 있었다. 이 조치로 인해 아이들의 자존심이 얼마나 더 다칠까 걱정이 된다.

200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모의 평가에 처음으로 도입된 답안지 필적 확인란 그 자체가 수능 부정을 방지하는데 얼마나 실효성을 거둘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필적용으로 사용된 문구다. 아마도 '어떤 문구를 사용할까?'를 두고 한국교육과정평가원과 교육부 관계자는 많은 고심을 했으리라 본다.

그런데 수많은 문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첫 모의평가 문구로 윤동주의 <서시>중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혹시 교육부의 자정작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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