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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장례식장 앞에 늘어선 화려한 조화들.
ⓒ 권우성
# 장면1. 병원입구에서 폐기장으로 직행하는 화환들

지난 27일 저녁 서울 S병원. 지인의 상가를 방문한 이아무개씨는 조문을 마치고 나오다 낯선 장면을 목격했다. 병원에 도착하는 화환이 빈소로 향하는 게 아니라 모두 지하 주차장 쪽으로 옮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로 고위층 인사들의 빈소가 차려지는 대형병원이어서 그런지 배달되는 추모화환이 줄을 이었지만 일부를 제외하곤 빈소에 배치되지 않았다. 이씨는 관리자인 듯한 사람에게 물었다.

"아니 저 화환들은 왜 빈소로 들어가지 않고 저 쪽으로 갑니까?"
"빈소에 더 이상 진열할 자리가 없어요. 화환을 보낸 사람의 이름표만 떼어낸 뒤 꽃은 폐기물로 처리하는 거예요."

떼어낸 이름표를 빈소 접수처에 내면 상갓집에서는 접수처 뒷벽과 식당 벽면에 붙인다는 것이다. 누가 보냈다는 최소한의 증거인 셈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렇게 처리하는 화환의 수가 하루 100개 정도라고 한다.

"멀쩡한 꽃을 바로 폐기하는 건 좀 심하지 않습니까?"
"띠만 바꿔서 화환을 재활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어쩔 수 없어요. 화환이 재활용되면 화훼농가는 피해를 보고 유통업자들만 이득이죠."

그는 강제는 아니라며 "조문객이 직접 가지고 오거나 화환 비치를 원할 경우에는 막지 않는다"고 말했다.

빈소로 들어가지 못한 화환은 창고 안에 설치된 분쇄기와 압축기를 거쳐 바로 쓰레기로 변하고 있었다. 장례식장 관계자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지긴 했지만 죽음을 추모하는 정성보다는 리본에 적힌 이름만 남는다는 게 어쩐지 영 찜찜하다. 결국 리본 한 개의 값이 10만원인 셈인가.

#장면2. "빈소 앞에 놓인 화환 대부분 재활용입니다"

28일 오후 양재동 화훼 공판장. 대형 병원 영안실에 화환이 줄을 잇는 것과는 달리 화훼공판장은 썰렁했다. 매장 앞마다 몇 개 되지 않는 화환만이 배달을 기다리고 있다. 15년 동안 화훼 일만 해 왔다는 ㅍ꽃집 이모 사장은 화환 매출이 어떠냐고 묻자 대뜸 분통을 터뜨렸다.

"말도 마십시오. 재활용 화환이 성행하는데 공판장에서 화환이 몇 개나 나가겠습니까?“
"화환 재활용률이 그렇게 높은가요?"
"밖에 진열해놓은 화환 보셨죠? 전문 기사들이 싱싱한 꽃 사다가 일일이 꽃은 진품입니다. 그런데 근처 병원에 가보세요. 빈소 앞에 서 있는 화환 중에 이 모양 유지하고 있는 거 거의 없어요. 다 재활용입니다. 그것도 네 번 다섯 번씩 한다니까요."

이 사장은 그나마 최근에 재벌 명예회장들 부음이 있어서 일이 좀 있었지만 요즘엔 주문조차 드물다고 말한다. 몇 년 전 밤새 일하곤 했던 것에 비하면 딴판이다.

"재활용하면 금방 알아 볼 수 있지 않나요?"
"티가 나죠. 꽃잎 떨어지고 꽃은 처지고, 오아시스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죠. 자세히 보면 다 알 수 있지만 아니 초상났는데 누가 화환 검사합니까. 그런 걸 노리고 재활용 화환이 병원에 잔뜩 들어가고 있어요."

▲ 서울 한 대형병원에 설치된 화환 분쇄기. 빈소에 놓인 개수가 일정 수를 넘어선 뒤 도착한 화환은 곧장 분쇄처리장으로 직행한다.
ⓒ 전관석
즉각폐기에서 재탕 삼탕까지... 그때그때 다른 화환 운명

평소 장례식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화환의 '운명'은 이렇게 상황에 따라 다르다. 화환의 가격은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략 3단 기준으로 10만원 선. 보낸 이들은 망자와의 생전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담았을 테지만 주문한 화환이 즉각 폐기될지 아니면 수차례 재활용될지, 이미 재활용된 화환일지는 알 수 없다.

정·재계 가족들의 빈소가 주로 차려지는 일부 대형병원의 경우 빈소 벽을 따라 화환 리본만 죽 진열돼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일부 대형병원의 경우 위의 경우처럼 분쇄처리를 하거나 색깔 스프레이를 이용해 재활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도 한다. 이들 병원은 다른 병원에 비해 훨씬 많은 양의 화환이 도착하기 때문에 처분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한 대형병원 관계자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상주들은 오히려 화환을 받지 않는다고 공지를 하는데도 3일 내내 화환이 밀려들어 이를 중간에 계속 처리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양재공판장 상인들의 경우 줄초상이 호황이던 시절은 이미 옛날 일이 됐다고 말하고 있다. 그동안 암암리에 이뤄지던 화환 재활용이 이제는 공판장을 비롯한 화훼 자영업자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지경이 됐다는 게 상인들의 주장이다.

축하화환에는 거베라나 소국, 편백 등이 쓰이고 근조화환에는 국화, 소국, 극락조, 편백 등이 쓰이는데 이 중 대부분의 꽃들이 재활용되고 있다는 것.

화훼연합회 오동렬 총무는 "화훼 재배를 하도록 돼 있는 하우스 촌이 소위 '재탕집'으로 바뀌면서 2~3만원 낮은 가격으로 유통시키고 있다"면서 "대형 냉장고에 사무실까지 차려놓고 버젓이 재활용 영업을 하는 것에 대해 구청에 민원도 넣어보고 가게 앞에 가서 항의도 해봤지만 오히려 하우스 수만 늘었다"고 하소연했다. 오 총무는 "3단짜리 화환이 10만원인데 전문기사 쓰고 새 꽃 사다가 꽂으려면 마진이 2만~2만5000원 정도밖에 안 나온다"며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재활용 화환 마진율과 정품 화환 마진율은 비교가 안 된다"고 말했다.

▲ 양재 화훼공판장에서 배달을 기다리고 있는 화환들. 재활용 화환이 성행하는 바람에 이 곳 상인들의 매출이 뚝 떨어졌다.
ⓒ 전관석
꽃집과 병원 사이 부적절한 '관계', 로비도 치열

도시 외곽 일부 비닐하우스 촌에서 횡행하는 화환 재활용은 이들 꽃집과 병원 사이에 '관계'가 맺어지면서 이뤄진다. 발인이 끝난 상가의 화환을 수거해 와 재활용하는 게 대체적인 수법이지만 일부 꽃집에서는 상가 청소까지 도맡는 일종의 '옵션'을 추가하기도 한다. 생화뿐만 아니라 받침대도 뒷거래의 대상이 된다.

중대형 병원을 뚫느냐 아니냐에 따라 꽃집의 생존이 달려있기 때문에 로비도 치열하다. 의정부에서 꽃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임아무개씨는 "화환을 받치는 대나무 받침대의 가격이 7000~8000원 하는데 이걸 수거할 때도 돈을 찔러 준다"면서 "화환 수거의 경우엔 웬만한 인맥이 아니면 엄두도 못 내고, 이 과정에서 수백만원의 현금이 오간다는 건 다 아는 얘기"라고 말했다.

오 총무의 말에 따르면 공판장에서 일하던 전문기사들이 인근 하우스로 나가서 '재탕'기사가 되는 경우도 부쩍 늘었다. 수거된 화환은 일부 시든 꽃 대신 새 꽃이 꽂히고 리본만 바꾸는 등 '매무새'가 고쳐진 뒤 다시 새 화환으로 배달 트럭에 실리게 된다.

'재탕' 지적을 받아온 꽃집 업주들도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 청계산 주변 하우스 촌에서 꽃집을 운영하고 있는 김아무개씨는 "재활용한다고 해도 화환의 품질은 새 것이나 다름없고 새 꽃을 그냥 버리는 것도 낭비라고 생각한다"면서 "장사치들이야 이문 보고 하는 거고 또 나 혼자 하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새 것인 양 배달하는 것에 대해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수입이 워낙 좋다"고 털어놨다.

이에 대해 서울 ㅇ병원 S영안실장은 "발인이 끝나고 빈소와 식장을 정리하는 것도 일손이 부족한데 화환까지 처리할 여력이 없다"며 "일부 꽃집과 화환처리를 묵인해 주는 대가로 빈소나 식장을 정리하게끔 하는 일종의 옵션계약을 맺는데 이 때 약간의 돈이 들어오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병원내부에서도 간혹 문제제기가 있지만 어쩔 수 없어서 계속 유지되고 있다"는 것.

화환 문화, 이대로 좋은가

"전 세계를 둘러봐도 3단짜리 화환을 보내는 곳은 없을 것이다. 화환의 개수나 규모가 사회적 영향력과 비례한다는 생각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다 또 리본에 큼지막하게 쓰인 자신의 이름을 홍보하려는 의도도 있다고 본다. 재활용이나 폐기처분 모두 이런 인식의 부작용 아닌가. 대규모 화환이나 화려한 영정제단, 이런 허례허식에 대해 재고할 시점이 됐다."(D병원 임모 영안실장)

"지금도 자포자기 심정이지만 그렇다고 화환 주고받는 것을 아예 없애면 화훼농가들은 아마 폭발할 것이다. 화훼농민들에게 이런저런 지원해준다고 했지만 화환 재활용하는 것조차 막아주지 못하고 있지 않나. 장례문화 개선하는 것도 좋지만 사람이 죽었을 때 추모의 뜻으로 보내는 화환까지 금지할 필요는 없다. 결국 평생 정직하게 꽃을 심고 가꾼 농민들만 피해를 입는 것 아닌가." (양재동 화훼공판장 오동렬 총무)


그동안 화환을 비롯한 우리의 장례문화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꾸준히 있어 왔다. 일부 기업의 경우 승진 시에도 화환을 받지 못하게 하고 공무원 윤리강령 역시 문화개선을 유도하고 있다. 또 결혼식장이나 장례식장, 공식 행사장에서 "화환은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를 발견하는 것도 최근엔 드물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행사장 앞은 화환으로 넘쳐난다. 꽃을 버리고 리본만 보관하는 주객전도식의 '리본전시 문화', 망자의 빈소나 예식장을 돌며 순회공연을 하는 시든 꽃들의 재탕행진, 그 과정에서 꽃부터 받침대까지 뒷돈으로 거래하는 구린내 나는 뒷거래, 꽃 거래는 활발하지만 화훼업자들은 불황을 겪는 현상 등등 3단 화환을 건네는 우리나라만의 미풍양속은 또 하나의 웃지 못할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 망자를 추모하기 위해, 또는 누군가를 축하하기 위해 시작된 당초의 취지는 퇴색된 지 오래다. 과연 누구를 위한 '화환'인가?

이와 관련,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박인례 사무총장은 "장례식이나 결혼식에 배달되는 3단, 4단 대규모 화환은 그야말로 한 시간치기, 하루치기"라며 "특히 장례식장과 일부 업자가 짜고 벌이는 재활용 관행 때문에 적절한 꽃값도 형성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 사무총장은 이어 "대형 화환이 갖는 사회적 이미지에 대한 개선이 시급하다"며 "추모와 축하를 할 때 소비자 선택권을 넓힐 수 있는 사회적 운동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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