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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페라하우스를 관광중인 흑고래와 고래고기 통조림.
ⓒ 토탈환경센터
시드니는 바다를 가슴에 품고 있는 천혜의 항구도시다. 다른 나라 같으면 외항에나 정박해야할 대형선박과 항공모함이 도시의 심장부인 오페라하우스 바로 앞까지 들어온다.

이렇듯 바다가 내륙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있는 시드니 물항엔 큰 배만 다니는 게 아니다. 남극바다에 사는 고래들도 시드니에 들러 며칠씩 구경하다 간다.

고래의 시드니 방문은 대개 여름철에 이루어진다. 바다의 포유동물인 고래가 새끼를 낳기 위해 호주 북쪽의 따뜻한 퀸즐랜드 앞바다로 이동하다가 길을 잘못 들어 생기는 사고인데 시드니시민과 해외관광객에게는 더없이 좋은 구경거리가 된다.

가끔은 새끼를 낳아 남극 쪽으로 이동하던 '고래가족'이 들르기도 한다. 그런 날은 영락없이 <시드니모닝헤럴드>의 표지사진 주인공이 되는데 이를 구경하기 위해 많은 초등학교에서 단체로 구경을 나오기도 한다.

고래가족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시드니 앞바다를 통과하는 여객선들은 초비상운행에 들어가고, 해상경찰과 환경보호단체 선박들은 고래가 무사히 시드니 앞바다를 빠져나갈 때까지 에스코트 해준다.

"저렇게 예쁜 고래를 잡아먹는다고요?"

이런 호주에 '고래사냥' 문제가 화두로 떠올랐다. 5월 27일 울산에서 개막되는 국제포경위원회 총회를 앞두고 '고래사냥'을 더 많이 하려는 일본의 시도를 제압하기 위해 호주가 똘똘 뭉치고 있는 것.

여야정치지도자는 물론이고 외교와 환경을 담당하는 정부부서에서 포경반대정책을 발표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언론이 나서서 '고래사냥 반대캠페인'으로 힘을 보태주는 형국이다.

▲ "일본이 호주고래 다 죽인다"고 보도한 <데일리 텔레그래프> 1면 기사
호주에서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고래사냥 반대캠페인' 고정란을 만들어 놓고 독자들의 의견을 종합해서 호주에 주재하는 일본대사관을 압박하고 있을 정도다.

지난 5월 16일,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그동안 접수한 항의편지를 큰 가방에 담아서 캔버라 주재 일본대사관에 전달했다. 그 편지 속에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제이미 호아스톤(6)의 순진무구한 바람과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브라이언 골비의 분노에 찬 목소리도 담겨있었다.

호아스톤 군은 편지에 "고래를 죽이지 말고 그냥 보세요. 물속에서 헤엄치는 고래가 너무 예쁘잖아요?"라는 어린아이다운 메시지를 담았다.

반면 골비는 "일본이 고래사냥을 계속하면, 지금 이라크에서 일본사람을 지켜주고 있는 호주병사들을 즉각 철수시켜야 한다"며 "아울러 일본상품의 불매운동과 일본인의 호주 비즈니스도 금지시켜야 한다, 그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호주군 포로에게 잔혹행위를 했던 사람들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 "호주고래 같은 것은 없다"

▲ 일본 소속 포경선에서 고래를 해체하는 모습
ⓒ 토털환경센터
수많은 항의편지를 접수한 일본대사관 측도 아주 강한 톤으로 대응했다. 지로 고데라 부대사가 "호주고래 같은 것은 없다(There is no such thing as an Australian whale), 다만 호주바다를 지나가는 고래가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 것.

그는 이어 "일본의 고래사냥은 국제사회의 협약에 따르고 있다"면서 "호주의 배타적 경제수역인 200해리 안에서는 고래사냥을 하지 않는다"라며 남극대륙(Antarctica)의 해안을 호주바다로 규정하고 있는 호주당국을 에둘러서 자극했다.

고데라 부대사는 "일본에서 고래고기를 먹는 게 호주에서 캥거루고기를 먹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다만 문화와 견해가 다를 뿐이다"라며 "고래사냥 문제로 두 나라 사이의 친선에 흠집이 가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보도에 의하면, 고데라 부대사의 이런 코멘트는 존 하워드 호주총리가 "일본이 울산 IWC 총회를 이용해서 고래사냥을 더 확대하려는 것은 아주 나쁜 결정이다"라고 비난한 것에 대한 첫 공식 대응이었다.

고데라 부대사의 불만 섞인 대응은 호주정가의 또 다른 비난을 불러 일으켰다. 호주 다수야당인 노동당의 캐빈 러드 의원(그림자 내각의 외무장관)은 채널10 TV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양국의 우호관계를 인정하지만, 일본의 고래사냥에 대한 외교적 노력이 실패했다고 판단되면 호주정부는 지체 없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라"고 말했다.

일본의 로비냐, 호주의 저지냐

▲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고래사냥 반대캠페인 페이지
한편 울산 IWC 총회에 호주대표로 참석할 예정인 이안 캠벨 환경부장관은 5월 15일자 <선-헤럴드>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일본이 IWC 57개 회원국에 적극적인 로비를 펼치고 있다"면서 "울산 IWC 총회를 이용해서 1년에 흑고래(humpbacks)를 포함해서 밍크고래 400 마리만 포획할 수 있는 현행규정을 고쳐서 더 많은 고래를 잡으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히데야키 우에다 일본대사를 불러 고래포획 숫자를 늘리려고 하는 일본에 반대한다는 호주정부의 입장을 분명하게 전했다"면서 "과학적 연구목적 운운하는 것은 광대극에 지나지 않으며, 불쾌하고 모욕적인 아이디어"라고 일본정부를 강하게 비난했다.

IWC는 1986년 고래사냥을 전면금지하면서 예외조항으로 과학적 연구목적의 고래사냥을 허용한 바 있는데 일본은 그 조항을 이용해 매년 400마리의 고래를 잡고 있다. 그러나 고래전문가들은 "일본이 멸종위기에 놓인 흑고래 50여 마리를 포함해서 허가된 숫자 이상의 밍크고래를 잡는다"는 의혹도 제기하고 있다.

"고래 없는 바다를 상상해 보라. 바다가 통곡할 것이다"

▲ 시드니 근해를 지나가는 흑고래.
ⓒ 토털환경센터
호주와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을 치열하게 치른 적국이었지만 지금은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아주 친한 관계다. 지난 4월 17일, 호주군 450명이 이라크전쟁복구사업을 펼치고 있는 일본자위대 소속 공병대와 민간기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추가파병 될 정도로 돈독한 사이가 된 것.

이라크추가파병 직후인 4월 21일, 일본을 방문한 존 하워드 총리는 준이치로 고이즈미 총리 앞에서 "아시아에서 일본보다 더 친한 친구는 없다(no greater friend in Asia than Japan)"고까지 말했을 정도다.

그래서인지 많은 호주사람들의 시선이 한국, 그것도 IWC 총회가 열리는 울산 쪽을 향하고 있는 반면 대다수 환경전문가들의 눈은 하워드 총리에게로 향하고 있다. 그가 이중 플레이를 할지 모른다는 의구심 때문이다.

5월 20일 오후 만난 토털환경센터(The Total Environment Center) 제프 엔젤 소장은 "호주당국이 고래사냥을 반대하는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신자유주의 신봉자인 하워드 총리가 일본을 상대로 제대로 항의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며 "우리는 총회에 참석하는 이안 캠벨 환경부장관의 활동을 주목할 것"이라고 말했다.

▲ 일본에 한 방 먹이고 싶다는 제프 엔젤 토털환경센터 소장.
ⓒ 윤여문
토털환경센터의 설립자이기도 한 제프 엔젤 소장은 "일본이 캥거루 고기를 먹는 호주를 공격하면서 고래사냥의 당위성을 주장하지만, 그건 사정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라며 "캥거루는 숫자가 너무 많아서 상업적인 포획이 허용된 반면 고래는 보호하지 않으면 멸종되기 때문에 국제사회가 포획을 금지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엔젤 소장은 이어 "진짜 문제는 과학적 연구목적으로 고래를 잡는다는 일본이 고래를 '와사비'와 간장이 놓인 식탁으로 가져가서 연구한다는 데 있다"면서 "일본이 보다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고 공박했다.

남극해안의 찬물에서 살다가 12개월의 임신기간이 다 차면 새끼를 낳기 위해서 호주의 따뜻한 바다를 찾아오는 흑고래들. 그 흑고래의 숫자가 고래사냥이 금지된 1968년엔 200여 마리에 불과 했으나 지금은 2천 마리가 넘는다고 한다.

고래전문가들은 흑고래의 장래가 울산 IWC 총회의 결과에 따라서 크게 좌우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엔젤 소장의 마지막 말은 오랜 여운을 남긴다.

"고래가 없는 바다를 상상해 보라. 바다가 통곡할 것이다. 자연의 일부에 불과한 인간이 무슨 권리로 생태계 전부를 위협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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