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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5월 9일 오전 9시 우리는 플로리다에 도착했다.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 이곳까지 온 것이다. 비행기가 착륙했는데도 모두가 입을 열지 않고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무도 서둘러 내리려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생소한 풍경, 우리가 선 곳은 더 이상 우리나라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중략)

▲ 아들에게 장장 43페이지에 걸친 '유서'를 남기고 죽은 구엔씨가 운영하던 베트남 식당.
ⓒ 김명곤
위는 플로리다의 '베트남 타운'으로 유명한 올랜도 콜로니얼 드라이브 지역에서 사업을 하다 몇 년 전 숨진 틴 쑤안 구엔이 그의 큰 아들에게 남긴 글 중 일부를 지난달 30일 <올랜도 센티널>이 공개한 것이다. 틴 쑤안 구엔은 1975년 4월 베트남이 패망하면서 가족과 함께 탈출해 미국에 정착한 이른바 '보트피플' 가운데 하나다.

베트남 전 패전 30주년이었던 지난 달 30일, 미국 언론들은 특집 기사를 쏟아냈다. 언론들은 미국이 베트남 전에서 패퇴한 원인과 그 교훈이 무엇인지, 틴 쑤안 구엔 같은 보트피플들이 현재 미국 땅에서 어떤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또 '베트남전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미국 정치인들과 최근 급속도로 진전되고 있는 미국-베트남 관계, 보트피플 베트남인들의 복잡한 심사가 다뤄졌다.

베트남 정부는 지난 30일 호치민시의 대통령 궁 앞에서 마이클 머린 미국 대사를 포함한 외교사절, 참전용사, 정관계 인사들을 포함해 5만 명의 군중을 모아놓고 대대적인 승전 기념행사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판 반 카이 수상은 과거 베트남 전에 참전했던 나라들과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유대관계를 증진시키기를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같은 날 베트남 정부는 승전 30주년 기념으로 7751명의 죄수들에 대한 대사면을 실시했는데 이 가운데는 미국정부가 석방을 요구한 6명의 정치범이 포함돼 있었다.

이같이 양국간에 진행되고 있는 환경의 변화는 13만3천명의 베트남 보트피플들과 베트남 참전 미국인들의 심사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미국사회는 일단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분위기다. 그러나 '현재 진행형'인 이라크 전에 빗대 '베트남전의 교훈을 잊지 말자'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첫 단추부터 잘못 꿴 베트남 전쟁

▲ 베트남전 패전 30주년 특집 기사를 실은 <유에스에이 투데이> 4월 29일자. 베트남 어린이들이 베트남전 전몰지에서 승전 기념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다.
퓰리처상을 받은 저널리스트이자 역사가인 스탠리 카노우는 지난 5월 1일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와의 인터뷰에서 되풀이 되고 있는 미국의 실수를 비판하며 인도차이나 지역의 공산화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베트남전이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진 전쟁이었다는 것을 집약적으로 지적했다.

"우리가 베트남전으로부터 받은 교훈은 어떤 나라나 국민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전쟁에 돌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베트남 전문가들이 없었다. 미국인들은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지도상에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또한 우리는 전쟁에서 빠져나올 전략을 세우지도 않고 베트남전에 개입했다. 더구나 우리는 베트남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던 인기 없는 정부를 지원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베트남전은 미국의 자기 과신과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이 국제 공산주의 음모 속에서 태생된 것으로 생각했고, 호치민은 중국과 러시아의 꼭두각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큰 오해였고, 이 때문에 비극을 불러왔다."

문제는 이같이 잘못 시작된 베트남전에서 빠져나온 지 30년이 지난 후에도 미국사회에서 후유증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베트남전이 가열되었던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 37만 명에 이르는 젊은이들이 징집을 거부하고 격렬한 반전데모를 벌여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엄청난 정치사회적 갈등을 겪었던 미국 사회는 아직도 베트남 전 문제로 인한 감정의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갤럽 여론조사의 수석 디렉터인 프랭크 뉴포트는 지난 50년간의 전쟁에 대한 조사 결과를 분석하면서 "많은 미국인들은 베트남전이 실수였다는 데 동의한다"고 전제하고 "그러나 이것이 명예롭게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한 논쟁들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아물지 않는 '분열'의 상처

지난해 미국 대선과정에서 민주당의 존 케리 진영과 공화당의 부시 진영이 베트남 전 문제로 크게 논란을 벌인 것은 미국사회에서 베트남전의 갈등이 아직 아물지 않고 있는 상처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당시 민주당 측은 부시 대통령의 베트남전 기피 의혹을 제기했고, 공화당 측은 케리 후보의 반전운동 경력과 베트남전 공훈 조작 시비를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양당은 물론 베튼남전 참전용사회와 케리의 베트남전 동료들도 두 패로 갈라져 수 주 동안 물고 뜯는 대공방을 벌였다.

존 케리의 참전 동지이기도 한 존 매케인 공화당 상원의원은 1일 <시카고 트리뷴>에 "베트남전 이후 우리는 전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불행히도 30년이 지난 후 우리는 전혀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난 대선에서) 발견했다"며 "베트남전은 미국 역사상 남북전쟁 다음으로 크게 분열을 일으켜온 이슈가 되어 왔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불행히도 우리 세대가 다 끝나기 전까지는 상처가 아물지 않을 것"이라며 "분열과 더불어 파생된 '비관주의'는 베트남전이 미국에 가져다준 가장 분명하고 잔인한 유산"이라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베트남전이 정부기관에 대한 불신 등 시민들의 정치 참여에 대한 무관심과 투표율의 저하를 가져온 출발점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베트남전 진상 폭로로 촉발된 워터게이트 사건은 이 같은 정치 불신을 심어준 요인 중 하나다. 실제 베트남전 개입 전후 미대선 투표율은 80% 안팎이었으나 베트남전 종전을 기점으로 60% 안팎으로 떨어졌다.

베트남전이 가져온 군사적 유산 '속전속결'

베트남전은 미국의 군사전략에도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시카고 트리뷴>의 마이클 태킷 기자는 지난달 29일 "미국인들에게 분노와 혼란과 체념을 가져다 준 베트남전은 반세기동안의 말썽 많은 미국 역사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하나의 상징이 돼 버렸다"면서 "베트남전은 미국의 정치군사전략과 문화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적었다.

군사전문가들은 베트남 철수 이후 미국의 군사전략이 화력을 갖춘 소규모의 군사력으로 짧은 기간에 '치고 빠지는' 전략으로 바뀌었다고 지적한다.

스탠리 카노우는 그의 역작 <베트남전의 역사>에서 "베트남 전 이후 미국의 군사전략은 '다시는 베트남전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는다'는 기본전제 아래 그라나다와 파나마 침공처럼 효율적으로 치고 빠지는 전략을 구사하되, 이 마저도 매우 조심스럽게 전개한다는 원칙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군사전략에 따라 1991년의 걸프전이 소수의 사망자만 남긴 채 100시간 만에 종료되었는데, 당시 조지 H. 부시 대통령은 "이제 미국은 베트남전 신드롬을 뒤흔들어 놓았다"면서 기뻐했다고 한다. 미군은 1999년 코소보에 대한 신속한 공중 공격에서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내지 않았다.

베트남 전에 참여했던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도 기회 있을 때마다 "미국은 분쟁이 일어났을 경우 초기에 압도적인 힘을 사용해 재빨리 적을 제압하고 승리한 후에는 분명하게 빠져 나오는 전략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이 같은 속전속결 전략이 시공을 초월해 통할 수 있는 전략이 될 수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라크는 제2의 베트남?

▲ 베트남전 패전 30주년 특집 기사를 실은 <뉴욕 타임스> 4월 29일자.
베트남전에서 공격용 헬기 조종사였으며 현재 이라크전에 참전하고 있는 론 세라피노위츠(56)는 29일 <유에스에이 투데이>에 "미국은 베트남 전 경험으로 더욱 강해졌다. 그것은 신속한 승리를 거둔 걸프전에서 확인됐다. 그러나 이라크에서는 신속한 승리를 거둘 수 없다"면서 "현재의 이라크전은 여러 면에서 베트남 전과 비슷하다. 두 전쟁은 전선이 없고, 누구나 적일 수 있다. 중무장을 하지 않고는 나다닐 수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라크전은 베트남전 보다 훨씬 복잡한 양상으로 변모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베트남은 3백만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초강대국 프랑스와 미국을 연이어 격파한 끝에 민족의 통일을 이루어 내고 '경제 부흥'의 다음단계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으나, 이라크는 종파간의 정치적 입장 차이 등 복잡한 국내 사정으로 미군이 철수한 후에도 엄청난 정치사회적 격랑을 겪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이라크전이 갖는 국제전 성격도 이라크전이 베트남전과는 다른 형태의 후유증을 남길 가능성을 안겨주고 있다. 베트남전이 '국지전' 성격인 데 비해 이라크전은 '국제전' 성격을 띠고 있어 또 다른 형태로 전쟁이 장기화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일반 미국민들도 이라크전의 베트남전화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에이비시뉴스>와 <워싱턴 포스트>가 지난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실시한 여론조사(표본수 1007명, 조사의 오차한계 ±3%)에서 응답자의 39%만이 '미국이 이라크에서 진전을 보이고 있다'고 답한 반면, 58%는 '미군이 이라크 진창에 빠져 있다'고 답했다. 또한 39%가 '이라크가 1년 안에 안정을 되찾고 민주화를 달성할 가능성이 있다 고 답한 반면, 60%는 '그렇지 않다'고 응답했다.

'베트남전 콤플렉스'에 빠진 미국

▲ 중앙플로리다지역의 베트남 타운. 이곳에는 약 1만여명의 '보트피플' 출신 베트남인 1세대가 정착해 살고 있다.
ⓒ 김명곤
그렇다면, 이 같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왜 전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일까.

보스톤 대학의 바세비치 교수는 <미국의 군사주의(American Militarism)>라는 근작 도서에서 미국이 전쟁을 계속하는 이유는 베트남전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은 건국 이후 최초로 베트남전에서 맛본 패배와 좌절감을 극복하려는 욕심으로 전쟁을 계속했으며, 결국 전쟁의 깊은 수렁 속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세비치는 특히 이 과정에서 형성된 미국의 군사주의 문화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그가 말한 '군사주의 문화'란, 군부뿐 아니라 지식층, 종교인 그리고 일반 미국인들조차도 '국제문제에 대한 강제적인 군사력 사용'을 쉽게 용납해주는 문화를 뜻한다.

그는 이 같은 군사주의 문화는 미국인들로 하여금 "다른 나라에 미국의 가치를 심어주고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위험한 환상에 빠지도록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이 같은 바세비치의 지적은 지난 1월 20일 부시 대통령의 2기 취임 연설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부시는 "지구상의 모든 지역에 자유를 확대하는 것이 현재 미국의 사명"이라면서 "우리 땅의 자유의 존속은 다른 나라에서 자유를 달성하는데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결국 부시가 말한 '자유'는 본질적이고 보편적 의미의 자유라기보다는 '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자유에 다름 아니었다.

30년 전 월남을 탈출해 '신천지' 미국 땅에 살다 숨을 거둔 틴 쑤안 구엔의 육필 마지막 부분은 군사주의 문화에서 나온 이 같은 거짓 '자유'를 완곡하게 거부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아들아,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 베트남 사람들은 인정 많고 감성이 풍부한 사람들이다. 조상의 무덤을 돌보며 친척들과 함께 살기를 원했고, 묻히는 날까지 태어나 살던 동네에서 이웃과 함께 어울리고 그 땅에서 죽기를 원했다. (중략)

그러나 어느 누구도 우리가 평화롭게 살도록 가만 놔두지 않았다. 너의 조부모, 부모, 그리고 지금 네 식구들까지 우리는 3대에 걸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살아온 피해자들이다.

아들아, 베트남 국민들이 평화롭게 살도록 기도해야 한다. 향긋한 과일 나무를 심고 거기서 나는 열매를 먹고 즐기며 살던 우리의 선조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살던 땅 베트남과 구엔 쑤안 가문의 뿌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 약사

1945년 8월,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지역 국가들에 대한 식민통치를 재선언하면서 베트남은 계속해서 프랑스의 점령 하에 있게 되었다.

1954년 베트남의 공산주의 지도자 호치민은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 1946년부터 시작된 제1차 베트남 전을 종식시켰으나, 제네바협정에 의해 북위 17도를 군사 분계선으로 남북 베트남으로 갈린다. 당시 제네바 협정에서는 1956년에 남북 베트남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합의되었다.

그러나 베트남이 공산주의 중국의 영향권 내에 들어가거나 인도차이나 반도가 공산화 될 것을 두려워한 미국은 1955년 10월 미국의 영향권 아래 있던 고 딘 디엠 가톨릭 주교를 남베트남 지도자로 내세운다. 이에 북 베트남은 제네바 협정의 준수를 내세워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했고 미국은 이를 거부하며 남베트남에 군사적 대결 태세를 강화시킨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에 뛰어 들었던 것은 1964년. 그해 8월 2일 미국은 하노이의 외항인 통킹만에서 미군의 구축함이 월맹 어뢰정에 공격당했다고 주장(1972년 다니엘 엘스버그 박사가 베트남전 극비문서인 펜터곤 페이퍼를 폭로, 통킹만 사건은 조작된 것으로 밝혀짐), 북베트남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고 1965년에 들어서는 무차별 전면 공습을 개시한다.

1968년 초 베트남전이 절정에 달했던 당시 약 52만5천명의 미군이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었다. 베트남전으로 궁지에 몰린 존슨 대통령은 그 해 북베트남에 평화협상을 제의하기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그해 대선 재출마 포기를 선언했다.

1970년 미국은 북베트남을 지원하던 캄보디아를 침공, 미국 내 반전 시위가 고조된다. 당시 오하이오 켄트 주립대학에서 4명의 학생이 반전시위 도중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1973년초 미국은 베트공 및 북베트남과 철수에 합의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1975년 4월 30일 미군 헬기가 마지막으로 사이공을 떠나면서 제2차 베트남전이 종식되고, 이 때 약 1천만 명의 보트피플이 베트남을 탈출한다. 미군 없는 베트남을 파죽지세로 평정한 호치민 군대는 이듬해 7월 2일 공식적으로 통일을 선포했다.

철수 당시 대통령이었던 제럴드 포드는 1999년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우리는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영웅적인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퇴각의 슬픔을 겪어야 했다"고 회고했다.

1957년부터 시작해 1975년 4월 30일에 끝난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 베트남 전에서 미군은 5만8천명의 사망자와 30만명의 부상자, 그리고 1836명의 실종자를 냈다. 이 기간동안 남베트남인들은 22만4천명이 죽고, 북베트남 및 베트공은 1백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미국은 1994년 2월 베트남에 대한 금수조치를 해제한 데 이어 1997년 4월 대사급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2000년 11월 16일 종전 후 최초로 클린턴 대통령이 베트남을 공식 방문했다. 6월말 경 카이 베트남 수상이 최초로 미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AFP 5월 1일자, Voice of America 4월 30일자, 시카고 트리뷴 4월 30일자 등 참고) / 김명곤

덧붙이는 글 | koreaweeklyfl.com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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